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다정한 기분을 만났다 / 장정욱

by 丹野 2022. 7. 24.

다정한 기분을 만났다

장정욱



이름도 잊어버리고
약봉지도 놓쳤다

교회 종소리는 12월보다 길었다
저 아늑한 곳의 기도는 내일도 죽지 않는 것일까
예배당 창이 반짝거렸다

나를 잃어버린다면 어디쯤이 좋을까
슬픔에 둔한 플라타너스 뒤라면
물 위에 떠다니는 버들잎 곁이라면

물소리를 세며 나를 불렀지만
나는 세계를 잊었다

기도에선 흙냄새가 났다
기도가 바람에 섞여 사라질 때까지 기억은 자주 뒤척였다

헌 그리움을 보내는 일
물결의 뒷모습으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일
기도문은 입김 안에서 자꾸 빠져나가려 했다

아이들은 얼음 십자가 위에 올라가 신발로 깨며 놀고 있다

웃음과 울음이 섞인다
남들은 웃는 거냐 우는 거냐 묻지만
오래전부터 같은 감정이라 생각했다

귀가 잘려나간 듯 밤은 조용한 눈발로 날린다
주머니 속 사탕 봉지 소리만 남았다

얼음 풍경을 베고
쓰디쓴 눈송이를 한입에 털어 넣으면
나는 다시 깊어졌다


—계간 《시인수첩》 2022년 여름호
-------------------
장정욱 / 1964년 인천 출생. 2015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시집 『여름 달력엔 종종 눈이 내렸다』 .



ㅡ출처 / 푸른시의 방

'이탈한 자가 문득 > 향기로 말을거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전 / 신용목  (0) 2022.09.06
서혜경 시집 『야생의 강』  (1) 2022.09.02
눈 / 이정록  (0) 2022.07.24
어둠의 위치 / 조용미  (0) 2022.07.24
물고기가 떠나는 저녁 / 최형심  (0) 2022.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