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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크레바스 / 최문자

by 丹野 2022. 3. 24.

크레바스

 

최문자

 

 

나는 너를 돌아본 적 있다


해바라기 씨를 심고 해바라기를 돌 듯

너를 심고 너를 돌 때

텅 빈 적막을 알았다

물 주는 시간을 알았다

해바라기처럼 눈 감는 시간을 알았다

세상 모든 정오에

샛노란 꽃잎도 까맣게 타죽으려는 것을 알았다

새들은

너무 펄럭이면서

나를 돌다 세상까지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 보다 더 많이 죽으려고

눈물방울이 허공을 뛰어내리는 것을 알았다

해바라기가 자라서

나를 돌고도 남을 때

말도 안되는 모국어로

커다랗고 둥근 꽃 한 송이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 적 있다

해바라기 베어낸 자리

해바라기가 빠져 죽은 크레바스

나는 여름에도 빙판 위를 달리는 여자

건너뛰다 보았다

보름달처럼 떠오르는 둥근 해바라기 꽃잎

한 여름에도 크레바스를 만들고 있는 너를 알았다

너도 나처럼 나를 돌고 있었다

 

ㅡ 격월간 『시와 표현』 2019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