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박지웅
봄이 되자 가지는 죽은 새를 다시 불러 앉힌다
흙을 털고 일어나 새들은 자신이 도달했던 어떤 지극한 너머에 대해 발설하지만
이후의 세계란 그런 것이다 너머에 있는 꽃들의 말을 배웠으나
이 땅에서는 써볼 도리가 없고 알아먹을 귀도 없는 것이다
날개라는 초라한 권위를 부려 모종의 가지로 옮겨 다니는 저 새들만 입을 닫는다면 세상은 더욱 산뜻하리라 군더더기 없으
리라 아니 그럴지도 모르지
새를 보면서 새 이후를 생각하는 것
나무를 보면서 나무 이후를 생각하는 것
사랑하면서 사랑 이후를, 그 너머에 있을 한가로운 끝을
전쟁이 끝난 가을 들녘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는 농부의 무덤을 쓰다듬는 보리밭처럼 모로 누워
이후들을 생각느니, 모든 사라진 쪽의 너머에서 사랑만은 돌아오지 말아라
훗날 너머 다시는 훗날이 없는 그 이후에서
봄도 쫓아오지 못하는 그 멀리에서
모든 虛事 밖에서
망치와 나비
박지웅
물 한 방울 없이 새로운 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탕, 탕 망치로 나비를 만든다 청동을 때려 그 안에 나비를 불러내는 것이다
청동은 꿈틀거리며 더 깊이 청동 속으로 파고들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망치는 다만 두드려 깨울 뿐이다 수없는 뼈들이 몸속에서 수없이 엎치락뒤치락한 뒤에야 하나의 생은 완전히 소멸하는 것
청동을 붙들고 있던 청동의 손아귀를 두드려 편다 청동이 되기까지 걸어온 모든 발자국과 청동이 딛고 있는 땅을 무너뜨린다
그러자면 먼저 그 몸속을 훤히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단단한 저편에 묻힌 심장이 따뜻해질 때까지, 금속의 몸을 벗고 더없이 가벼워져 꽃에 앉을 수 있을 때까지 청동의 뼈마디마디를 곱게 으깨고 들어가야 한다
탕, 탕
짐승처럼 출렁이던 무거운 소리까지 모두 불러내면 사지를 비틀던 차가운 육체에 서서히 온기가 돌고 청동이 떠받치고 있던 청동의 얼굴도 잠잠하게 가라앉는다
그렇게 오랫동안 두드리면 청동은 펼쳐지고 그 깊숙한 데서 바람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금속 안에 퍼지던 맥박이 마침내 심장을 깨우는 것이다
비로소 아 비로소 한줌의 청동도 남아 있지 않은 곳에서 한 올 한 올 핏줄이 새로 몸을 짜는 것이다 그 푸른 청동의 무덤 위에 나비 하나 유연하게 내려앉는 것이다
어깨너머라는 말은
박지웅
어깨너머라는 말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아무 힘 들이지 않고 문질러보는 어깨너머라는 말
누구도 쫓아내지 않고 쫓겨나지 않는 아주 넓은 말
매달리지도 붙들지도 않고 그저 끔벅끔벅 앉아 있다
훌훌 날아가도 누구 하나 모르는 깃털 같은 말
먼먼 구름의 어깨너머 달마냥 은근한 말
어깨너머라는 말은 얼마나 은은한가
봄이 흰 눈썹으로 벚나무 어깨에 앉아 있는 말
유모차를 보드랍게 밀며 한 걸음 한 걸음
저승에 내려놓는 노인 걸음만치 느린 말
앞선 개울물 어깨너머 뒤따라 흐르는 물결의 말
풀들이 바람 따라 서로 어깨너머 춤추듯
편하게 섬기다 때로 하품처럼 떠나면 그뿐인 말
들이닥칠 일도 매섭게 마주칠 일도 없이
어깨너머는 그저 다가가 천천히 익히는 말
뒤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아주 닮아가는 말
따르지 않아도 마음결에 먼저 빚어지는 말
세상일이 다 어깨를 물려주고 받아들이는 일 아닌가
산이 산의 어깨너머로 새 한 마리 넘겨주듯
꽃이 꽃에게 제자리 내어주듯
등 내어주고 서로에게 금 긋지 않는 말
여기가 저기에게 뿌리내리는 말
이곳이 저곳에 내려앉는 가벼운 새의 말
또박또박 내리는 여름 빗방울에게 어깨 내주듯
얼마나 글썽이는 말인가 어깨너머라는 말은
-시집『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문예중앙시선 |
—《시와 표현》2017년 8월호
'이탈한 자가 문득 > 향기로 말을거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주영 시집『나를 디자인하다』 (0) | 2017.10.19 |
---|---|
기와공 / 송민규 (0) | 2017.10.07 |
새의 경험 / 김정례 (0) | 2017.10.07 |
내 안의 바깥 / 신현락 (0) | 2017.10.07 |
밸러스터 워터 / 강동수 (0) | 2017.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