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다시, 다시는 / 나희덕

by 丹野 2013. 10. 16.

 

 

 

 

다시, 다시는

 

  나희덕

 

문을 뜯고 네가 살던 집에 들어갔다

문을 열어줄 네가 없기에

 

네 삶의 비밀번호는 무엇이었을까

더 이상 세상에 세들어 살지 않게 된 너는 대답이 없고

열쇠공의 손을 빌어 너의 집에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걸어 나갈 것 같은 신발들

식탁 위에 흩어져 있는 접시들

건조대에 널려 있는 빨래들

화분 속 말라버린 화초들

책상 위에 놓인 책과 노트들

 

다시 더러워질 수도 깨끗해질 수도 없는,

무릎 꿇은 물건들

다시, 너를 앉힐 수 없는 의자

다시, 너를 눕힐 수 없는 침대

다시, 너를 덮을 수 없는 담요

다시, 너를 비출 수 없는 거울

다시, 너를 가둘 수 없는 열쇠

다시, 우체통에 던져질 수 없는, 쓰다 만 편지

 

다시, 다시는, 이 말만이 무력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무엇보다도 네가 없는 이 일요일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저 말라버린 화초가 다시, 꽃을 피운다 해도

 

 

―《시인수첩》2013. 가을호

 

 

 

 

'이탈한 자가 문득 > 향기로 말을거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녁의 창문들 / 조용미  (0) 2013.10.30
놀란흙 / 마경덕  (0) 2013.10.16
개인적인 현무암 / 서안나  (0) 2013.09.18
구월의 이틀 / 류시화  (0) 2013.09.01
모란 / 유미애  (0) 2013.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