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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세상과 세상 사이

절망, 너에게 쓰는 편지 / 나호열

by 丹野 2013. 8. 16.

 

 

 

절망, 너에게 쓰는 편지

 

나호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이 글을 쓴다. 길어야 보름 남짓 지상에서의 짧은 삶을 위해 십 년을 땅 밑에서 보내는 매미의 일생이 처연하리만큼 아름답다. 어디 아름다운 것이 매미뿐이겠느냐. 잠자리, 거미로부터 시작해서 아무 곳에나 풀석풀석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풀꽃 하나하나가 다 눈물겨운 생명의 묵시록이 아니겠느냐. 우리에게는 미물에 불과한 저것들이 나에게는 경전이 된다. 회초리가 된다. 이제야 철이 드는지 세상이 초점이 잡히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이 뿜어 올리는 안개, 존재와 존재 사이에 가득한 안개, 서로를 떨어뜨려 놓기도 하면서 더욱 서로를 껴안아 주는 저 이상한 힘을 이제야 똑바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안개를 시로 쓰고 싶다. 종이 위에 방울방울 이슬로 맺혀 있다가 눈길이 닿는 순간 안개로 가득 피어오르는 시, 그리하여 결국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안개의 시, 시의 안개……

그 안개를 절망으로 쓰기도 하고, 희망으로 읽기도 하며 사랑과 외로움으로 뒤바꿔 보기도 한다. 그 모두가 오역일 뿐 인줄 알면서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어

그 자리에 놓여진 것들 탐내지 않고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고

부드럽게 감싸안을 줄 아는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어

처음에는 더듬거리고 막막해 하다가

한 걸음씩 고개 숙여 걸어가다 보면

엷은 슬픔의 축축한 옷 안개의 속마음을 알게 되지

껴안을수록 나의 두 손은 허허로운 가슴께로 모두어지고

헤쳐나가면 나갈수록 무겁게 다가서는 생을 사랑하게 되었어

한 걸음 벗어난 아득한 벼랑 너머에도

하늘과 땅 밑에도 길이 있음을 눈감고 알게 되었어

 

-안개전문

 

누구나 한 번은 그 자리에 무너져서 땅 밑으로 꺼져버리고 싶은 절망에 휩싸일 때가 있다. 절벽 위에 서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 핸들을 꺾어 침범해서는 안 될 금지의 노란 선을 건너가야 할 것 같은 유혹나는 배웠다.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는 없다', 단지 무엇 무엇으로 부터의 제한된 자유만이 허용될 뿐 이라고

그러므로 나는 용케도 절망의 유혹으로부터 빚어진 죽음을 벗어날 수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길들여진 기계적인 사고방식과 무한한 욕망의 사슬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절망을 안고 뒹굴며 절망과 한 몸이 되는 것이었다. 함부로 절망을 입에 올려서는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희망을 떠벌려서는 더욱 더 안되리라.

 

 

 

방법은 세 가지다

가고 없는 사람 앞에 서성이듯

스스로 그 벽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예 그사람 잊어버리듯

벽을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벽을 뚫고 벽을 넘어서거나

 

그러나 오늘도 나는

내 앞에 버티고 선 우람한 벽을

밀어보려고 한다

사실은 꿈쩍도 하지 않는데

사실은 벽 때문에 조금식 뒤로 밀리고 있을 뿐인데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라고

한 줄이면 다 끝나버릴 텐데

 

- 시집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중에서

 

 

그동안 몇 편의 영화와 몇 번의 짧은 여행이 나의 절망과 동행하였다. 애나벨 청 스토리, , 」「반칙왕, 주유소 습격사건, 박하사탕, , 심동」……경주 남산, 진천, 김제……

 

250명의 남자와 섹스를 하면서 욕망의 한계를 깨닫고 그것마저 극복해 보려 했던 한 여자, 고립된 저수지에서 치명적인 사랑을 나누고 스스로 파멸해 버리는 두 남녀, 억압으로 다가오는 사회의 가위눌림을 온몸을 찢고 부수는 프로레슬링의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반칙으로 치환하는 은행원, 저마다의 상처를 휘발유와 같은 분노로 폭발시키는 철없는 젊은이들, 공룡과 같은 권력의 무모한 파괴 앞에서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짐으로서 항거하려 했던 전직 경찰관, 아이를 낳지 못하고 버림받았으면서도 오히려 그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연민을 보내고, 부모로부터 버려진 한 아이에게 정을 주며 평생을 산 여인, 사랑하면서도 인생의 길을 엇갈리며 지나가는 사람들, 그들의 삶에 나의 삶을 대입시키면서 얼마나 많은 자아들이 안개처럼 뭉친 채로, 아니면 안개처럼 분열된 채로 내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쥐 죽은 듯 잠복해 있다가 어느 순간에 탈옥하는 죄수처럼 뛰쳐나오는 자아의 파편들, 짧은 여행은 그런 자아들을 짐짓 모르는 척 하며 깊은 산 속에, 저수지에, 길가에, 바다에 방목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사랑은

꽃이 아니다

꽃 지고 난 후의 그 무엇

사랑은 열매가 아니다

열매 맺히고 난 후의 그 무엇

 

그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이 지상에 처음올 피어나는 꽃

이 지상에 마지막으로 맺히는 열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 시집,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중에서

 

너는 결코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감포에서 구룡포를 지나 포항, 영덕으로 가는 밤길은 너무 길었다. 너는 아는 것이다. 어떤 사태를 관념화함으로써 우리는 망령 하나를 새롭게 갖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너는 믿음직스럽다.

 

그는 실종 되었다. 나는 실종된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매복해 있던 안개가 불쑥 튀어나올 때 마다 급히 핸들을 꺾어야하는 밤길을 달리며 그를 생각해 본다.

바다에 가서 바다에게 물어 보라. 외롭다고 말하면 바다는 더 큰 목소리로 외롭다고 말하고, 슬프다고 말하면 더 슬픈 몸짓을 바다는 보여준다. 그래서 결국엔 면벽하듯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의 침묵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윽고 이른 아침, 긴 방파제 끝에 서 있는 자동차와 그의 구두, 옷가지들을 수습했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두 병의 소주를 마셨던 그 밤을, 그를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허물 벗듯이 버려두고 간 사물들, 그런데도 바다는 너무나 푸르러 눈물이 아리다. 꿈이었던 것이다. 그가 터벅거리던 해안도로와 그림자,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등짐이었던 외로움이 다 허상이었던 것이다. 사막에 부는 바람을 그리려 하는 화가처럼, 나는 안개를 온전한 안개로 써낼 수는 없을까?

 

 

그를 만나러 감포에서 울진으로 간다

얼마나 먼 곳에서 숨차게 달려와 쓰러지는 것인지

너울대는 포말이 순간 흰 꽃으로 핀다

피었다가 지면서 파도를 움켜쥐며 날아오르는 갈매기

망막을 할퀼 때 마다 길은 급하게 왼쪽으로 꺾인다

그를 만난 지 오래 되었다. 사랑을 잃고 타향에 몸 붙인 그를

이제야 만나러 간다

그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 밤길을 달려 방파제 끝에서 서성였는지를

왜 막막한 바다에 줄을 던져놓고 마시지 못하는 소주를 두 병씩 마셨는지를

밤바다의 울음이 두통을 일으킨다

흐드러지게 핀 흰 꽃들은 일제히 고개를 꺾어 길을 막는다

그가 말하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서둘러 이야기 한다

외로운 사람이 바다로 간다

외로운 사람보다 더 외로운 것이

바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바다로 간다

그는 울진 방파제에서 실종되었다

 

 

- 밤바다전문

 

나의 막막한 구애 앞에 너는 결코 흐트러짐이 없다. 경주 남산을 넘으며 바위에 아로새겨진 천 년 전의 석불을 옆 눈으로 보면서 나의 굳은 생애에 깊이 새겨진 너를 생각했다. 오체투지하듯 온 몸을 부벼대며 산을 넘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훌쩍 산을 넘어가는 가벼운 구름, 너에게 가는 길이 곧 세상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주름진 나의 가슴에 알듯 모를 듯 미소인 듯, 울음인 듯 울려 퍼지는 종소리, 안성 칠장사 아침 햇살이 가득한 모란 잎에서도 너를 보았었는데, 그것이 신기루였다고 너는 말한다.

 

 

누가 이렇게 이뿐 이름 걸어놓고

황홀하게 죽어갔는가

무지개

그 양쪽 끝에서

터벅거리는

사랑

사막

지옥

 

 

- 실크로드전문

 

 

김제 금산사에서 도영 스님을 만난 것은 뜻밖이었다. 수많은 산사를 순례하였지만 스님들과 대화를 해 보지는 않았다. 그들의 수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될 수 있으면 경내에서는 발자국 소리조차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팔공산 파계사에 갔을 때였던가, 인기척소리에 호기심이 일었던지, 사미승이 살짝 문을 열어 내다보다가 눈길이 마주쳐 황급해 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인연에 대한 말씀을 듣는다. 눈빛이 맑다. 참 맑다. 청정한 바람으로 씻은 눈. 적막으로 내려 앉힌 묵직한 음성, 그는 인연을 이야기 한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며 오늘의 마주침은 과거의 인연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늘 자중자애 하여야 한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곧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 끈질기게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절망이여! 이제 이쯤에서 이별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올가미처럼 옥죄어오는 절망이여! 그 올가미가 녹슬어 스스로 끊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는가.

 

떠난다는 것은

 

그리웁다는 것은 그 무엇이 멀리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행하면서도 등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등 돌린 채로 등 돌린 채로

아무리 불러 봐도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웁다는 것은 아직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대가 있어 아름다운 세상 곁에

나도 가만히 서 있어 보고 싶다는 것이다.

 

- 시집,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중에서

 

나는 이제 그립다고 너에게 말하지 않으려 한다. 나에게 절망이며 희망인 너에게 내 곁에 있어야 한다고 윽박지르지 않으려 한다. 너를 이제 밤하늘의 별로 남겨 두어 오래오래 경배하려 한다. 항아리 속에 깊이 슬픔의 열매를 거두어들이고 눈물을 가득 부어 안개 가득한 세월의 마당에 묻어두려 한다. 그 어느 날, 참지 못하도록 고운 향기가 퍼질 때 그대 나그네처럼 나에게 오기 바란다. 은은한 향기 가득한 시심의 항아리를 지금 나는 서둘러 빚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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