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바스
최문자
나는 너를 돌아본 적 있다
해바라기 씨를 심고 해바라기를 돌 듯
너를 심고 너를 돌 때
텅 빈 적막을 알았다
물 주는 시간을 알았다
해바라기처럼 눈 감는 시간을 알았다
세상 모든 정오에
샛노란 꽃잎도 까맣게 타죽으려는 것을 알았다
새들은
너무 펄럭이면서
나를 돌다 세상까지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 보다 더 많이 죽으려고
눈물방울이 허공을 뛰어내리는 것을 알았다
해바라기가 자라서
나를 돌고도 남을 때
말도 안되는 모국어로
커다랗고 둥근 꽃 한 송이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 적 있다
해바라기 베어낸 자리
해바라기가 빠져 죽은 크레바스
나는 여름에도 빙판 위를 달리는 여자
건너뛰다 보았다
보름달처럼 떠오르는 둥근 해바라기 꽃잎
한 여름에도 크레바스를 만들고 있는 너를 알았다
너도 나처럼 나를 돌고 있었다
ㅡ 격월간 『시와 표현』 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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