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호에서 길을 잃다(외 1편)
김인자
서른 발자국을 걸었을 뿐인데 무덤 앞에서 길을 잃었다
한때는 다시없는 꽃밭이었을 저 조붓한 길
지금쯤 무덤 주인은
망연히 숙호*마을 낯익은 굴뚝을 바라볼 테고
섬처럼 홀로 어둠에 들 키 작달막한 그의 안식구도
처마 끝 풍경이 흔들릴 때마다 까치발로 서서
구절초 핀 동그란 무덤을 지켜볼 것이다
빤히 보이는 곳에서도
연기처럼 잡을 수 없는 것이 그리움이라면
생生과 사死란 집요하게 벽을 타고 올라가
곤히 잠든 식구를 들여다 볼 수는 있어도
더듬어 만질 수 없는 담쟁이 넝쿨 같은 게 아닐까
살아서 손잡고 가는 소풍이라면
설흘산* 봉수대 나란히 기대앉아
대나무밭에 이는 바람소리로 귀를 씻고
만추에 물든 푸른 앵강만鶯江灣* 바라보며
죽음도 나쁘지 않을 것이나
살아있어서 이렇게 눈부신 거라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을 것이다
가을이 계절의 벼랑 끝으로 걸어가고
마을엔 여전히 소문처럼 연기가 피어오른다
왜 나는 연기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까
돌아보면 잡고자 했던 모든 것이 한갓 연기였음에도
———
* 숙호는 경남 남해군 남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고, 설흘산은 남면에 있는 산이며 앵강만은 남면에 있는 호수처럼 생긴 만이다.
께냐
마추픽추를 돌아 쿠스코 난장에서 께냐* 하나를 샀다
안데스음악을 좋아하는 그를 위한 선물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살아서 함께 부르는 노래가 많을수록
죽은 후에도 잊히지 않는다는 걸 아는 듯
사랑하는 사람의 정강이뼈로 만들었다는
잉카의 전설을 익히 아는 그가 밤마다 께냐를 불었다
곁에 있으면 그리움이 될 수 없다는 말은 거짓말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도 새빨간 거짓말
저릿저릿 흘러가는 강물도 말라
웃어도 저리 애끓는 가락이 되었구나
바람 속 먼지처럼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구멍마다 흘러나와 어깨를 도닥여주는 노랫말
괜찮아 다 괜찮아 영혼을 위무하는 피리소리
한 생을 달려간다 해도 다시 못 볼 그 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야 탄생하는 악기
오늘, 살아서 불어주는 그대의 께냐
———
* 께냐(quena) : 사랑하는 사람의 뼈로 만들었다는 전설을 가진 잉카인들이 즐겨 부는 피리. 페루에서 짐승의 뼈로 만든 께냐를 보긴 했지만 현재는 대부분 대나무나 ‘마데라’라는 나무로 만든다.
—네이버 블로그 〈디디의 여행이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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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자/ 1955년 강원 삼척 출생. 1989년 〈경인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같은 해 《현대시학》의 ‘시를 찾아서’로 등단.
시집 『겨울 판화』『슬픈 농담』『상어떼와 놀던 어린 시절』『나는 열고 싶다』,
여행기 『풍경 속을 걷는 즐거움, 명상산책』『걸어서 히말라야』『아프리카 트럭여행』『뉴질랜드에서 온 러브레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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