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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세상과 세상 사이

회상回想속에 깃든 삶의 원형에 대한 탐구 / 권재효 시집 <<내 마음속 너도 밤나무숲>>

by 丹野 2014. 10. 13.

 

 

 

 

 

회상回想속에 깃든 삶의 원형에 대한 탐구

나호열 (시인, 경희대 사회교육원 교수)

 

- 사랑이란 우주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다.

 

기억, 추억, 회상

 

애월에 갔었다. 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밤은 깊었고 우리 밖에 손님은 없었던 듯, 전통차를 마셨는데, 여주인은 단아했고, 이미 전부터 그와는 안면이 있는 듯 했고 바닷가에서 멀찍이 떨어진 그 찻집 이름이 예향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겠으나 대화의 줄거리는 가물거리고...... 이 모든 기억은 기계적이다. 시집 『내 마음 속 너도밤나무 숲』을 읽지 않았다면 촉발되지 않았을 이 한 장면은 시인 권재효와 나를 연결하는 고리임은 틀림이 없겠으나 의미를 지닌 독립적인 이야기는 될 수 없다. 마치 죽은 듯 멈춰 있는 지렁이를 건드렸을 때의 몸의 꿈틀거림 그 이상은 아니다. 기억은 의식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음은 틀림이 없으나 나의 일상에 틈입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기억이란 이와 같이 수동적이고 때로는 돌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의식이다. 그러나 기억의 다른 이름인 추억은 오늘을 위무하고 삶의 팍팍함을 이완시키는 낭만적 기제로 작동한다. 제주 출장의 마지막 날 밤, 나그네와 차 한 잔을 나누기 위해 기꺼이 동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권재효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내게 전이되었을 때 ‘애월에 갔었다’는 기억은 ‘권재효 시인과 시를 이야기했다’는 보다 구체적인 정서로 뒤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가 있는 기억을 추억追憶이라고 한다면 시집 『내 마음 속 너도밤나무 숲』의 시편은 시인 권재효가 겪은 경험의 기록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아니 그렇지 않다! 과거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추억이 정지 또는 화석화된 시간이나 사건을 토로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퇴행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권재효 시인의 이번 시편들은 ‘가끔 꿈에 나타나기도 하고’(「몹쓸 사랑에 대한 추억」) ‘우리 다시 불태울 수 없을까?/ 이제야말로 난 하얀 재가 되고 싶은’(「황홀한 불꽃에 대한 추억」) 완성을 향해가는 잠재태 潛在態인 까닭에 미래지향적이다. 나는 화석화된 추억이 현실을 반추하고 반성하는 기제로 작동할 때 비로소 회상 回想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반성작용이 허여되지 않는 기억이나 추억과는 달리 회상은 현실의 결핍이나 부족함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하는 무의식의 드러남이고 적극적인 삶에의 참여를 의미한다. 『내 마음 속 너도밤나무 숲』은 이와 같이 시인이 겪은 이야기들인 동시에 다 같이 나누고 싶은 위로의 마음으로 가득한 시집이다. 이야기가 담긴 시들은 시인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정화시킬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공감대를 넓혀주고 추체험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야기 시는 현재라는 시간의 프리즘을 통해서 바라보는 과거에 대한 회상의 경로를 밟는 까닭에 자칫 산문적 기술 記述에 떨어질 위험을 안고 있다. 과연 『내 마음 속 너도밤나무 숲』이 회상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 시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이야기와 상상의 사이

 

 

체험이 수반되지 않는 상상은 무력하다. 뿌리 없는 나무를 생각할 수 없듯이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는 체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임은 틀림이 없다. 유사한 행위가 반복되는 일상에서 유의미한 이야기(사건)를 이끌어내는 관찰과 심미안은 시인에게는 필수적인 공력이다. 시의 본령이 기술記述이 아니라 묘사에 있다고 볼 때 이야기는 묘약이면서 마약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특이하거나 희소성이 뚜렷할 때 시인은 인과적 기술에 의존하게 되고 이 때 시는 설명에 급급하게 되면서 상상의 원심력(공감共感)이 아닌 체험의 계몽(동감 同感)의 함정에 빠지기 되기 때문이다. 다른 면에서 이야기는 다양한 수사修辭의 기법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풍자와 해학, 더 나아가서 비유의 여러 기법들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유연성을 확보하게 되므로서 세계를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내 마음 속 너도밤나무 숲』의 시편들은 시인이 겪은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의 기조를 골간으로 하면서도 주제적인 면에서나 형태상에 있어서나 활달한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괄목할만한 사실은 시인의 시선이 닿는 사물, 이를테면 시집의 1부에 집중적인 소재로 활용되고 있는 ‘꽃’이라든가 3부에 포진되어 있는 몇 몇 시편에 나타나는 낯 선 이국 풍경의 묘사가 시인이 처해 있는 현실 직시의 궤도를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채 새로운 의미로 치환되고 있다는 점이다. 달개비 꽃을 보고 사파이어 같다고 소리치는 아내와 가짜 사파이어 반지를 예물로 준 무안함이 어우러지면서 가짜인 줄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간 아내의 너른 마음을 묘사한 시 「달개비꽃」, 소외받고 열외된 자의 오기를 그려낸 「엉겅퀴꽃」, 농약을 쳐도 죽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외래종 망초가 亡草가 될 수밖에 없던 연유를 오늘날의 힘없는 서민의 삶을 이끄는 희망으로 재해석한 「망초의 변명」처럼 시인의 시선이 닿는 소재들은 개인사에서부터 힘없는 다중 多衆의 절규를 증언하는데 까지 세심하게 맞닿아 있음은 짐짓 낭만주의자로 단정해버릴 수 있는 잘못을 수정하고 리얼리스트로서의 시인의 안목을 가늠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으뜸’과 ‘버금’ 이라는 ‘甲乙’의 상호호혜적인 미덕이 승자와 패자,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으로 분할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입으로 거품을 뿜는 것은/ 좆도 세상이 하도 꼴같지 않아서이다 ...중략... 아느냐? 어느 땐가는 /지놈들 주둥이를 물어뜯을 지 /한사코 내가 옆으로만 가는 것은 / 지들이 만든 길 아닌 길을 결코 좆지 않기 위해서다’ (시「게」 부분)는 일갈은 오기의 비명을 넘어서 청아하기까지 하다. 어디 그뿐인가? 가기도 쉽지 않고 다시 오기도 어려운 멀고 먼 이국 땅에서 마주하는 풍경도 마냥 여유와 낭만으로 일관되지 않는다. ‘ ....상략 ... 닭장 속의 그들은 / 닭장 밖으로 목을 길게 내밀고는 / 누군가 먹이를 던져주길 기다리고 있었다...중략... 서서히 어둠이 내리는 스웨토의 골목 / 닭장 옆 엄습한 곳에서는/ 화냥년처럼 황홀한 독버섯이 / 소리 없이 쏘옥쏘옥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 시 「스웨토의 아이들」 부분)와 같은 전인류적인 빈곤을 보편적 아픔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단순한 반감과 증오를 넘어서는 따뜻한 시선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 신념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따뜻한 시선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슬픔은 희망의 꽃이다

 

잘라도

잘라도

돋아나는

네가 떠난 후 얻은 불치의 병같은

질기디 질긴 내 슬픔의 근원 같은

- 시 「죽순」 전문

 

시 「양지꽃」이나 「아홉 수 잘 익은 배 하나」, 「박꽃처럼 잔잔이 웃으시며」등의 시편에서 시인의 지난 삶이 얼핏 보이는 바, 시인이 열두 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열아홉 살에는 병을 얻어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렇게 본다면 「죽순」에서의 ‘너’는 연모하는 어떤 ‘님’일수도 있을 것이며 마흔 여덟살에 고정된, 끝내 잊지 못하는 어머니일 수도 있고, 젊은 시절 병을 앓기 이전의 시인 자신일수도 있겠다.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가? 실패? 상실? 외로움? 그 무엇으로 치환해도 불치의 병인 슬픔은 살아 있는 자에게만 허용되는 면류관이다. 역설적이게도 불치의 병 같은, 질기디 질긴 슬픔의 근원은 어머니가 시인에게 보듬어준 사랑과 그 사랑을 잊지 않으려는 희망에 다름 아니다. 한 생애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무엇으로 슬픔을 치유할까? 지금 부재의 상태에 있지만 언젠가는 현현하는 것과의 결속을 열망하지 않는다면 슬픔에 함몰되는 참담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너’라고 호칭되는 이데아를 망각하지 않으려는 안간 힘은 시지프스의 무모함에 비견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살아 있는 자의 책무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데아와 현실계를 잇는 끈의 실체는 무엇일까? 신앙을 가진 자에게는 열렬한 기도이겠고, 태생적 의지일 수도 있으며 지식을 통해 얻은 신념일지도 모르겠다.

그대와 나를 연결하는

가느다란 끈

행여 놓칠세라

허리에 동여맨다

 

미노스의 동굴 같은

어둠 속 미로 헤맬지라도

이 끈 따라가면

그대에게 이를 수 있으리

일곱 빛깔 무지개 다시 볼 수 있으리

 

들게 경작하는 일상

낙담하여 침몰해 갈 때

이 끈을 통해 전달되는

그대 사랑의 맥박

내 살아있음을 느끼나니

살아야 할 이유를 느끼나니

아직 튼실하지 못한

끈이라 할지라도

세월의 소금기가 배어

조금씩 더 질기고 튼실해 지리라

평생 놓고 싶지 않은

너와 나의 끈

                                          - 시 「끈」 전문

사람답게

 

 

모슬포항 대합실

 

가파도 처녀에게 말을 건넨다.

 

무엇이 볼만 한가요, 저 섬엔?

 

사람덜이 볼만 하지마시.

 

어떤데요, 사람들이?

 

법 어서도 살, 사람다븐 사람마시!

 

똑 부러지게 말하는 처녀

 

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사람다운 사람들이 산다는 

 

가 · 파 · 도

 

오늘 그곳에 깃발 하나 펄럭이고 있다.

 

내게 손짓하고 있다.

 

위의 시는 ‘가파도 처녀’라는 부제가 붙은 시 「가파도 2」의 전문이다. 이 시는 사실 모호한 메시지를 던져주는데 그치고 있다. 가파도에 볼 만한 것이 뭐가 있느냐는 질문에‘법 없이도 사는 사람’들이 볼 만하다는 이야기는 싱겁기 그지 없다.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무한히 외연이 확장되는 언명은 논리의 틀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이 시가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법없이 산다는 ‘가파도의 사람들’이 아니라 가파도의 사람들이 사람답다는 가파도 처녀의 믿음에 있다. 사람 사는 곳에 어찌 애증이 없으며 갈등과 오해가 없겠느냐마는 바다로 둘러싸인 외진 섬에서의 삶은 경쟁과 우열을 가르는 전쟁터가 아니다. 협동하지 않으면 거센 바람과 거친 바다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음을 터득한 가파도 사람들 속에서 소박한 꿈을 익힌 푸릇한 가파도 처녀는 시인의 기억 속에 살아 숨쉬는(늙지 않는) 어머니와 오버랩 되기도 하는 것이다. 뱃전에 넘실거리는 파도위에 떠 있는 가파도는 멀리서 바라보는, 가물거리는 어머니의 형상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모슬포에서 배를 타고 단지 가파도로 관광을 가는 사람들은 기껏 청보리밭을 가슴에 담고 돌아갈 뿐이라는 것을 이미 알기에 처녀에게 묻는 질문은 우문이다. 가파도 주민임을 자신하는 처녀의 당찬 태도,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는 ‘사람다움’의 내포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다. 앞에서 시 「끈」에 미처 언급하지 못한 부가할 점이 있다. ‘힘들게 경작하는 일상/ 낙담하여 침몰해 갈 때/ 이 끈을 통해 전달되는 /그대 사랑의 맥박’( 시 「끈」 부분)에 보이는 바와 같이 화자(존재)가 희구하는 것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탯줄과 같은 끈으로부터 전이되는 것이기에 선천적으로 구유되어 있는 것이며 도덕과 윤리 같은 사회적 규범과는 구별되는 이드 id와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확신은 시집의 마지막에 걸려있는 시 「간밤 꿈속에서 고래를 보았다」를 통해서 보다 선명히 이해될 수 있다.

 

 

바다로 가고싶어

누군가 내 안에서 속삭이고 있다.

바다로 가고 싶어, 바다로 가고 싶어……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제주에선 어디서나 바다를 볼 수 있는데

어디서나 시원스런 파도소릴 들을 수 있는데

이토록 내가 바다를 갈구한다는 것은

 

나는 바다로 가보았다.

배를 타고 사흘 낮과 밤

바다와 살을 섞을 땐 더 황홀한 별빛이여

그러나 멈추지 않는 갈증

 

 

바다로 가고 싶어, 바다로 가고 싶어

마치 내 안에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는 듯하다.

누군가 애절하게 외치고 있는 듯하다.

바다로 가고 싶어, 이 말은

누군가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겐 아늑한 집이 있지.

귀여운 아이들과 싹싹한 아내가 있지

팔을 잃고 다리를 잃고 뛰는 심장을 잃었지만 직

장에선 꽤 인정을 받기도 한다.

내겐 아무런 불평이 없다.

무덤 속처럼 편안한 나의 일상이여!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나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그는 대체 누구이란 말인가?

 

 

벌집처럼 짜여진 아파트 창가에서

한 사나이가 열심히 신호를 보내고 있다.

바다로 가고 싶어, 이 말은

그의 입에서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비명인지도 모르겠다.

 

 

                                   - 시 「간밤 꿈속에서 고래를 보았다」 전문

시인은 자신의 의식 속에 꿈틀거리는 고래의 존재를 인식한다. 그 고래는 존재 자체이면서 존재를 존재이게끔 추동하는 리비도 libido이다. 이 리비도는 선악의 가치로 구분할 수 없으며 합리성을 따질 수 없는 자유 그 자체이다. 억압하면 할수록 리비도(고래)는 더욱 커져서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비명’을 지르고 바다를 향해 촉수를 더듬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바다는 공간적으로 무한한 망망대해가 아니라 어머니의 양수 羊水와 같이 부드럽고 외계와 차단되어 있는 안온한 어둠의 세계이다. 시인이 자각하는 리비도는 생명을 추동하는 에너지인 동시에 절대적 자유이기에 「내 마음 속 너도밤나무 숲」을 위시한 일련의 시들이 - 달빛 이미지의 부제가 붙은 - 에로틱한 정조를 띠고 있음을 유의하여 볼 필요가 있다. 이 시편들의 표면에 드러난 에로티즘의 성향을 퇴페적 성애의 표현으로 인식하는 불편함을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만 시인이 추구하는 삶의 원형과 조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시집 『내 마음 속 너도밤나무 숲』이 지향하고 끝내 도달한 삶의 원형은 ‘사랑’이다. 사랑을 관념적으로 정의내리고자 할 때 가장 적합한 정의는 이 글의 모두에 적시한 ‘사랑이란 우주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다.’일 것이다. 페르시아의 시인인 잘랄루딘 루미(Jalal ad-Din Muhammad Rumi·1207~1273)의 이 언명은 수많은 시로 분화되어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념적 정의는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에로스 Eros (육체의 성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육체적인 충동), 헌신, 우정, 아가페(초월적 사랑)으로 세분해 볼 수도 있겠다.

 

아침에 보리밭에 다녀오신 아버지가 

혀를 차며 어머니께 말하셨다 

쓰러진 보리가 두어 평은 되어 보였소 

 

 

간밤에 

누가 

무엇 때문에 

보리를 쓰러뜨렸는지 

일곱 살 나는 궁금하기만 하였는데

 어머닌 웃으신다 

환장하게 부는 바람 탓인가 봐요  

 

 

일렁이는 사월 

들길을 걷노라니 

그 옛날 아버지의 보리밭이 생각나 

넌지시 웃음이 나왔다

 

                                       - 시 「아버지의 보리밭」 전문

 

연못은 가을부터 물이 마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볼품없이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악취를 풍기는 바닥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패잔병처럼 누워 있어 그 황량한 풍경을 보는 것이 마을 사람들은 어쩐지 스스로를 보는 것 같아 애써 외면하는 것이었다.

 

며느리에게 버림받은 봉산댁은 하염없이 연못을 보다가 어쩌면 제 신세와 같냐며, 어느 날 연뿌리를 얻어 와서는 연못 여기저기에 심었다. 연못은 마지막 힘을 다하여 그 뿌리를 키웠으니 봄이 되어 제법 차오른 물위로 쏘옥쏙 내미는 초록 잎사귀.

 

어느 여름 아침 초록 잎 사이사이로 눈부시게 피어난 연분홍 꽃이여! 일 가던 아낙들이 그 황홀한 꽃들을 보며 넋을 잃고 지아비들은 진펄 속에서도 꽃이 피는 걸 보면 우리네 삶도 희망 있네 하며 연못가를 돌로 장식하며 가꾸어 갔으나, 봉산댁만은 끝내 보이지 않았으니 하늘나라로 갔음인가? 아니 연꽃으로 피어난 것인가?

 

                                                         - 시 「연꽃에 관한 전설」 1,3,4연

 

 

큰마당에 모깃불이 피워지고

어른들 이바구가 익어갈 때쯤

개똥벌레 잡던 아이들이

어디론가 간다

저마다 호박꽃 초롱을 들었다

 

경도네 집 담밑에 옹기종기 앉은 아이들

호박꽃 초롱을 받쳐들고

마음속으로 빈다

건너 마을엔 콜레라가 돈다는데

며칠째 누워있는 경도

 

하낫, 둘, 셋, 넷,

향불처럼 타오르는 호박꽃 초롱

 

                                                              - 시 「호박꽃 초롱」 전문

 

 

새벽마다 어머니는  

감나무 아래서 기도하셨다 

대숲에서 바람 일고  

하얀 사발 속 남실거리던 정안수 

 

 

어머니의 기도는 늘 이러했다

 큰놈 작은놈 못 먹이고 못 입혀도 

참나무처럼 올곧게 자라게 하옵시고 

다 제 할 바 하게 하옵시고…… 

 

 

시골 아낙네의 그 기도가 

무슨 영험이 있을 법 하랴만 

또 한편 생각해 보면  

나 흔들릴 때마다  

어머니 그때 간절한 바램 생각하고 

마음 가다듬는 것은 

 

그 기도가 지금껏  

살아있음이 아니겠는가?

 

                                                           - 시 「대숲에 바람 일고」 전문

다소 거친 분류일수도 있겠으나 삶의 원형을 ‘사랑’으로 인식한 시인은 사랑의 여러 양상들을 탐구해 간 것은 분명하다. ①의 시가 해학을 곁들여 보리밭의 성애를 그렸다면 ②의 시는 댓가를 바라지 않은 헌신을 ③은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내었고 ④는 혈육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그리면서도 ‘참나무처럼 올곧게 자라게 하옵시고/ 다 제 할 바 하게 하옵시고……’와 같은 이타애를 추구하는 기도의 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사랑의 양상을 추적한 끝에 얻은 시인의 궁극의 사랑은 앞서 언급한 절대적 자유 - 리비도를 허락한 - 인 것이다. 시집의 마지막 시편으로 「간밤 꿈속에서 고래를 보았다」를 배열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시인이 회상을 통해서 도달한 진정한 깨달음에 징표인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여적 餘滴

『내 마음 속 너도밤나무 숲』는 단순히 시들의 집적이 아니라 시인이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의 일관된 논리적 궤적을 지니고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예상한 성과를 거둔 시집으로 받아들여진다. 문학의 두 갈래인 형식주의적 관점과 역사주의적 관점의 균형감, 회상을 근거로 하는 이야기시의 가능성 - 다양한 형태상의 실험 (산문시 계열) - 을 탐색하는 모험을 수반한 작업은 그 시도만으로도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그 누가 시위를 놓았나」 와 같은 달빛 이미지의 부제가 붙은 몇몇의 시편에서 드러나는 이미지스트로서의 면모는 앞으로 시인의 또 다른 세계로의 변신을 기대케 하는 바가 크다.

권재효 시인의 건필을 기원하며 이 글을 마친다.

 

 

2014년 고산재에서 나호열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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