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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한국시의 정체성 찾기 / 염창권

by 丹野 2009. 2. 20.

 

 

 

                       한국시의 정체성 찾기

 

                                                         염창권 (시인, 광주교대 교수)

 

 


1. 들어가며


“읽어보면 무언가 그럴듯한데,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이 말은 다른 누가 아닌 필자의 시에 대한 일반 독자의 반응이다. 이에 비해 시단의 평은 소박하고 정직하며, 일부는 촌스럽기까지 하다는 언급이 있다. 이쯤 되면, 일반 독자 그룹과 문인·평론가 그룹 간에는, 문학 양식사용의 측면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의 창작과 수용의 면에서 공감적 소통의 실현은 다면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과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독자에 대한 고려는 이 시대 시인들이 각성해야 할 대목이다.


시를 흥미롭게 쓰는 것은 시의 위의威儀를 허무는 일로 생각해서 이를 꺼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흥미’와 ‘위의’를 상반 관계로 보려는 견해는 온당치 못하다. 이는 흥미 위주의 통속 소설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리라. 흥미진진한 소설 가운데도 얼마든지 예술성을 지닌 명작들이 많지 않는가. 아니 재미없는 소설은 명작이 될 수 없다. 시라고 해서 다를 것이 무엇인가. … 문제는 재미있게 쓰면서도 격을 떨어뜨리지 않게 하는 것이지, 격을 지키기 위해서 재미를 배제하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 임 보, 2007, 「시인의 말」 중에서


위의 인용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해결책을 찾으려면, 다음과 두 가지 질문과 함께 실제 독서 현상에 대한 파악과 점검이 필요하다고 본다.


첫째, 독자들은 어떤 유형이 있으며, 이들은 각각 어떤 시에 흥미를 보이는가.

둘째, 시인은 통속성에 기대지 않고서도,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창작 스타일을 어떻게 발견해 낼 수 있는가.


위의 두 가지 모색은 우선적으로 독자층에 대한 치밀한 조사를 요구한다. 시 텍스트가 시인과 독자간을 대화적으로 소통시켜주는 매개물이라 할 때, 독자에 대한 고려가 중요한 사항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시인 스스로가 독자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독자를 고려하여 쓸 수 있는 창작 스타일(형상화 과정에서 사용하는 기법들)을 개발하지 못하면, 의욕만 앞서고 작품성이 따라 주지 못할 경우가 생길 것이다. 시가 주는 감동성은, 통속성이나 지엽말단의 감각적 쾌락의 추구가 아니어야 함은 당연하다. 시인의 입장에서는 정서 및 미적 체험을 통한 감동성이 최종적으로 독자에게 실현될 수 있도록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이다.

이 글은 위의 전제에 대하여 필자 나름의 견해를 바탕으로 답을 찾아보고자 시도되었다. 논의가 상식적인 차원에서 진행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 필자의 소박한 견해를 출발점으로 하여 해결가능성이 있는 참신한 의견들이 덧붙여지기를 기대한다.


2. 시(서정시)에서 감동성의 회복을 위한 몇 가지 전제


가. 미적 체험과 미감의 소통 방식


아름다움은 고대로부터 인간의 대단한 관심사였다. 더구나 예술가들은 미의 종사자이자 예찬자였다. 그러나 그 자신이 미적 당사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용맹성, 또는 아프로디테의 우아한 아름다움 등은 신화적 인물이 가진 아름다움이었고, 이들을 예찬하는 자는 시인, 화가, 조각가 등의 예술가였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본인이 소유하지 않은 것으로, 아름다움을 특별히 잘 보고 예찬할 수는 있으나 스스로가 그 아름다움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인은 다만 상상의 공간 속에서 그 아름다움을 호명하고 정신적으로 일체감을 가질 뿐이었다.

이후 근대적 자아 개념이 형성되고 나서, 시인도 자발적 주체로서 자신의 미적 욕구에 따른 가능성을 추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시인은 자신이 심각하게 잘 인식할 수 있는 미적 대상과 주체인 자아 인식 사이에서 괴리감을 맛보게 되고, 결과적으로 상처받는 자아를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시인은 아름다움을 잘 인식하고 그것을 사랑함으로써 미적 이념에 충실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아와 미적 이상간의 거리를 발견하고 고통 받으며 가난한 영혼을 갖게 된 자라는 역설적 언급이 가능해진다.

미적 상태는 선험적이든 사회적으로 형성된 객관적 지표에 의한 것이든 간에, 어떤 가능성의 영역- 조화harmony와 완전성perfection-을 지니고 있다. V. P. 셰스따코프는 『미적 범주로서의 조화』에서 조화를 출발점으로 삼아 완전성perfection의 상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미적 범주를 분류하였다.(박성현, p, 62에서 셰스따코프 재인용)


아름다운 것     - 실현된 완전성으로서의 조화

숭고한 것       - 완전성의 잠재적 가능성으로서의 조화

추한 것 - 불가능성, 완전성의 부재不在로서의 조화

희극적인 것     - 상실된 완전성으로서의 조화

비극적인 것     - 완전성의 파멸, 완전성에 대한 불완전성의 승리로서의 조화


위의 분류는 미적 범주를 완전성의 형식과 조화와의 관계에 의해서 미적 속성(객관적)들을 분류하고 있다. 즉, 속성에 따라 미를 분류하면 우아미, 숭고미, 추미, 해학미, 비극(장)미 등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미적 범주는 사회성에 따라 형성되는 객관적인 범주들이고, 실제적으로 개별 시인의 예술적 창조(주관적 범주)에 의해 산출되는 미적 감정이나 미적 이상, 혹은 작품들은 간주관적(변증법적인)인 것이다.

이에 따른다면, 미의식이나 미적 이상은 당대의 사회 속에서 어느 정도 규명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의 미인상과 현대의 미인상이 달라진 것과 같다. 더구나 개인적인 미적 이상 설정에 있어, “눈에 꺼풀이 씌워졌다”고 말할 때와 같이 종종 완전성의 기준이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부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논리로 미적 감동이라는 것도, 독자나 시인이나 간에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설정된 완전성에 대한 조화의 정도에 따라 생성될 것이다. 즉, 자신이 가진 미적 이상에 상당한 합치를 했을 때 감동적이라는 반응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독자의 미적 이상과 정서적 취향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점은 독자의 취향에 아주 부합하는 글쓰기가 독자로부터 반응을 얻기에 용이함을 말한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든 정서적 취향에도 그 시대의 흐름이 있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서는 그와 같은 정서적 취향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시대의 베스트셀러가 후대에는 흔적도 없이 잊혀지는 것과 같다. 따라서, 당대의 정서적 취향에 물러서지도 않으면서도 세대를 두고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 발견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문학의 보편성과 관련하여 논의될 문제이며, 엘리어트가 말한 “정서로부터의 도피”라는 언급과 연결된다. 예를 들면, 윤선도의 「오우가」나 황진이의 「동짓달」은 거의 유사한 시대에 씌어진 시조로 당대의 사대부로부터는 전자인 「오우가」가 많이 불려졌으리라 추론을 해 볼 수가 있다. 그러나 현 시조 문단에서는 후자인 「동짓달」이 더 사랑을 받고 있다. 일반 독자의 관점에서도 「동짓달」이 자신의 미적 이상과 합치될 가능성이 많다. 물론 이 두 시조 모두가 보편성을 지닌 우수한 작품이며, 각각의 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미적 감동은 내용과 형식의 양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작품의 내용에 관한 것으로 독자의 경험 세계와 추구하는 이상적 상태에 얼마나 합치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두 남녀 간의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한 사람이 죽었을 때, 다른 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독자의 입장에서 사랑을 잃은 슬픔이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본다면, 다른 한 사람도 슬픔을 못 이기고 죽음에 이르러야 한다(<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이)고 볼 것이다. 다른 한 사람도 사랑을 잃은 고통을 보여주다가 끝내는 죽음에 이르렀을 때 (조선시대 열녀문, 드라마 <완전한 사랑>과 같이)에, 독자는 자신의 미적 이상과의 조화를 느끼고 미적 감동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나 정서 전달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구체성이나 진정성의 기준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독자의 미적 이상과 조화를 이룬다고 해서 모든 작품이 예술성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잃은 슬픔은” 인류의 보편적 주제이고, 비극미를 보여주기에 가장 용이한 장면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나 슬픔의 정서가 전달되기 위해서는 예술이라는 형식적 장치를 통과하여야만 한다. 이때, 예술적인 형식은 당대의 문화적 관습으로 형성되어 있다. 시조 <태산이 높다하되>는 교훈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만, 현대시조에서는 이와 같은 표현을 선호하지 않는다. 무대 위에서는 대사의 전달도 중요하지만, 배우의 캐스팅이나 무대 미술, 음악 등의 사용에도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종종 평론가들은 이미 공개된 내용보다도 이 형식적 장치들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점은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의 내용과 주제가 보편적인 정서나 가치를 제시한다면, 대부분의 주제와 가치들은 이미 사용되고 공개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전문적인 시인들은 주제(시인 혹은 독자에 의해 선언된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으로서 제재 선정의 구체성이나 형상성으로서 은유, 환유, 상징 등의 사용과 통일성 있는 배열이 중요한 감상의 기준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실상, 내용과 형식의 문제로 단순화되는데 이 양자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제재를 선정하였을 때, 은유 등의 표현의 측면에서도 성공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므로 어떤 미적 대상으로부터 가치 있는 의미를 발견했을 때 이미 시인의 머릿속에서 의미가 통일성 있는 시의 형상으로 주조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역으로 어떤 시인이 은유나 환유, 또는 상징 등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을 때 그는 미적 대상을 은유적으로, 또는 환유적으로 바라보고 의미를 발견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방향으로 접근하든 간에 내용과 형식은 통일성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현 시단에서는 시인들의 수가 많아졌을 뿐 아니라 교육의 정도도 높아졌기 때문에, 스타일이나 비유 등의 표현 형식면에서 많은 실험들이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시인들이 다양한 기법들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의 경우는 오히려 대중문화나 소비 취향의 대중 독서물을 선호하는 등의 문학 능력 면에서 오히려 수준이 낮아지고 있다. 그래서 시인들의 고도화된 기교의 사용은 오히려 일반 독자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해할 수 있는 독자가 있다면, 이미 그는 시를 쓰거나 시 쪽을 향해 몸을 도사리고 있는 지망생일 경우가 많다. 이 점이 일반 독자와 시인들 간에 소통 단절을 가져오는 요인이라고 본다.

시인들은 전문성을 고집하며 독자들을 방치할 것인가?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쉽고 의미가 깊은 시”가 좋은데 그런 시를 만나기 어렵다고 한다. 예전에 독자의 입장에서는 서정윤의 「홀로서기」에서 쉽고 감동적인 장면들을 발견한 듯하다(이와 같은 독서 경향이 지금도 유효하다). 독자의 정서와 매우 일치하여, 개별 존재의 쓸쓸함을 나타내 주는 정서적인 그의 문체는 한 시대를 풍미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대부분의 경우, 스타일이 뛰어난 작품들이 그보다 대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보이듯 평단의 반응은 혹독했다고 본다. 한편으로, 대중 독자들은 그 평문을 읽을 기회도 없었고, 읽으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의 경우, “교육되지 못한 대중 독자를 올바르게 교육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미학적인 순수성을 포기하고 대중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정말 대중적인 스타일을 새롭게 개발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기껏해야 우리의 대부분은 글 쓰는 작가들의 영역 내에서 관습에 맞게 시를 쓰고, 그 가운데 진지한 독자들이 많아지기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형국에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볼 문제이다.


나. 서정성의 문제

알려진 바와 같이, 서정시抒情詩라는 명칭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사용되어 왔던 ‘lyric’의 우리말 번역어이다. ‘lyric’은 원래 그리스 악기의 명칭인 ‘lyre’-수금竪琴, 칠현금七絃琴-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이는 서정시가 노래로 가창되면서 ‘lyre’의 반주에 의탁하였기 때문에 연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서정시lyric라는 명칭은 주로 노래, 노랫말, 반주, 악극 등의 의미와 연결되며 시대적으로 향유되어 왔다. 오늘날 한국에서 서정시lyric는 시poerty라는 명칭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운문 양식의 글로, 그 특징은 일인칭 독백체, 고조된 감정을 짧은 진술에 함축시킨 글이다.

그러면, 한국의 평단에서 인식하는 서정시에 관한 관념은 어떠한가. 독자반응비평이나 수용미학 등에서 말하는 독자로서의 역할을 다 하려면, 이상적 독자ideal reader의 능력을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 문단에서 그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평론가에 해당할 것이다.


① 서정시와 서사시는 전달 내용의 차이에 의해 구분된다. 서정시는 흔히 감정이라고 통칭되는 마음의 움직임을 전달하는 양식이다. 여기에 비해 서사시는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숭원)

② 서정시의 중요한 규정이 ‘나’라는 주관성이 있는 곳에서의 글쓰기라면, 현재적/역사적 장소에서의 진솔한 자기 고백이자 자기 논리에 의한 미적인 렌즈를 적극적으로 고수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허혜정)

③ 서정시의 문학적 정의는 개인의 주관적 정서를 표현한 시이다. 좁은 의미에서 서정시란 순수한 감정 체험을 나타낸 것으로 언어의 의미 전달기능보다는 읽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순수시와 관계가 깊다. 따라서 서정시와 자연은 밀접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자연이야 말로 객관적 대상이면서 주관적 감정을 투사할 수 있는 보편적 상관물이기 때문이다.(이용욱)


위의 세 평론가에 의한 언급은 주로 시의 내용 측면에 국한된 것이다. 서정시의 주요 내용은 정서 체험의 표현과 소통이 주가 된다. 그리고 좁은 의미에서는 이 정서 표출 방식을 심미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서정시’라는 단어에서 유추한 ‘서정적抒情的’이라는 작용태의 명칭을 사용하면서 같은 정서적 표출이라 하더라도 분노나 비판적인 것보다는 그리움, 사랑, 애틋함, 아름다움의 체험을 통한 쾌미, 때로는 애절함, 정화된 슬픔, 자연 관조, 계절 실감 등의 우아미優雅美 쪽으로 기울어 있다. 즉, 추미醜美의 대립항에 있는 것을 서정적인 상태로 보는 것이다. 서정시에서 개념 범위가 가장 좁은 ‘순수 서정시’에서는 시어로써 ‘똥’, ‘개새끼’, ‘대가리’, ‘섹스’ 등과 같은 비속어나 노골적인 표현은 매우 어울리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위 세 평론가의 언급을 토대로 하여, 잠재적 억압 기제인 ‘순수’라는 유표소를 제거하기만 하면 ‘서정시’의 개념 범위를 아래와 같이 상당한 정도로 확장하여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서정시는 ⓐ 시인의 주관적 정서를 표출한다.(1인칭 독백체일 수도 있고, persona를 통한 3인칭도 가능하다.) ⓑ 시를 통하여 주관적 정서를 소통시키려고 한다. ⓒ 소통의 결과는 독자에 의해 환기된 정서 체험이다.

이상의 논급을 통하여 볼 때, 서정시는 주관적 정서의 체험과 그 소통이 매우 중요한 과제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사조로 보아서 심미주의나 낭만주의에 어울리는 듯하다. 워즈워드가 말한 “시는 강한 감정의 자연스런 범람”이라는 명제가 그와 흡사하다.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 김영랑 「내 마음을 아실 이」 부분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정지용 「유리창琉璃窓 1」 부분


김영랑과 정지용은 1930년대 ‘시문학’의 중심 멤버였다. 위 두 편의 시는 공통적으로 대상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이나 상실감이 주요 정조로 나타난다. 대상과의 단절감이나 소통 불가능성에서 오는 서정적 자아의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런데, 두 시의 정서 체험의 서술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김영랑 시의 경우, “아! 그립다”,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에서처럼, 주관적 정서의 노출이 처음부터 끝행까지 일관되게 드러나고 있다. 시 전체가 감정의 소용돌이에 푹 빠져 있는 셈이다. 이 경우 독자의 입장에서는 정서의 진폭이 일정하기에 혼란 없이 서정적 자아가 제시하는 “그리움만 절절한 사랑의 상태”에 접근할 수가 있다.

정지용 시의 경우,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에서의 행위항에 대한 해석을 거쳐, 끝행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로 폭발되는 정서적 체험에 이르기까지는 논리적 독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독자의 입장에서는 공감각적 이미지를 동반한 서정적 자아의 행위 체험을 따라가다가 최종에 가서야 슬픔이 폭로되는 심리적 과정을 거치게 된다. 거기에 덧붙여 이 시가 어린 자식을 잃은 극한의 슬픔을 문면 뒤에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려면, 또 다른 해석소를 끌어들여야 한다. 즉, 이 시는 정서적 질곡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함축되어 있는 “자식을 잃은 슬픔의 상태”를 추체험하기 위해서는 이중의 지적

인 독서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정호승 「미안하다」 전문


앞의 시에 비해 반세기가 훨씬 지난 뒤에 발표된 정호승의 시는 의미 확정의 시간이 좀더 지연된다. 의미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즉, ‘길/산’의 반복 → ‘울고 있는 너(산이 끝났으므로 길이 시작되는 곳)’ → ‘사랑해서 미안하다(서정적 자아인 나)’와 같은 구조이다. 여기서 화자와 청자는 길과 산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두고 대립적이다. 즉 “내 사랑 때문에 울고 있는 너; 사랑해서 미안한 나”와 같은 구조이다. 그러면, ‘너와 나’는 어떤 사이인가, 어떤 일이 벌어진 사이인가.

독자의 입장에서는, 시인의 자전적 요소가 삭제된 상태에서 독서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애초에 확정된 의미라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시는 사랑 때문에 울게 되는 청자와 또 이로 인해 미안해하며 사과를 하는 서정적 자아인 ‘나’를 지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사랑을 둘러 싼 대립적 구조는 하나의 기표로서 역할을 할 뿐, 어떤 의미도 확정짓지 않는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추구해야할 정서적 추체험이 없으므로, 자신을 둘러 싼 사랑의 경험을 이 기표의 틀 안에 집어 놓고, 한 때는 대립적이었던 사랑의 순간을 회상하면서 사랑 때문에 미안했던 감정 놀이를 할 수밖에 없다.

이 때 독자는 지연된 의미를 확정하면서 기쁨을 느낄 것인가, 아니면 곤란을 겪을 것인가. 현대시가 독자에게 시를 통해 지적인 유희를 요구하는 장면이다.


다. 가락의 회복과 심미적 가치의 고양

서양의 서정시lyric가 노랫말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 채 변천을 거듭해 왔듯이, 동양에서의 시詩라는 양식도 가창이나 음영의 방식으로 향유되어 왔다. 포우가 말한 바, “시는 아름다움의 운율적 창조”라고 했을 때, 이는 시의 전통을 언급한 것이다.

근대 이후, 시가 정형률에서 일탈하면서 시의 의미와 맞물릴 수 있도록 자유로운 율격을 추구하기 시작하였고, 더욱이 최근 우리 시단에서는 산문체형의 시가 많이 창작 되고 있다.

대체로 현대시가 내재율을 추구한다는 점에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 내재율을 추구하는데 있어 시인마다 특색 있는 보격을 추구할 수 있고, 산문시형을 취할 수도 있다. 그것은 시의 외형이 내용과 맞물릴 수 있도록 시인이 추구해야할 문제이다.

그러나, 서정시에서 시인의 주관적 감정 표출이 우선이 될 때, 그 감정의 결이 만들어내는 가락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소통의 효과 때문이다. 인간의 정서적 긴장이나 이완은 심장 박동이나 호흡기 감각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정시에서 감정의 결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가락을 살리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가락을 자연스럽게 타는 시가 보다 기억하기가 쉬우며, 낭송을 통한 심미적 즐거움을 창조해 내기도 쉬워진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김영랑 「끝없


는 강물이 흐르네」 전문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이성복 「남해 금산」 전문


반세기가 넘는 시간적 거리를 두고 창작된 위의 두 시는 상호 유사한 가락을 가지고 있다. 종결어미 ‘∼네’를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반복적인 가락을 만들어 내고 있다. 각 행은 전구前句와 후구後句가 대응되면서 시간적 흐름에 따른 의미 진행을 순조롭게 한다. 또한 의미 전환부가 되는 곳인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에서는 정서적 긴장을 수반하면서 가락이 짧아졌다.

시가 감동을 창조하고 소통시키는 하나의 문학 형식이라면, 독자의 입장에서는 시를 읽으면서 불쾌의 감정보다는 쾌미의 감동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현실이 비록 누추할지라도 시를 읽는 동안 고상하고 순전한 감수성을 즐기고 싶어 할 것이다. 이는 서정시가 가지고 있는 위안의 방식이지 독자를 우롱하거나 사기 치는 일은 아니다.


라. 낭만적 감수성의 회복을 위하여

앞 절의 논의와 연결하여 시의 전통을 따지자면, 시적 발상의 기본은 낭만적 감수성에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최근 우리 시는 강렬한 자기 해부의 파토스pathos에 몰입해 있는 것 같다. 시적 자아는 과격하고 추악하며, 비극적이며 넝마처럼 몸이 찢겨지고 해부 당한다. 낭만적 이상은 사라지고 리얼리즘에 토대를 둔 현실적 타락과 무가치성, 회의감 그리고 변덕스러움 등이 시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세기말적 퇴폐성이 기법을 달리하여 21세기의 초반으로 이행된 성 싶다. 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세타령이거나 정신병리적인 고백을 담은 시들이 많다. 이것들을 들여다보면서 나의 본질을 생각하고, 나의 병인病因을 해부한다. 추악한 나의 정신세계가 시를 통해 들여다보인다. 시인들은 병자인 나에게 알맞은 거울을 비춰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시를 통해서 나를 바라 볼 수 있지만 나는 계속해서 병들어가고 무기력해진다.

이 지점에서 시인을 저주해야 할 것인가 고마워해야 할 것인가.

낭만은 이상적 세계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다. 진미한 사랑과 참다운 삶의 세계에 대한 희구는 인류의 오랜 상상적 습성이었다. 이 낭만적 상상력은 삶이 아무리 황폐하더라도 현실을 견디는 힘을 제공해 준다. 추악한 현실에 대한 인식만 지배하고 있고, 이상 세계에 대한 동경이 사라지고 없다면 현실은 얼마나 삭막하고 고달플 것인가. 이상 세계에 대한 동경 자체가 현실 세계를 몰각하는 일은 닐 것이다. 현실의 추악함 위에 발을 딛고 있다할지라도, 인접한 미래에 대하여 생각하고 긍정적인 측면에서 삶의 비전을 설정하는 일은 중요하다. 아무도 현실에서 가치 있는 것, 그리고 미래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시인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볼 수 있다.


3. 표현 주체와 감상 주체 간의 거리


시의 생산과 소통을 시인과 독자 간의 대화적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시인은 예술가답게 새로운 기법을 발견하려고 애를 쓰고, 그 기법을 작품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노력한다. 반면에 일반 독자들은 이와 같은 기교나 기법들을 시에 접근하기 까다롭게 만드는 장치들로 여긴다.

여기서는 독자의 층위를 일반 독자(이하 독자)와 시인 독자로 나누어 그들의 추구 의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가. 일반 독자로서의 감상 주체

일반 독자의 경우는, 보다 자신의 삶과 연결되는 제재나 내용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유는, 이 독자들이 기법 면에서 뛰어난 현대의 시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이점은 미술 애호가가 인상파의 그림에서부터 최근의 회화 경향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애호하는 것과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대부분의 시 독자들은 제도권 교육을 벗어나면서부터 시 문화의 향유와 사용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① “농촌은 도시의 미래다.”

그는 농촌에서 태어나 농촌에서 자랐다. 순박하고 순수한 것에 대한 애틋한 정이 남다르다. 그래서인지 급속도로 사라져가는 농촌 문화에 대해 안타까움이 클 수밖에. 애송시나 애창곡에서도 농촌냄새가 물씬 묻어난다.

그는 「금강」, 「껍데기는 가라」로 유명한 신동엽의 「香아」를 좋아한다. 이 시는 문명의 단맛을 탐닉하는 삶을 비판하고, 생명력 넘치는 자연친화적인 삶을 제시한 작품이다. ……

“…… 그 속에서 활기찬

노동을 하는 삶의 역동적 세계, 삶의 건강성을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현대시』 2007. 6월호: pp. 220~231 중에서 일부 인용)

② “내 이름 석자를 부끄럽게 하지 않았다.”

어려웠던 그 시절, 그에게 위안이 되고 용기를 준 시가 바로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다. 그는 가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고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어머니는 평소 아들에게 “힘들더라도 남에게 부담을 주지 마라” 고 격려했다. 일찍이 홀로서기를 했던 그는 별을 헤며 자신에게도 인생의 봄이 오리라 굳게 믿었던 것이다. ……

“……비록 큰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내 이름 석자를 부끄럽게 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시』 2007. 10월호: pp. 210~217 중에서 일부 인용)


위의 두 인용을 보면, 본인이 애송하는 시가 인생의 좌우명처럼 큰 감동을 주고, 삶의 지향점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독자들의 가장 큰 관심은 내용성이다. 압축적인 제시보다는 풍부한 열거와 향토적인 정서가 두드러진 장면으로부터 감동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①의 경우에는 시가 가지고 있는 향토적 생명성(작품의 분위기)이 주요한 미감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②의 경우에는 소년기의 순수한 지향과 성인이 되어서도 그 지향을 잃지 않으려는 염결적 의지가 삶의 추구와 겹치면서 주된 미감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위의 두 독자의 경우, 시가 이들 삶의 추구 과정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는 위의 독자에게 지향하는 향토 세계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기도 하고, 좌우명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들의 경우, 시의 표현 기법 자체가 시 감상에 있어서 큰 영향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형식미 자체가 미감의 요소는 아닌 것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위의 경우에 비해서 저급한 수준이다. 통속적인 감각 경험 묘사와 직접적인 정서 제시 등, 서술에 있어서 구체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은 시로부터 소설 쪽으로, 진지한 소설로부터 환타지 소설로 이행하고 있다.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보다는 주인공의 능력이 만화처럼 과장되게 드러나는 가벼운 소설을 좋아한다. 이는 우리만의 사정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문학은 소비의 대상이지 진지한 탐구의 대상에서 물러난 듯 하다. 그렇다면 이들 독자를 위해 더 이상 시를 쓸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믿고 위안을 삼는다면 독자들 중 일부는 삶의 진정한 국면에 대해서 고민할 것이고, 지구가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진지한 인간들이 늘어나서 시에 대해 갑자기 관심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아주 허약한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야 할 듯하다.


나. 예술가(시인)로서의 감상 주체

시인들은 표현의 주체이자 감상의 주체 역할을 하기도 한다. 비평가가 시적 대상에 대해 감상 주체의 역할만을 하는 것과는 대조가 된다.

예술가(시인)는 당연히 스타일, 기법을 사용하고 이를 응용 발전시킨다. 스타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이를 예술가라 인정하기 힘들다.

디키G. Dickie는 화폭을 그림물감의 배열로 바라보지 않고 하나의 형상으로 바라보는 근거는 관례에 의해서 규정되며, 전자의 ‘비미적 바라봄’과 구별되는 후자의 ‘미적 바라봄’의 상태를 설명한다. 후자의 ‘미적 바라봄’은 예술작품의 감상과 평가에 필요한 바라봄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일차적 관례라고 한다. 더 나아가 그는 예술 작품의 감상과 평가에 있어서 필요하지 않은 부분을 제거하는 기능을 하는 것을 이차적 관례라고 한다. 일차적 관례가 하나의 예술 활동을 성립시켜 놓고 지탱시켜 주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의 예술 활동을 규약하는 규칙이나 관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미 이 일차적 관례를 선제presupposition하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오병남 역, 1982, p. 167)

올드리치는 이러한 규범을 만드는 힘을 “미적 지각”이라는 개념으로 특성지우고 있다. 즉, 우리가 어떤 예술 작품의 창작과 감상에 참여하고 있다는 공유된 이해가 따른다면, 관례(관습)에 따른 미적 참여는 기초적이라 할 수 있다. 위의 언급을 참조하면 일차적 관례를 선제presupposition하지 못하고서는 어떤 예술 활동도 제약을 받게 됨을 알 수 있다. 우리 시인들은 시적 관례나 규약들을 알고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는 이 규약을 해체하려는 노력까지 보인다. 모두가 형식미에 대한 추구 의지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형식적 규약을 “알고 사용함”의 정도에 따라 시인의 레벨을 구분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조시인은 시조의 형식을 마땅히 알고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시조 형식을 사용하여 낱말을 조합하였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시조가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는 삶의 진정한 국면에 닿아 있어야 하고, 진성성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진정성 있는 발견 다음으로 형식적 추구와 조화를 이루었을 때 시적 성공을 하게 된다.

그런데 최근의 경향을 보면,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본다. 이것은 동일한 렌즈로 비슷비슷한 장면을 마구 찍어대는(촬영) 것과 다름이 없다. 최근 양산되는 시들은 맹목적인 의지라도 갖는 듯, 동일한 어법의 반복적 구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그 작품들은 형식적 기법의 능숙한 사용 여부에 따라 평점이 매겨진다. 시정신이 깃들만한 여지가 없다. 뜀틀 운동에서 공중돌기나 마루에 착지하는 완성도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것과 같다. 문학은 운동과 달리 정신 영역에 해당하는 활동으로 기술보다는 사유의 힘이 중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독자의 역할에 머물러 시인이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본다고 할 때, “왜 시가 필요한 것인가, 그리고 나의 시는 연습을 위한 훈련 과정에 있는가, 아니면 정신과 영혼의 표현으로서 시가 정말 필요한 것인가” 등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가 있다.


4. 최근 시적 발상 및 표현 경향

 ― 은유와 환유의 알레고리Allgory 차원의 실


현 알레고리란 원래 우화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현실 세계를 풍자하거나 비판하는 기법을 말한다. 즉, 비유적인 이야기로서 현실 세계의 문제를 제시하는 방법이다. 이솝의 우화나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알레고리는 상징과 유사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시적 표현의 측면에 한정하여 말한다. 상징symbol에서 원관념과 보조 관념의 관계가 다多 : 1의 상태라면, 알레고리는 원관념과 보조 관념의 관계가 보다 명료한 1 : 1인 상태를 말한다. 이 때 알레고리를 통한 비유는 문장 수준이 아닌 문맥 및 글 전체에 걸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비유의 방식과 구별할 수가 있다. 알레고리 기법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근본 비교(fundamental comparison-한 작품에서 다른 모든 비교를 성립시키는 토대가 되는 비유), 엘리어트가 말한 중층 묘사 등과 비슷한 개념을 가진 용어로 사용할 수 있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은유나 환유의 알레고

리 차원의 실현이라 함은 은유나 환유적인 비유가 문장 수준이 아닌 텍스트 차원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쉽게 설명하기 위함이다.


꼭지에 푸른 이파리가 매달려 있다. 싱싱함을 말하기 위해 작은 가지까지 잘려 온 것이다. 며칠이 지나면 버려질 이파리, 밀감 밭을 떠나 뭍으로 나온 저 작은 상표가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이파리가 떠난 박스 안에서 오래도록 단맛이 고일 귤들.


귤을 담아주는 저 아줌마도 지쳐 돌아와 골방에 쭈그린 채 훌쩍거리던, 이파리 같은 젊은 날이 시들며 아름다워진 것이다. 마른 껍질에도 향낭이 있어 다시 펄펄 끓어오를 골방을가슴에 품고 살아가나니, 지독해져야 오래 향기로울 수 있나니 옆구리 검정 봉다리에서 내 시든 이파리 부스럭거린다.

- 이정록 「귤」 전문


위의 시를 도식화하여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이파리가 달린 귤(신맛)        이파리 같은 젊은 날

   ↓           +        ↓       (의미의 겹침)

시간이 흐른 뒤(단맛이 고인 귤)    시들며 아름다워진 아줌마

       < 봉다리에 담겨진 귤과 아줌마의 생 >

              +        (의미가 다시 한 번 더 겹쳐짐)

<이와 유사하게 봉다리 안에 담겨진 젊은 나의 이파리와 그걸 받아든 현재의 나>


텍스트 전체 층위에서 의미 단위가 대립적으로 도식화된다는 점에서 필자는 특별하게 알레고리적 기법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 용어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시 전체 수준에서 비유가 성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줌마의 생계가 귤을 파는 일에 관련되고, 귤이 “이쁘고, 시든”다는 점에서 환유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맛 → 단맛 → 향기” 와 같은 이행은 삶의 숙성 과정을 은유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


나는 피고 싶다.

피어서 누군가의 잎새를 흔들고 싶다.

서산에 해지면

떨며 우는 잔가지 그 아픈 자리에서

푸른 열매를 맺고 싶다 하느님도 모르게

(중략)

내가 기도로서 그대 꽃피울 수 없고

그대 또한 기도로써 나를 꽃피울 수 없나니

꽃이면서 꽃이 되지 못한 죄가

아무렴 너희만의 슬픔이겠느냐

피어도 피어도 하느님께 목이 잘리는

꽃, 오늘 내가 나를 꺾어서

그대에게 보이네 안 보이는

안 보이는 무화과나무의 꽃을

- 박라연의 「무화과나무의 꽃」 전문


위의 시를 도식화하여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꽃이 내부로 피어 보이지는 않으나 안으로 활짝 피어 있는 무화과의 꽃

          안으로 피는 꽃   → 신

                  +          (의미의 겹침)

그대에게 보여질 수는 없으나 안으로 뜨겁게 타는 그대에 대한 지향

          안으로 뜨거운 나  → 그대

                  ↓

통합:역설적 언어의 사용 → “오늘 내가 나를 꺾어서/그대에게 보이네 안 보이는/

              안 보이는 무화과나무의 꽃을”


위의 시에서도 문면에 드러난 의미, 뒤쪽에 본의가 감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기껏해야 “무화과나무의 꽃”인 열매는 안으로 감추어져 있는 화자의 사랑을 나타내는 비유물일 뿐이다. 이 비유물은 시에서 지배소 역할을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의미를 결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앞의 두 시는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시이다. 두 작품 모두 비유를 전체 텍스트의 층위에서 효과적으로 구조화하여 제시하고 있다. 시인 독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기법에 대해서 눈치를 채고 작품을 성공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일반 독자들의 경우는 이와 같은 기법을 인식하지 못할 때 “읽어보면 무언가 그럴듯한데, 이해하기가 힘들어요.”와 같은 반응이 나올 것이 분명하다.

다음 시에서 사용한 주요 기법은 무엇인가.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 마경덕 「신발론論」 전문


5. 나오며


이상으로 현대시에 나타나는 현상과 서정시의 본질에 대하여, 현대시에서 감동성의 회복의 방안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필자의 부족한 시간과 독서가 빚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많을 것으로 본다.

토론자들께서는 편협한 생각을 열어 주시고, 더불어 훌륭한 대안을 마련해 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참고문헌]

권오을, “나의 좌우명, 나의 애송시”, 『현대시』 2007. 6월호. 한국문연.

김영건, “미적 경험의 범주 분석”

박성현, “미적 범주 체계의 철학적 의미”G. Dickie, 오병남 역, 『현대미학』 1982

염창권, “서정과 리리시즘lyricism에 관한 몇 가지 언급”, 『시인시각』2006. 여름호. 문학의전당

이숭원“서정시의 위력과 광휘”, 『시와 사람』 1998 가을호. pp. 100~101.

이용득, “나의 좌우명, 나의 애송시”, 『현대시』 2007. 10월호. 한국문연.

이용욱, “인터넷 시대의 서정과 언어,” 『시와 사람』 2002 가을호. p. 81.

허혜정, “여자인가 죄인인가 광인인가,” 『현대시』 2004. 3월호. p. 48

임 보, 『장닭설법』

 

 

출처 / 우리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