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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세상과 세상 사이

나호열의 詩와 토크

by 丹野 2014. 1. 3.

 

 

 

 

 

 

 

 

 

 

 

 

 

 

나호열 토크

시 Talk

-열 두 편의 시와 이야기-

 

▪ 때 : 2013.12.27(금) 오후2시-4시

▪ 곳 : 도봉문화원 회의실

 

주최 : 도봉문화원

후원 : 도 봉 구

<본 사업는 도봉구 사회단체보조금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나호열 

 

 

 

차 례

 

나호열 시에 대한 짧은 생각들

 

 

1p. 시와 토크를 열면서 나호열

2p. 타인의 슬픔 - 황정산(대전대 교수)

3p. 장미를 사랑한 이유 이기철(시인)

4p. 북 김완하(한남대 교수)

6p. 불타는 시 김석환(명지대 교수)

8p. 눈물이 시킨 일 정유화(서울시립대 교수)

10p. 집과 무덤 장성혜(시인)

11p. 폭설 박완호(시인)

13p. 당신에게 말걸기 한명희(강원대 교수)

14p. 달팽이 김삼주(경원대 교수)

16p. 세렝게티의 추억 김석준(시인, 문학평론가)

18p. 긴 편지 박영우(경기대 교수)

19p. 성자와 청소부 이충이(시인)

 

 

 

 

 

 

 

 

 

  시와 토크를 열면서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내 이름이 서점에 내걸린 지도 30년이 훌쩍 넘었다.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썼다. 이 ‘열심히’란 단어 속에는 사회적 변동과 무관할 수 없는 개인적 喜怒哀樂과의 싸움이라는 걸개가 펄럭이고 있으나 그 싸움은 무력처럼 다가오는 그 사회적 변화와 맞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변화를 무시하려는 싸움이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 인간의 평등성, 자연의 아름다움과 파괴에 대한 증오와 연민이 내 시 쓰기의 밥이었던 것은 틀림없으나 나는 그 밥들을 먹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좀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이제 60 고개를 넘었다. 공자의 耳順을 터득하기에는 아직도 멀었다. 아직도 나는 ‘인간이 꽃보다 이름답다’는 그 달콤함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그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 더 나아가 오늘의 나 또한 믿지 않는다. 나이 듦의 불편함은 육신의 불편함과 더불어 희망이라는 단어가 낯설어지고 비현실적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희망이 있다면 ‘인간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순간을 맞이하고 싶다는 것이다. 나의 시 쓰기는 그래서 긍정보다는 부정에서, 기쁨보다는 슬픔에서,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으로부터 출발한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날 도봉문화원의 후의에 힘입어 몇 편의 시와 시마을의 고마운 이들의 짧은 코멘트를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시는 애매성과 의도의 오류를 그 본령으로 하고 있다. 하나의 정답이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은 시가 산문과는 다른 생략과 압축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는 독자들이 맘껏 놀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해주는데 만족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 이야기는 어쩌면 사족과 변명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촐하게 새로운 마음으로 오순도순 즐거운 한 때를 가질 수 있다면 모든 오만과 편견이 용서될 수 있을진저!

 

不二軒에서 道峰山人 나호열 識

 

 

 

 

 

타인의 슬픔.1

 

문득 의자가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의자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으므로

제 풀에 주저앉았음이 틀림이 없다

견고했던 그 의자는 거듭된 눌림에도

고통의 내색을 보인 적이 없으나

스스로 몸과 마음을 결합했던 못을

뱉어내버린 것이다

이미 구부러지고 끝이 뭉툭해진 생각은

쓸모가 없다

다시 의자는 제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다

태어날 때도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슬픔을 너무 오래 배웠던 탓이다

 

의자는 의자 위에 앉았을 여러 사람들의 슬픔의 무게 때문에 결국은 주저앉고 만다. 그렇게 주저앉은 의자는 다시 일러날 힘이 없는 무력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 무력한 존재, 쓸모없는 존재가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다. 시인이 그 존재의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려진 의자는 결코 무력하지만은 않다. 모든 삶의 무게를 감당한 든든한 맷집을 가졌던 존재, 스스로의 구조적 형태로 몸과 마음을 결합시켰던 존재로서의 힘이 지금의 무력한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다. 시인은 바로 그 무력한 슬픔 속에 잠재해 있는 힘을 그려내고 있다.

나호열의 시들은 바로 이런 힘찬 슬픔을 그려낸 새로운 언어이다. 그런데 이 힘찬 슬픔은 시인의 운명이기도 하다. 타인의 슬픔을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고통으로 언어화 해내다가 결국 삶을 마감하는 시인이 바로 위 시의 의자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 황정산(대전대 교수) 계간 『미네르바』2009년 여름호

 

 

 

 

 

 

 

장미를 사랑한 이유 

 

 

꽃이었다고 여겨왔던 것이 잘못이었다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이 고통이었다

슬픔이 깊으면 눈물이 된다

가시가 된다

눈물을 태워본 적이 있는가

한철 불꽃으로 타오르는 장미

불꽃 심연

겹겹이 쌓인 꽃잎을 떼어내듯이

세월을 버리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처연히 옷을 벗는 그 앞에서 눈을 감는다

마음도, 몸도 다 타버리고 난 후

하늘을 향해 공손히 모은 두 손

나는 장미를 사랑한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일은 그로 인해 무엇인가를 배워가는 과정이다.

 

‘꽃이었다고 여겨왔던 것’,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이 다 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누군가 사랑을 ‘思量’이라 했다. 상대를 향한 생각하는 양이다.

‘장미를 사랑한 이유’는 다름 아닌 ‘세월을 버리는 것’, ‘처연히 옷을 벗는’ 일임을 뒤늦게 깨달아 되레 부끄러운 마음 들게 한다.

사랑은 발효가 되어야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여태 알지 못했던 당신에 대한 소소한 일들이 이제 눈에, 마음에 들어온다.

 

- 이기철 (시인) 시가 있는 금요일 경상일보 2011년 09월 01일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예로부터 전해져오기를 한 악공은 자신이 연주하는 악기의 소리를 알아듣는 딱 한 사람이 있어 그를 지음(知音)이라 했다. 그때부터 지음이야말로 자신을 잘 아는 친구라 하여 가장 친한 그리고 소중한 친구라 일러온 것이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이 세상을 떠나자 악공은 다시는 악기를 연주하지 않았다 한다. 친구가 죽자 악기도 소리를 잃고 악공의 존재 또한 자취를 감춘 것이다. 친구란 그만큼 위대한 존재인 것, 악공에게는 하나의 세계였던 것이다. 북은 자고로 자신의 속을 가득 비우고서야 제 가슴을 치는 것이다. 북은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고도 그 한 마디 말로는 이 세상의 가슴이 벅찬 것이다. 우둔한 바 고수는 그제서야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 북채를 드는 것이다. 아뿔싸 우리는 너무나 많은 말로 귀를 메우고 너무나도 많은 소리로 이 세상을 어지럽혀온 게 아닌가. 이 여름 장마가 긴 것도, 지구가 밤마다 천둥소리로 우주를 울리는 것도 다 북소리를 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을 알아주는 단 하나의 지음을 찾고자 하는 것이렷다. 그대에게 묻노니, 그대는 지음을 알고 있는가. 또한 그대는 지음을 가지고 있는가. - 김완하( 시인·한남대 문창과 교수) 대전일보  

 

  불타는 詩

 

맹목으로 달려가던 청춘의 화살이

동천 눈물 주머니를 꿰뚫었는지

눈발 쏟아지는 어느 날 저녁

시인들은 역으로 나아가 시를 읊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

장미가 피고 촛불이 너울거리는 밤

누가 묻지 않았는데 시인들의 약력은

길고 길었다

 

노숙자에게 전생을 묻는 것은 실례다

채권 다발 같은 시집 몇 권이

딱딱한 베개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둠한 역사 계단 밑에서 언 손을 녹이는

불쏘시개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늘이 내리시는 무언의 시가

발밑에 짓이겨지는 동안

가벼운 재로 승천하는 불타는 시가

매운 눈물이 된다

 

아, 불타는 시

 

청춘 시절부터 시의 과녁을 향해 곧게 달려온 시인들의 열정에 하늘도 감동하여 축복처럼 눈발을 내려주는 저녁이다. 시인들이 역으로 나가 읊는 시가 “장미”로 피고 “촛불”로 타올라 광장을 수놓으며 어둠을 밝힌다. 그러나 외롭고 힘든 길을 걸어온, 그 길고 긴 “약력”을 털어놓는 시인들은 직장에서 버림받고 가정에서 외면당한 “노숙자”와 무엇이 다를까. 고통의 대가를 되찾게 해줄 “채권다발 같은 시집” 이 “딱딱한 베개”나 “언 손을 녹이는 불쏘시개가 될지”도 모르는 현실이 암담하기만 하다. 그런 시집을 내며 시인으로 산다는 게 전생에서 잘못 맺은 인연 때문이라면 “전생을 묻는 것은 실례”가 될 것이다. 시인들의 영혼같이 하얀 눈, 그 “무언의 시”가 행인들의 “발밑에 짓이겨 지는 동안” 에도 시는 불타서 “가벼운 재로 승천”을 한다. 시의 불꽃을 보고 “매운 눈물”을 흘리는 이는 행인일까, 아니면 시인일까. “불타는 시”가 가벼운 재가 되어 날아오른 역 광장 위 하늘에 시어보다 더 많은 별이 빛날 것이다. 그 작은 별들이 시린 시인의 가슴을 달래주고 역 대합실에 나와 서성이는 행인들에게 가야할 곳이 어디인가를 알려줄 것이다.

 

- 김석환 (시인, 명지대 문창과 교수) 『2012년 오늘의 좋은 시』(푸른 사상)

 

 

 

 

 

 

 

 

 

 

 

 

 

 

 

 

 

 

 

 

 

 

 

 

 

 

 

 

눈물이 시킨 일

 

 

한 구절씩 읽어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 만 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져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이 텍스트에서 대립되는 것은 경전의 세계와 실제 삶의 세계이다. 시인은 경전의 세계를 통하여 실제 삶의 세계를 완성하려고 한다. 그러나 경전의 완성된 세계와는 달리 실제 삶은 언제나 무너지고 버려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꿈을 세웠던 시인의 하루가 지워지고 버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의 세계와 실제 삶의 세계는 통합되지 못하고 더욱 괴리될 수밖에 없다. 부연하면 경전에 나타난 삶의 원리와 실제 삶의 원리가 충돌하고 있는 셈이다. 시인이 실제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댄 곳이 바로 경전의 세계인데, 오히려 그 경전의 세계는 시인에게 절망만 주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리 되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경전’이 이성적 산물인 ‘언어’로써 인간적인 삶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기에 그러하다. 언어의 세계는 관념적인 것으로서 실제 생활하는 인간의 감각적인 세계와 대립한다. 이를 구체화 해보면 ‘이성/감성, 형이상/형이하/, 정신/육체, 질서/산만, 의미/무의미’ 등의 대립항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이성적 산물인 언어의 세계는 ‘이성, 형이상, 정신, 질서, 의미’등의 우등한 의미를 취하게 되고, 감각적인 인간의 세계는 ‘감성, 형이하, 육체, 산만,무의미’ 등의 열등한 의미를 취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언어로 된 경전의 세계는 삶의 중심이 되고 감각적이고 사물적인 인간의 세계는 삶의 주변이 된다. 곧 주종의 관계가 형성되는 셈이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억압이 생겨난다. 그러나 시인은 그 억압에 굴복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사물의 세계, 곧 ‘산’과 ‘바다’가 보여주는 삶의 현상을 통하여 경전의 삶의 원리를 배제하고 감성적인 삶의 원리를 추구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언어의 지시적이고 획일적인 관념의 세계(의미론적 세계)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시인이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는 것은 이성적 산물인 언어의 세계를 해체하는 행위이다. 언어를 해체한다는 것은 의미를 해체한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대상)’자체를 보여주는 원시적인 언어가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 정유화 (서울시립대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  계간『미네르바 』2011년 여름호

 

 

 

                   

 

 

 

 

 

 

 

 

 

 

 

 

 

 

 

 

 

 

 

 

 

 

 

집과 무덤

 

 

저녁에 닿기 위하여 새벽에 길을 떠난다

 

 

 

살아갈수록 긴 말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짧은 시가 오히려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때가 많다. 이 한 줄 속에 생의 허망함이 다 담겨 있다. 새벽이나 저녁은 삶과 죽음의 환유로 읽힌다. 저무는 시골마을 풍경이 떠오르기도 한다. 나지막한 집이 보이고 고단한 발을 씻는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다. 날이 갈수록 시간의 바퀴소리를 크게 들으며 사는 요즘, 하루하루 온갖 시름에 얽혀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에, 뒤에서 내리치는 죽비처럼 서늘한 통찰의 목소리로 들려온다. 서둘러 나갔다가 홍대 입구에서 띄엄띄엄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저녁, 한 무더기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버스가 오는 쪽을 바라보고 있다. 모두가 가야할 집이 있고 닿아야 할 미래가 있다.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가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버스에 오른다. 내가 다시 이사 와서 살고 있는 이 동네는 신혼살림을 시작했던 곳이다. 밤이면 난지도에서 쓰레기 태우는 매캐한 연기가 자욱이 내려 덮히곤 해 하루라도 빨리 떠나기를 꿈꾸었던 성산시영아파트 앞을 지나다닌다.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그곳으로 돌아와 산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디론지 데려갈 수 있는 세월의 무서운 힘이 느껴진다. 시간은 멀쩡한 물건을 쓰레기로 만들기도 하지만, 냄새나는 쓰레기 산을 꽃이 피는 공원으로 만들어 놓기도 하니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친구들을 만나면 시간이 왜 그렇게 빨리 흘러가는지, 돌아보면, 하루가 일 년이 20년의 세월이 그렇게 순식간에 가버렸다. 다음 달에는 남쪽 땅 끝 마을로 떠나자는 약속을 했지만 허망하다. 하루라도 늦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으로 떠나보자는 얘기를 들으면 내리막길의 가속도가 느껴진다. 저녁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더위가 가기 무섭게 살에 닿는 저녁바람의 강도가 날마다 다르다. 가을을 싣고 저기 집으로 가는 반가운 버스가 오고 있다. 천천히 모퉁이를 돌아오고 있다.

  

- 장성혜 (시인) 리토피아 문학회 2006년도 <<둥근 것들의 이야기>>중에서

 

 

 

 

 

 

 

 

 

 

 

 

폭설

 

하늘이 똥을 누신다

무량하게 경전을 기다리는 사람들 위로

몇 날 며칠을 똥을 누신다

거름이다

말씀이다

사람들이 만든 길을 지우고

몇 그루의 장송도 넘어뜨렸다

아우성에도 아랑곳없이

부질없는 쇠기둥을 휘게 만들었다

하늘에 방목한 것은 조개, 양떼, 새털 이름을 가진

구름뿐,

냄새나지 않는 똥을 누시는 까닭이다

무량하게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아우성치지 마라

말씀의 거름 잘 새겨들어라

 

깊은 어둠에서 눈은 더욱 밝게 뜨이고

순백의 천지는 눈을 더욱 멀게 만든다

어둠을 두려워하지 마라

철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라

 

산은 그럴수록 우뚝하다                                                  

 

 

똥! 눈(雪)의 낯선 이름  

 

“하늘이 똥을 누신다”니! 참으로 발칙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눈(雪) = 똥’으로 이어지는 생각을 끄집어낸 이가 이 시인 말고 또 있었던가? ‘눈’의 흰색은 자연스럽게 ‘순수(純粹)’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며 그런 까닭에 우리 시에서는 ‘순수’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이 시인은 지금 엉뚱하게도 그런 ‘눈’에게서 ‘똥’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를 떠나서도 ‘똥’은 ‘더러운’이나 ‘냄새나는’ 등의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시의 ‘똥’은 “냄새나지 않는 똥”이며 ‘말씀 - 거름’으로 이어지는 맥락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의 ‘똥’만큼 깊이 있고 진실한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폭설’ 때문에 허둥대는 사람들을 향해 시인은 “아우성치지” 말고 “말씀의 거름을 잘 새겨들어라”라고 말한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머릿속에 ‘똥’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깊은 어둠에서 더욱 밝게 뜨이는 ‘눈(眼’)을 갖게 되는 것이다. “깊은 어둠에서 눈은 더욱 밝게 뜨이고”라는 역설(逆說)은 고은 시인의 「눈길」에 나오는 “쌓이는 눈 더미 앞에 /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역설적 의미로서의 ‘어둠’은 어떤 깨달음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며, 그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세계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눈길」에서 고은 시인이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 … (중략)… /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라고 말할 때처럼. 그러므로 이 시인의 말대로 우리는 더 이상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고 “철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시인은 이미 그 길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눈’을 보고 ‘똥’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충분히 낯선 한 편의 시가 태어난다.

 

박완호 시인 - [시와 상상] 2008년 봄호

 

 

 

 당신에게 말 걸기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꽃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는

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혼자서 있어서 외롭고 외로워서 다시 혼자였던 그가 누군가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도 놀랍지만 이 시에 담긴 마음은 더 놀랍다.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는 전언! 과연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화난 꽃도 없다는 말도 듣고 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다. 이 세상에 못난 꽃이 어디 있으며 화난 꽃은 또 어디 있더란 말인가. 그는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예쁜 꽃이라고 말한다. 그의 이 마음이 참 예쁘다. 그런데 꽃이 자신이 이렇게 예쁜 걸 모르는 것 같아서 다가가서 “당신은 참, 예쁜 꽃”이라고 말해주기까지 한다. 이 마음은 더 예쁘다. 이 예쁘고도 예쁜 시의 제목은 「당신에게 말 걸기」이다. 그는 꽃에게 다가가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으며  “당신은 참, 예쁜 꽃”이라고 말을 걸어보는 것이다. 이렇게 나호열이 말을 건네어 보는 것은 예쁘지만 작고, 예쁘지만 자신이 예쁜 줄 모르는 것들이다. 특히 그의 말 걸기는 단순히 의사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상대에게 다가가 그를 위로하고 그의 가치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호열의 말 걸기가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 한명희 (강원대학교 교수, 시인)

 

 

 

 팽이

 

 

한때는 달팽이를 비웃은 그런 날들이 있었지

세상은 핑글거리며 돌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느린 걸음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겠나 하고

집 속에 틀어박혀 공상이나 일삼는 철학자처럼

머리 속 황무지를 개간하는 노동이 무슨 필요 있느냐고

그러나 어느 날 자급자족 되지 않는 세상에 찬 바람 불어

밥 굶고 신문지 이불 삼아 노숙하는 사람이 나임을 알았을 때

발 부르트도록 걸어왔던 그 길이 신기루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록 구부리고 토끼잠을 잘지언정 달팽이 네가 부러웠다

집은 갈수록 멀어지고 겨울은 끝내 떠나가지 않을 듯 싶었다

   

 

  이 시는 비웃음과 부러워함이라는 대립적 정서의 마주침에 의하여 전개된다. '나'는 '달팽이'를 비웃고 또 부러워한다. 비웃는 까닭은 첫째 '달팽이'가 느리기 때문이다. 단순히 느리다는 이유만으로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핑글거리며 돌아가고 있는데/그렇게 느린 걸음으로" 그 빠른 세상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는 자본주의 시대이고, 자본주의의 핵인 부의 창출은 속도와 직결돼 있다. 남보다 빠르고, 남보다 앞서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시속 백이십 킬로미터를 허용하는 시대에 달팽이 걸음처럼 느린 차를 누가 사겠는가. 주문만 하면 원하는 떡을 집으로 배달해 주는 시대에 디딜방앗간을 누가 이용하겠는가. 그러기에 속도를 추종하는 일은 이미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미덕 중의 하나로 자리잡고 말았다. 달팽이처럼 길을 가는 것은 어리석다. 아니, 시대에 뒤떨어진 짓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자에게 달팽이는 비웃음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나'가 달팽이를 비웃는 두 번째 이유는 달팽이가 "집 속에 틀어박혀 공상이나 일삼는 철학자처럼/머리 속 황무지를 개간하는 노동"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속도의 시대에 "머리 속 황무지를 개간하는 노동"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이성을 갈다듬는다거나 정신의 깊이를 더해 가는 일은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행동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나보다 남의 생각과 행동을 살피기에 민첩해야 한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앞질러야 하고 흐름의 방향을 읽는 데 재빨라야 한다. 그래야 돈과 명예가 자기 것이 된다. 이런 판에 "머리 속 황무지를 개간하는 노동"이 어찌 비웃음의 대상이 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달팽이를 부러워한다. 왜냐하면 '나'는 자신이 추종하던 자본주의의 허망한 실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 세상에 찬 바람 불어"에서와 같이 자본주의의 핏줄인 돈줄이 막혀 버렸을 때 '나'는 명예와 부 대신 노숙의 신세로 전락해 버린다. "무작정 우회도로를 지나고 있다는 느낌/신기루를 지나 또 다른 신기루를 향하여/걷고 또 걸으며 꽃 피우는 하루"('거울 앞에서')처럼 "핑글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세상이 신기루 투성이 임을 '나'는 뼈저리게 체험한다. 그래서 '나'는 달팽이를 부러워한다. 달팽이를 부러워한다는 것은 '느림'과 '머리 속 황무지 개간'을 긍정하는 것, 속도를 벗어나려는 것이리라. 속도의 경쟁은 끝이 없으므로, 속도의 경쟁에서 영원한 승자가 되는 길은 속도를 벗어나는 일이므로, 그 길만이 온전한 '나'로서 '집'을 갖고, 일가를 이루고, 평안히 겨울의 시대를 지낼 수 있으므로.

 

- 김삼주 (경원대학교 교수, 시인)

 

 

  세렝게티의 추억

 

무엇으로 나를 부르던 상관이 없다

스스로 사냥을 하지 못하여

이글거리는 하늘을 배회하는 대머리 독수리

무방비로 강을 건너는 누우 떼의 발목을 잡는

흉측한 악어

게으르게 게으르게 암놈이 차려놓은 성찬에

윗자리를 차지하는 수사자

제 자식이 잡혀 먹어도 눈만 멀뚱거리는

톰슨 가젤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가지 못하는

하이에나

그 무엇으로 나를 바라보아도 어쩔 수 없다

평화로운 한 장의 그림엽서

광대한 초원의 한낮 같은 매일을 뜯어내면서

인화되지 않은 꿈의 이면을 들여다 본다

 

먹고 먹히되

승자와 패자가 없는 곳

서로가 서로의 양식으로

몸을 내어 주는 곳

값싼 동정의 눈물이 조금도 용납 되지 않는 곳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가 늘 고민거리이고, 문제의 중신에 위치해 있다. 시간도 휘고, 세계도 휘어져 그 모든 것들이 아포리아에 이입하게 될 때, 삶은 무엇이고, 또 존재는 어떤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가. 눈물이고 슬픔이다. 삶 시간 세계란 먹이사슬이다. 거기엔 이유도 없고, 분명한 목적도 없다. 다만 그저 주어졌기에 존재할 따름이다. 그런데 시 「세렝게티의 추억」은 저 거대한 자연 내부에서 행해지는 일련의 존재운동을 졸렌( Sollen)의 관점이 아니라, 자인(Sein)의 관점으로 서술하면서 “눈물”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다. 원근법적 관점에서 볼 때, 저 “세렝게티”초원은 “평화로운 한 장의 그림엽서”로 비춰지겠지만, 시인 나호열은 “꿈의 이면”으로 치고 들어가 자연이 펼쳐내는 내밀한 법칙을 응시하고 있다. 자연은 엄존하는 현실이다. 따라서 자연은 냉혹하다. 거기엔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다. 다만 거기엔 “먹고 먹히”는 관계만이 있을 따름이다. 마치 앨런 와츠가 『 물질과 생명』에서 말한 것처럼, 삶 시간 세계란 에너지의 순환운동이다. 때론 “서로가 서로의 양식”이 되는 저 처연한 운명을 승인하면서, 때론 세렝게티 초원의 평화로운 공존을 몽상하면서, 생에의 그 모든 운동이 무로 수렴하는 바로 그 자리에 존재의 의미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존재란 무의 운동이다.

 

-  김석준 (시인, 문학평론가) 계간 <<문학마당>>(2011년 봄호)

 

 

 

  긴 편지

 

 

風磬을 걸었습니다 눈물이 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었거든요 너무 높이 매달아도 너무 낮게 내 려놓아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우두커니 오래 있다가 이윽고 아주 오랜 해후처럼 부둥켜 않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와르르 눈물이 깨질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씨앗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날마다 어디론가 향하는 손금 속으로 사라지는 짧은 그림자 말이지요 너무 서두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조금씩 솟아올라 고이는 샘물처럼 풍경도 슬픔을 제 안에 채워두어야겠지요 바람을 알아버린 탓이겠지요 

                                                   

 일단은 첫 행의  “風磬을 걸었습니다”라는 시적 표현이 인상적이다. 사실은 “풍경이 울리는 산사를 걸었습니다” 정도로 해야 옳은 문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런 표현으로 느껴지는 것은 시인의 절실한 삶의 체험들이 숙성되고 육화되어 시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또한  ‘풍경’이 갖는 이미지가 ‘바람’, ‘눈물’, ‘사라지는 짧은 그림자’, 다시 ‘풍경’으로 이어지면서 물이 흐르듯 시상을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하면서, 시적 의미를 압축된 한 편의 시 안에 적절하게 가두고 있다. 전체적으로 그리 길지 않은 산문시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많은 사연들이 함축되어 있는 풍경風磬이 있는 아름다운 풍경風景이 있는 시이다.

 

- 박영우 ( 경기대 문창과 교수)

 

 성자와 청소부 

 

오늘도 나는 청소를 한다

하늘을 날아가던 새들의 어지러운 발자국

어두운 생각 무거워

구름이 내려놓은 그림자

 

지상에서는 쓰레기라 부르는

그 말씀들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로 같은 가슴에 모으기 위해

기꺼이 빗자루를 든다

 

누군가 물었다

성자가 된 청소부는 누구이며

청소부로 살다 성자된 이는 또 누구인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리라

사라졌다가 어느새 다시 돋아오르는 새싹을

그 숨결을

당신은 빗질하겠는가

아니면 두 손 받들어 공손히 받쳐들겠는가

 

  나호열의 시는 삶의 본질이나 사물의 본성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대부분의 시들이 보편성이나 객관적 진술을 거부하고, 자신의 귀나 눈으로 보고 들으며 자유로운 모색과 성찰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나호열은 일찍부터 철학에 대하여 견고한 견해를 가져왔다. 이러한 깨우침의 바탕에서 상상력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 주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해 준다. 삶에 대한 성찰이 풍경 속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오늘도 나는 청소를 한다”. 시를 어렵게 느끼지 않고도,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새로운 시의 시각을 제시히고 있다. 잠시 뒤를 돌아보게 하여, 소중한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는 소통의 길로 인도하는 이 시는, 자연과 생명, 그리고 인간에 대한 시 쓰기를 성찰적 행위로 보여준다. 이것은 세상을 바꿔보려는 상상력이 시의 전제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쓰레기”를 쓸어내기 위해서 “빗자루”를 드는 것이 아니라 “화로 같은 가슴을 모으기 위해” 화자는 “빗자루”를 들었다. 이는 ‘성자’에 도달하는 길과 눈에 띄지 않는 잠재된 길을 믿는 정신의 철학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철학은 일상의 열정과 종교적 감성의 갈등이다. ‘성자’와 ‘청소부’는 가난하다. 정신적이든지 물질적이든 빈곤을 사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우리의 보편적 일상과는 다른 공간의 일상을 우리도 동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 물었다”. 여기서 ‘누구’는 무의식의 상징이다. 그 무의식 속에 숨겨 있는 것은 세상의 모든 페르소나이다. 결국 살아 움직이는 몸의 말의 우리의 몸 밖 공간으로 전이되고 있다. 이제는 ‘누군가’ 묻지 않아도 영원히 살아 있는 페르소나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극심한 경제적, 신체적 고독과 지적 혼미속에 빠지면 세상에서 볼 수 있던 풀뿌리 저항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즐거운 삶의 욕망만 남는다. 자신의 생각을 바꿈으로서 모순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시는 간결하고 단순한 시어 하나로 수 백 개의 의미를 담기도 한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리라.” 평범한 일상을 재구성하고 시작과 끝을 구분 짓는 은유가 돋보이는 행이다. 격조 높은 향식을 갖춤으로써 진부한 삶과 새로운 삶의 등식을 구분 짓는다. “싹”과 “숨결”은 아무도 “빗질”하지 못한다. 다만 “두 손 받들어 공손히 받쳐”들 수 있다. 오늘의 시는 미래의 ‘싹’이며 ‘생명’이다. 풍요로운 상실의 기대에 흙투성이 현실과 고귀한 영혼 사이에서 시인은 부단히 고민하고 있다.

 

- 이충이(시인) 계간『시와 산문』2012년 여름호

 

  나호열 연보

 

1953년 충남 서천군 마서면 남전리 282 번지에서 출생

1980년 Mook 지『우리함께 사는 사람들. 1』(정신세계사)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1986년【월간문학】신인상에「어떤 하루」외 2편이 당선됨

1989년 제 1시집『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출간

1990년 3인 시집(최준, 이재호, 나호열)『집에 관한 명상 또는 길찾기』발간

1991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문예진흥기금 받음

1991년 제 2시집(사진 시집)『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발간

1991년 제 3시집『망각은 하얗다』발간

1991년【시와 시학】중견시인상 받음

1993년 제 4시집『칼과 집』발간

1997년 제 5시집『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발간

2000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정보화 사업 문인으로 선정됨.

2001년 제 6시집『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발간

2003년 독도 엔솔로지『영혼까지 독도에 산골하고』발간

2004년 제 7시집『낙타에 관한 질문』발간

2005년 독도앤솔로지『Dreaming of seventy million dok-Do's』발간

2004년 녹색시인상 수상

2007년 제 8시집『당신에게 말 걸기』발간

한민족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예총 특별공로상 수상

2009년 제9시집『타인의 슬픔 발간

2011년 제10시집『눈물이 시킨 일』발간

한국문협 서울시 문학상 수상

 

그동안 인터넷문학신문(Imoonhak.com) 발행인(2000- 2010), 독도사랑협의회 회장(2003- 2007),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2005- 2008), 한국예총 정책연구위원장 겸 월간 예술세계 편집주간(2005- 2010)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계간 시와 산문 편집위원, 건국문학회 회장, 한국녹색시인협회 회장,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교수로 있음.

http://blog.daum.net/prhy0801(세상과 세상 사이)

 

 

 

 

 

함께 해준 시인들

 

 

김경성 시인

 

 

 

나유성(대중 작곡가. 시인), 김훈영(시인, 수필가), 김상숙 시인

 

 

문숙자 (시인, 수필가)

 

 

민미옥, 최양순, 한옥순 시인

 

 

송낙현. 윤준경 시인

 

 

장성혜 시인

 

윤채원 수필가

 

이미서 수필가

 

 

정은율 시인, 시낭송가

 

최윤경 시인

 

백경숙 시인

 

김항배 시인

 

 

신용기, 김혁남 시인

 

김혜숙 다도가

 

주영란 시인

김신례 서예가

 

 

기념 촬영

 

그밖의 풍경들

다도시연 (김혜숙)

 

전통차 시음

 

 

나유성, 이미서 시노래 공연 (가시, 타인의 슬픔)

 

 

시 <가시> 악보

 

도봉문회원 강의실 풍경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나호열의 시와 토크를 마칩니다. 그리고.....

오늘의 행사를 지원해 주신 도봉문화원 최영근 부장님! 고맙습니다!

 

 

 

 

출서 / 세상과 세상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