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안개 책방 / 길상호

by 丹野 2018. 1. 9.





안개 책방

 

길상호

 

  

숲 옆구리에서 책 하나를 꺼냈다

표지 안쪽에서 오래전 상형문자가 되어 날아간

직박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책등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자니

그것 또한 새가 남긴 책의 내용일 것 같아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젖은 것도 같고 마른 것도 같은 소리는

오랫동안 앓던 환청이 도진 거라고

너는 나의 두 귀를 손으로 감싸 막았다

 

손금에서 풀려나온 안개가 축축하게 고막에 맺히자

그 책은 목소리를 잃고 잠잠해졌지만

나는 좀처럼 고요가 편해지지 않았다

 

죽은 나무들로 빽빽한 숲

이따금 삭은 가지의 문장이 바닥에 떨어지면

그때서야 조금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소리도 없는 책은 도로 꽂아두고서

너는 숲의 비밀이 적힌 두루마리라며

나이테 한 올을 풀어 내게 쥐어주었다

 

첫 단어에 눈길이 닿는 순간

숲이 백지 같은 안개로 가득 채워졌다

아무것도 읽지 못한 입술이 얼어붙었다

 

⸻《시와 사람2017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