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 없는 잠
최문자
어젯밤 꽃나무 가지에서 한숨 잤네
외로울 필요가 있었네
우주에 가득 찬비를 맞으며
꽃잎 옆에서 자고 깨보니
흰 손수건이 젖어 있었네
지상에서 없어진 한 꽃이 되어 있었네
한 장의 나뭇잎을 서로 찢으며
지상의 입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네
저물녘 마른 껍질 같아서 들을 수 없는 말
나무 위로 올라오지 못한 꽃들은
짐승 냄새를 풍겼네
내가 보았던 모든 것과 닿지 않는 침대
세상에 닿지 않는 꽃가지가 좋았네
하늘을 데려다가 허공의 아랫도리를 덮었네
어젯밤 꽃나무에서 꽃가지를 베고 잤네
세상과 닿지 않을 필요가 있었네
지상에 없는 꽃잎으로 잤네
-『시인동네』2013년 여름호
비탈이라는 시간
최문자
나의 모든 비탈은
앵두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서 곤두박질치다
나를 만져 보면
앵두 꽃받침이 앵두를 꽉 잡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산비탈에 앵두나무를 심고
우리들을 모두 앵두라고 불렀다
앵두꽃이 떨어져 죽을 적마다
우리는 자꾸 푸른 앵두가 되었다
신작로에 나가 놀다가도
앵두는 앵두에게로 돌아왔다
어쩌다 생긴 흉터는 모두 앵두꽃으로 가렸다
붉은 흉터들까지
외할머니는 꼭 앵두라고 불렀다
푸른 앵두가 이제 막 익는 거라고 말했다
지난여름 내내
비탈에 있는 동안
폭우에 앵두나무 몇 그루가
몸부림치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를 만져 보았다
앵두의 절반이 사라졌다
-『문학청춘』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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