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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물고기가 떠나는 저녁 / 최형심

by 丹野 2022. 6. 9.

물고기가 떠나는 저녁 /  최형심

 

   최형심

 

 

 

   엎드린다는 것, 이마를 만진다는 것, 눈가를 훔친다는 것, 머리카락 쓸려가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거기에 없다는 것,

 

   이상하고 아름다운 고장에서 일기를 쓴다는 것, 사물함 속 죽은 딱정벌레를 만진다는 것, 아무도 없는 수요일을 견딘다는 것, 당신 없는 거리에서 발가락이 닳는다는 것,

 

   밤의 날개 아래 들어가 숨죽인다는 것, 지구 저편 숲에 내린 비에 내가 젖는다는 것, 바람 없는 날 흔들린다는 것, 휘파람에 휘어진 마음이 꺾인다는 것,

 

   보라색 색연필로 하늘을 그린다는 것, 얇은 수막(水幕)에 비친 하늘을 보며 끝없이 가라앉는다는 것, 손수레에 실린 바람 위에 당신 이름을 얹어준다는 것, 사라진 당신 무릎에 눕는다는 것,

 

   그리하여 은빛 소음도 없이 내 온몸이 부서진다는 것, 이제 내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

 

 

             —계간 《포엠포엠》 202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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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나비는, 날개로 잠을 잤다』.

 

 

쭐처 /  푸른 시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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