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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괴물 외 4편 / 조삼현

by 丹野 2012. 7. 2.

 

 

조삼현 시인 신작소시집

괴물 외 4편  / 조삼현

 

 

 

괴물

 

 

조삼현

 

 

1. 

괴물이 출몰했다 이 작은 도시에도서울, 뉴욕도쿄, 런던파리에도 출몰했던 녀석이다 놈의 식욕은 왕성하다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다 목젖까지 차오르도록 먹고선 게워낸다 게워내야만 포만감을 느낀다 놈의 뱃속은 유리알 투명하다 밤중에도 속이 다 훤히 보인다 가죽재킷, 프라이팬육류야채, 도마 없는 것이 없다 많은 사람들 스스로 놈의 뱃속에 들어갔다 토사물에 섞여 나온다 목 잘린 닭, 발 없는 오리냉장고, 텔레비전, 가스레인지와 함께 섞여 나오기도 한다 오늘은 새 옷을 바꿔 입은 아내가 토사물 속에서 활짝 웃고 있다.  

 

2. 

지폐가 동전바퀴를 달고 이 골목 저 골목으로 굴러다니던 담론 그 시절, 그땐 그랬었다 골목길에 우뚝 선 전봇대 이 도시의 솟대였다 우산살처럼 펼친 전깃줄 이 도시의 혈관이었다 혈관 속으로 흐르는 쌀, 연탄, 이발가위, 장도리, 브래지어; 이 도시의 백혈구와 적혈구들; 풍년쌀집, 삼천리연탄, 행복이발소, 근대화철물, 미도양품서해건어물할매순대국, 허바허바사장종점미장원, 시대양복점, 상아탑문구다복다방, 자매수선집, 식칼 갈아요 곤로 고쳐요 울어라열풍만물수레상……돌고 도는 돈의 정처 없는 완벽한 착지먹이사슬의 相生.

 

 

 

 

다가구주택

 

조삼현

 

 

 

 

32세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단칸방

창문에 수신자 불명의 격서 붙어있다

 

그동안 너무 많은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남는 밥이랑 김치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드려주세요

 

한 끼 굶어 담 넘는 길고양이와

사흘 굶어 담 넘는 도둑과

굶어 죽어도 담 못 넘는 그녀의 선택 사이엔

몇 공기 밥알의 갈등이 있었을까?

 

지날지랄지랄 눈은 흩날리고 이 도시 늪지 저편엔

공룡자본주의의 성기처럼 우뚝 선 백화점

샹들리에 불빛은 질겅질겅

껌 씹는 나부裸婦처럼 깜박이는데 

화냥기를 질질 흘리며 호객행위를 하는데

 

세모가 바뀌면 둥근 해 뜨려나

세밑이 저물어도 새해가 오지 않는 시간의 허방 

 

(전기요금을 내지 않아 단전합니다)  

 

그녀 방 싸늘한 전기장판은

주인보다 먼저 체온을 놓았다

 

제국의 뒷골목이여, 자본의 사생아여

매음賣淫을 핥느니 요절을 꿈꾸었구나

 

 

 

 

 

 

은하수

 

조삼현

 

 

, 하늘멍석 위에 널어놓은 쌀

쌀밥 같다는 생각을 하며

주린 배 움켜쥐는 사람 있겠다 오늘밤도

칼바람은 어쩌자고 저리 매운지……

 

 

 

 

 

 

 

맥문동,사회학

 

 

조삼현

 

 

 

그늘은 태양의 벌레 먹은 자국이다

빛의 무덤이다

 

사람만이 촛불을 켠다, 그럴까?

 

보라, 보라!

보랏빛 맥문동꽃

가느다란 대궁에 수백 수천

성냥알처럼 핀

 

그늘꽃

 

빛의 이면엔 그늘이 있다는 듯

배후가 환해야 세상이 따뜻하다는 듯.

 

 

 

 

 

 

양파를 깔 때 눈물이 나는 이유

 

조삼현

    

양파를 깔 때 눈물이 나는 것은, 꽝꽝 언 땅속

지난겨울 통증이 한 꺼풀씩 벗겨지기 때문이다 

서릿발이 콕콕 맨살 쑤실 때의 비명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몸속에 초록 불씨로 피어날 아기가 있어요

알몸이 알몸을 끌어안고 견뎌낸 사랑의 은유 때문이다

땅 밑 어둠의 시간이 키운 고혹 살빛이라니!

껍질을 입어 여린 것의 옷이 되기 때문이다

눈보라치는 겨울 들녘에 서서 또는 화병 양파를 보며

나는 누구로부터 피었지? 생각해본 사람은 안다

당신 가슴속에 초록 불씨 하나 심어 있었다는 것을,

불씨 꺼질까봐

당신은 겹겹 근심걱정 껴입고 살았다는 것을,

불면 날아갈까 바람 앞 등불일까 애면글면

타는 애간장이 입술을 깨물어 참고

참아 온 속울음이 양파처럼 포개져 아릴 때

사람들은 꽝꽝 가슴을 친다, 대개

가슴을 치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화려한 조명을 위한 배후다

양파를 깔 때 눈물이 나는 것은 까도

까도 속마음이 쉽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의 자식들은 모두 부모의 껍질 속에서 핀다.

 

* 복효근 마늘촛불 변용

 

 

 

 

 

 

中年을 말하다   

 

 

조삼현

 

 

 

친구여, 우리들 가슴 어느 한군데

수문이 열린 것은 아닐까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쏴와 쏴와

무언가 새는 것은 아닐까

오늘도 한 움큼 가을 햇살 머물다간 자리

산 그림자 밀려오고

시나브로 젖어들고

시간의 이마 위에 노을이 

스미지는 않는가

번지지는 않는가

(탁발 같다 시간이여그 뜨거웠던

심장의 피 다 빠져나간 뒤

골다공 가슴만 남는다면

그리하여 그 휑한 곳에

광막풍 맵찬 회한만 들락거린다면

사랑이여, 다가오는 겨울의 체온 무엇으로 뎁히지?

친구여, 지금은 몸을 흔들 때

고요를 풀무질하여

잠든 세포의 영혼을 깨울 때.

 

 

 

 

 

 

 

 

 

 

 

 

시인의 말  

그늘은 태양의 벌레 먹은 자국, 내 시의 뿌리를 세상 저 밑바닥 슬픔에 두고 싶다낡아 쓰러진 사회주의 몰락 이후 견제 이데올로기 없이 팽창한 신자유주의는 급기야 공룡자본주의로 변질되고 말았다. 아흔아홉 섬 가진 놈이 나머지 한 섬을 탐하는 천민자본주의를 괴물이라고 할까.

 

괴물은 풍년쌀집, 삼천리연탄, 행복이발소, 근대화철물을 잡아먹고, 이 시대와 종점과 상아탑을 잡아먹고재래시장과 일자리를 잡아먹고소시민과 젊은이들을 잡아먹고급기야 맹금류의 부리로 골목 상권까지 쪼아대고 있다. 돌고 도는 돈이 기능을 상실하고 흐름을 멈출 때 그것은 흉기일 뿐지난해 겨울 나는 굶어서 죽은 그녀의 다가구주택 주변을 배회한 적 있다.

 

 

 

 

 

 

■ 조삼현 시인

-2008년 월간우리신인상 등단

-시와 공감동인.

- 이메일: sam32112@hanmail.net

 

 

 

출처 / 우리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