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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푸른 옷을 깁는 밤 / 박순호

by 丹野 2009. 2. 23.

 

 

푸른 옷을 깁는 밤

 

박순호

 

 

한 시인의 시집을 덮고 누웠으나

시집 네 귀퉁이가 자꾸만 불붙는 통에 좀처럼

잠들 수 없던 한밤중

침엽수의 바늘을 손에 쥐고 푸른 옷을 깁는 밤은

달이 밝다

 

바늘을 버리고 바늘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더듬더듬

길을 걷는다

둥글게 모여 있는 소나무

나는 날카로운 바늘을 고른 후

무덤 정수리에 서서 보름달을 배 안 가득 흡입했다

 

육송으로 짜여진 책상에서 뚝 뚝......

뼈마디 꺾이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 모든 흐름이 정지한 시간

오래된 책상이 벽에 기대어

신열身熱을 앓는 것일까

불타버린 시집 속에서 뛰쳐나온 모든 것들

달빛 아래 모여 있다

빈 시집 속, 소나무와 보름달뿐

나는 그 중에서 가장 날카로운 바늘을 골라 익숙하게

한 땀 한 땀 푸른 옷을 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