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옷을 깁는 밤
박순호
한 시인의 시집을 덮고 누웠으나
시집 네 귀퉁이가 자꾸만 불붙는 통에 좀처럼
잠들 수 없던 한밤중
침엽수의 바늘을 손에 쥐고 푸른 옷을 깁는 밤은
달이 밝다
바늘을 버리고 바늘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더듬더듬
길을 걷는다
둥글게 모여 있는 소나무
나는 날카로운 바늘을 고른 후
무덤 정수리에 서서 보름달을 배 안 가득 흡입했다
육송으로 짜여진 책상에서 뚝 뚝......
뼈마디 꺾이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 모든 흐름이 정지한 시간
오래된 책상이 벽에 기대어
신열身熱을 앓는 것일까
불타버린 시집 속에서 뛰쳐나온 모든 것들
달빛 아래 모여 있다
빈 시집 속, 소나무와 보름달뿐
나는 그 중에서 가장 날카로운 바늘을 골라 익숙하게
한 땀 한 땀 푸른 옷을 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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