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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칸나는 붉다 / 이현승

by 丹野 2013. 11. 26.

칸나는 붉다

 

   이현승

 

 

 

바깥은 연일 맹위를 휘두르는 폭염인데

버석거리며 갈증 나는 열이 번갈아 올라온다.

두통, 오한, 발열, 재채기, 기침, 목통증, 콧물과 눈물을 일으키며

일제히 휘몰아치는 화염이 온몸을 휘젓는다.

질병을 생각할 때 느낄 수 있는 강렬한 에로스.

 

창문에 매미 한 마리가 맵게 울다 간다.

18세기의 계몽주의는 부르주아 통일의 이론적 시멘트였다.

한때, 그리고 여전히 정치적 콘크리트를 꿈꾸는 자들,

기꺼이 한 몸 시멘트가 되고자 했던 자들의 음성처럼 목쉰 소리.

 

당신을 위한, 당신에 의한, 바로 당신의 것이었던 모든 열정들은

그러니까 당신하고는 말이 안 통해를 통과하면서

급격하게 냉각된다.

마치 적대와 분노가 얼굴을 굳게 하듯

사후경직 같은 감정의 시멘트.

 

나는 굳어 생각한다.

무슨 뜨거운 것을 삼킨 것인가. 무엇과 뒤섞이고 있었는가.

세상에 이렇게 더운데 오들오들 떠는 사람이 있듯

우리의 적대가 우리의 열정의 다른 근원이다.

약국 가서 몸살감기약 사먹고 오면서 보았던 근처 화단의 칸나

그러니까 칸나는 한없이 붉게 피어

그 붉음은 마치 모든 색을 빨아들일 듯이 검다.

 

 

 

—《시와 반시》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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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승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1996년 <전남일보>신춘문예 당선.

2002년《문예중앙》신인문학상 당선.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