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를 읽다
나호열
폐사지는 말 그대로 절이 있던 빈 터입니다. 그러나 그 빈 터에 보물이나 국보로 가늠할 유물이 출토되거나 남아 있게 되면 법령에 따라 빈 터로 남겨지게 되는 것이지요. 보전되고 있는 폐사지에는 그래서 탑이나, 전에는 부도라 불렸던 승탑이나 고승들의 탑비, 그리고 석등이 남아 있습니다.
처음 폐사지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안정된 직장을 그만 두고 험난한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첫 걸음을 내딛었던 막 불혹에 이르렀던 삼십 년 전 여름이었지요. 강원도 고성 그러니까 휴전선 바로 밑이어서 625 전란이후 민간인 출입이 금지 되었던 건봉사가 처음 개방되었던 그 때, 반 세기 가까이 폐허로 살아있던 그곳에 발길이 닿았던 것이지요.
총탄 자국이 선명한 일주문을 지나니 풀들이 사람 키만큼 자라난 광경에 압도되고 말았던 그 때가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전각은 무너지고, 사라지고, 아무 것도 없어서 가득한 공空의 세계가 천 년의 시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지요. “온몸으로 무너진 자에게 또 한 번 무너지라고 / 넓은 가슴 송두리째 내어주는 그 사람”( 「건봉사 그 폐허」:『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1997에 수록)으로 지금껏 마음의 주춧돌로 남아있는 것이지요.
건봉사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번민이나 세상사에 지쳐 있을 때 그렇게 폐사지는 무너짐의 지혜를 말없이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이후 많은 폐사지를 찾아다녔습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마음이 헛헛해질 때 묵언의 대화는 위안을 넘어서서 기쁨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니 폐사지는 오랜 친구, 세월을 가르쳐주는 스승이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금강 아랫녘 폐사지에는 발길이 닿기 어렵습니다. 일박하기도 어려운 까닭에 빛고을과 담양 땅에 가도 내가 좋아하는 고즈녁한 환벽당에 앉아 있다 오기도 시간이 벅차니 다리 건너 개선사지開仙寺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참으로 드물 수 밖에요.
개선사지도 빈 절터이지요. 아니지요. 빈 터를 지키는 석등이 있지요. 오랫동안 땅 속에 몸을 묻고 있다가 다시 삼 미터 오십 센티미터의 장신을 일으켜 세운 지가 이제 반 벡년이 조금 넘었나요?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다음으로 키가 크지만 개선사지 석등은 장대한 남정네라기보다는 왠지 이제 막 꽃봉오리가 올라오는 아리따운 처녀의 뒷모습 같기도 하여 마음이 설레이기도 하는데요, 서기 868년 통일신라 경문왕 때 태어났으니 감히 범접하기가 어렵겠지요. 그렇지만 법당도, 일주문도 다 사라지고 부처님을 공경하는 그 마음 하나로 빈 터를 지키고 있는 그 모습은 전혀 쓸쓸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은 인적이 드물어 찾는 이 또한 많지 않지만 그 옛날 개선사는 인간사 복을 비는 사람들과 구도 求道의 염원을 지닌 승려들의 발걸음이 가득 차 있었을 것이 아니겠어요? 밤이 되면 석등에 불이 꽃 피고 그 불빛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널리 반야 般若의 세계를 펼쳐보이지 않았을까요?.
폐사지는 이무 것도 쓰여지지 않은 교과서입니다. 빈 터에 돋아오르는 풀과 그 풀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모두 다 경전일테니 그 문장을 혼자 읽다보면 인생의 희로애락 喜怒哀樂이 뭉게구름으로 피었다가 사라집니다. 그 마음을 시 한 편으로 남겨 봅니다.
개선사지 석등
석등에 기대어
초여름보다는 애써 늦봄이라 하자
소나기는 말고 눈물이 아니라고 우겨도 좋을
눈썹 가까이 적시는 가랑비라 하자
먼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은 아침보다는
기다리는 이 없어도 돌아가는 마음이 앞서는
저녁 어스름이라 하자
마음이 하냥 깊어져야 만나는 개선사지
꽃대궁만 키를 세우고 피어나지 않은 꽃
그 앞에 서면 꽃은 피는 것이 아니라
창을 여는 것이라고 우겨도 좋겠다
시방十方을 한눈에 담고
제 그림자를 옷깃으로 날리는 꿈을 잊지 않았느냐고
화창花窓에 어리는 혼잣말
어디에도 세월의 뒷모습을 보이지 않아
더 살고 싶은 외로움을 손잡아주는
그 어디쯤
나도 네가 되어 있는 것이다
- 시집 『안부』 (2021)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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