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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감(感)에 관한 사담들 외 / 윤성택

by 丹野 2013. 8. 3.


 

 

 

그는 따뜻한 손을 그리워하며 잔기침을 하고 차향을 음미한다. 그가 있는 실내는 외로움의 공간이지만 한편 수분과 온기를 간직한 인간적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성택의 ‘외로움’은 한 존재가 인간적 감정의 깊이로 잦아드는 휴식의 순간이기도 하다. (……) “중력과 부력 사이”를 쉼 없이 오가야 하는 존재상황을 가로질러, 검은 가면을 벗고, 내가 비로소 ‘나’일 수 있는 외로움의 순간은 비극적이지만 진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윤성택의 우울과 외로움은 바깥에서 수없이 재조직되는 거짓 자아의 중심을 벗어나 본래적 자아에게로 귀의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정념의 끈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말]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은 아름답다
그런 추억일수록
현실을 누추하게 관통해야 한다
모든 기억은 추억으로 죽어가면서
화려해지기 때문이다

2013년 6월
윤성택

 

 

(感)에 관한 사담들 

 

 

윤성택

  

 

 

바람의 궤와 함께 이어지는 색감에서

사위를 움켜줜 채 회전하는 윤곽,

신화의 조난 같은 새벽이 다가오는 사이

빛은 여러 개의 가설을 파먹는다

 

 

가지마다 행성을 밝히는 액정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접속자들

 

 

후둑 떨어지는 홍시의 여정을 귀에 들려주면

불면의 시공간이 채집된다

 

 

녹슨 자전거 바퀴 속을 항해하는 먼지들은

이제 외계의 답신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아득히 계통에 없는 유기물로 스며든 후

나선의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을 때

감나무에서 붉어지는 봉분이 있다

 

 

핏빛 중력이 서서히 끌어당기던 언 땅 밑 항로를 가다보면

나직이 어느 불행과 조우할 수 있을까

 

 

새벽녘 얼굴만 비추는 액정에는

파리한 안색이 걸려 있거나 주술처럼 손톱이 부딪쳐온다

 

 

별들이 지독한 건 제 빛을 보내

그 눈빛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붉은 탯줄에 매달려 양육되고

고인은 외장 하드에 검은 시신경을 연결한다

 

 

희뿌연 배경 붉은 화소의 감나무는

광속의 주파수를 따라

운명은 다만 서로 돌아다보는 거라고

나뭇가지 갈래로 뻗어가고 있다

 

 

감과 감의 경계는 응시이다

 

 

 

 

 

 

기억 저편

 

 

 

 

한 사람이 나무로 떠났지만

그 뒷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어느 날 나무가 되어 돌아온 그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그때 이미 떠난 그였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는지 모른다

떠난 그가 남긴 유품을 새벽에 깨어

천천히 만져보는 기분,

길을 뒤돌아보면

그를 어느 나무에선가 놓친 것도 같다

나는 얼마나 멀리 떠나온 것일까

살아간다는 건 온 신경을 유목한다는 것이다

그가 떠난 자리에 잠시 머물면서

이렇게 한 사람을 부르는 것이다

 

 

 

 

 

아틀란티스 

 

 

 

바닷속 석조기둥에 달라붙은 해초처럼

기억은 아득하게 가라앉아 흔들린다

미끄러운 물속의 꿈을 꾸는 동안 나는 두려움을 데리고

순순히 나를 통과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러

막막한 주위를 둘러본다 그곳에는 거대한 유적이 있다

폐허가 남긴 앙상한 미련을 더듬으면

쉽게 부서지는 형상들

점점이 사방에 흩어진다 허우적거리며

아까시나무 가지가 필사적으로 자라 오른다

일생을 허공의 깊이에 두고 연신 손을 뻗는다

짙푸른 기억 아래의 기억을 숨겨와

두근거리는 새벽, 뒤척인다 자꾸 누가 나를 부른다

땅에서 가장 멀리 길어올린 꽃을 달고서

뿌리는 숨이 차는지 후욱 향기를 내뱉는다

바람이 데시벨을 높이고 덤불로 끌려다닌 길도 멈춘

땅속 어딘가, 뼈마디가 쑥쑥 올라왔다

차갑게 수장된 심해의 밤

나는 별자리처럼 관절을 꺾고 웅크린다

먼 데서 사라진 빛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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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먼 생각이 깊어져

봄꽃들이 핀다고

그렇게 믿은 적이 있다

 

 

잎잎의 주파수를 열어놓고

가혹한 지구의 들판에서

뿌리가 흙 속을 가만히 더듬을 때

 

 

화성에는 탐사로봇 스피릿이 있다

다 닳은 드릴이 바닥에서 헛돌고

무섭게 휘몰아치는 돌풍이 불어와도

교신을 끊지 않는다

 

 

카메라 속 황량한 표면,

암석의 촉감이 데이터로 읽혀온다

길을 걷다 문득

까닭 없이 꽃을 만져보고 싶다

 

 

아무 생각이 나질 않고 다만 멍하니 멈춰

나는, 송수신이 두절된 탐사로봇처럼

결함을 복구하느라 껐다 켰다를 수십 번 반복하는

누군가를 떠올려본다

 

 

꽃의 향기에 취해 아뜩한 내가 들여다보는

나의 마음은 누구의 선택이었을까

 

 

햇볕이 내리 도달하는 이 봄날,

다운로드 되듯 옮겨온 생각이

혼연일체의 새순에 돋는다

 

 

 

 

 

—시집『감(感)에 관한 사담들』(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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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인 (외 1편)

 

 

   윤성택

 

 

 

 

 

 

 

 

 

 

지나서 보이지 않는 건 이미 전부 다른 창이다

명함이 낙엽처럼 날리고,

노랗고 붉은 숫자가 우수수 차창에 꽂히면

신발은 차 트렁크 속으로 들어가 주말을 구겨 신는다

 

 

 

이젠 나의 아이디는 서명을 숨기며 나를 믿지 않는다

 

 

 

오래 저장했던 너의 폴더에서 눈물 냄새가 난다

밤과 낮 기울지 않고 사라지지 않은 채

습기 찬 시간을 머금으며 이름 안에서 순장하듯

 

 

 

비스듬히 잠든 그녀 어깨가 밤빛에 젖는다

가방이 감싼 무릎을 접어 흰 손가락을 내려보낼 때

피아노처럼 어느 건반은 어딘가에 두고 온 속눈썹

 

 

 

기억은 눈물 밖에서 떨어지는 빗소리 같은 것이다

 

 

 

검은 생풀 타오르는 굴뚝의 고백은

어떤 딱딱한 물리의 서러움, 연필 끝 지우개처럼

캄캄한 암연(暗然)을 향해서 핏기가 돈다

 

 

 

아직 생성되지 않은 페이지들이 내가 가본 적 없는 곳에서

평생 외워온 패스워드를 찾고 있다 거기쯤

검색 중인 저녁을 걷는 나의 골목

 

 

 

가을이 온다, 핸드폰은 얇아지고 다시 아무 일 없듯

수많은 창들이 액정화면처럼 번들거리며

손가락의 힘으로 장면을 밀어버린다

 

 

 

 

 

 

 

 

 

 —《시와 표현》 2012년 가을호

 

 

 

 

여행, 편지 그리고 카메라

 

 

 

 

 

 

 

 

 

 

 

나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지도 어디쯤에서

한쪽 눈을 감고 이곳 장면을 저장해 간다

 

 

 

배터리가 다 된 핸드폰을 끄면 아늑한 무덤이다

 

 

 

어느 민박집에 두고 온 칫솔이 잊혀지지 않는다

칫솔모가 눌려진 채 닦아내고 있을 한때의 적요,

과속 방지턱이 다가올 때마다 글자는 삐걱거리지만

물결 소인(消印)처럼 수첩은 어디론가 페이지를 열어 둔다

 

 

 

오래된 소읍에서는 바람이 묵어간 뒤뜰에도 수취인이 있다

 

 

 

떠나지 못한 날들 속에서 문장은 위독해지고

카메라는 나의 한쪽 눈을 목록으로 만들 것이다

 

 

 

차창 커튼을 스치는 소리는 여행의 첫 줄

누군가 뒤척인다, 다가오는 나무들은 저를 흔드는 바람에

빛을 털어내다 뒤편으로 사라져 간다 요약하면

어떤 간이역에서는 그늘과 슬픔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

 

 

 

내 눈으로 바라본 희붐한 새벽을 편지라 명명할 때

그 주소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시간의 오지다

 

 

 

 

 

 

 

 

—《문장웹진》2012년 9월호

 

 

 

 

 

윤성택

1972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문학사상》신인상에 「수배전단」외 2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리트머스』『감(感)에 관한 사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