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희망은
절망이 깊어
더 이상 절망할 필요가 없을 때 온다.
연체료가 붙어서 날아드는 체납이자 독촉장처럼
절망은
물빠진 뻘밭 위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
감은 눈 앞에 환히 떠오르는
현실의 확실성으로 온다.
절망은
어둑한 방에서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고
서랍을 열어 서랍 속의 잡동사니를
뒤집어 털어내듯이
한없이 비운 머릿속으로
다시 잘 알 수 없는 아버지와 두 사람의
냉냉한 침묵과
옛날의 病에 대한 희미한 기억처럼
희미하고 불투명하게 와서
빈 머릿속에 불을 켠다.
실업의 아버지가 지키는
썰렁한 소매가게 빈약한 물건들을
건방지게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백열전구처럼
핏줄을 열어, 피를 쏟고
빈 핏줄에 도는 박하향처럼 환한
현기증으로,
환멸로,
굶은 저녁 밥냄새로,
뭉크 畵集의 움직임없는 여자처럼
카프카의 K처럼 와서,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의 주인을 달래서
살고 싶게 만드는 절망은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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