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유익한 가치를 전해 주는 시 / 이건청
1.
미시시피 강은 미국 31개 주와 캐나다 2개 주에 걸쳐서 흐르는 북아메리카 대륙 최대의 강이다. 이 강이 품어 안으며 흐르는 유역의 면적은 약 322만 ㎢, 하루 동안의 유출 수량이 13억 2,489만여㎥에 이른다고 한다. 지도상에 나타난 미시시피 강의 형태는 2개의 커다란 가지가 옆으로 뻗어 있는 나무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쪽이 오하이오 강이고 서쪽은 미주리 강이다.
그러나 이처럼 북미 대륙을 감싸 안고 흐르는 위대한 흐름도 그 시원을 거슬러 찾아가면 작은 흐름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의 발원지로 북쪽에 있는 미네소타 주의 아이태스커 호까지는 가느다란 지류로 이어져 있을 뿐이다(《브리태니커》).
그러나 이 강이 하류로 흐르면서 숱한 물줄기가 그 중심 흐름에 합류되게 마련이고, 이런 숱한 샛강들과의 합류 과정을 겪으면서 강은 드디어 융융한 흐름을 이루어, 총 길이 3,700km나 되는 ‘미시시피 강’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 강이 흘러가는 기나긴 흐름에는 물론 유역에서 흘러드는 수많은 크고 작은 강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강들은 수억 년 전부터 흐름을 이룬 ‘미시시피’에 합류되면서 각자의 강 이름, 개천 이름을 버리고 그냥 ‘미시시피’ 강이 된다.
내가 대학의 시학(詩學) 교수로 봉직했던 30여 년 동안 참 많은 시학 연구서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런 시학 서지들은 시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시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연구자의 전공 영역에 따라 제각기 다른 접근 방식을 택하고 있었고, 그 결과도 조금씩 다른 것들을 강조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시를 이루는 구성 성분으로서 시어의 자질 문제를 강조하고 있었고, 어떤 것은 시의 구조 문제에 매달리고 있었다.
어떤 것은 사람의 심리와 무의식 세계를, 어떤 것은 정치 상황과의 연계를, 또 어떤 것은 독자 중심의 수용미학적 관점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였다. 시학 연구서들의 연구 내용은 제각기 조금씩 다른 내용을 제시하고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시’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고 다양하게 해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롤랑 바르트나 푸코처럼 ‘저자의 죽음’을 제기한 학자도 있었다. 이들은 완전한 창작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고 한다. ‘저자’는 다만 통일된 원천에서 발생된 ‘일의적(univocal)’인 것으로 텍스트를 코드화한 자이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저자가 지니는 저작권은 승인될 수 없으며 다만 중의적, 복수적, 불확정적 텍스트를 코드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또, 시의 독해 역시 시가 지니는 의미의 유일한 핵심에 닿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독자 스스로 이런 불확정적인 텍스트가 지니는 복수적, 중의적, 불확정적 코드와 대면하는 일이라고 한다. 푸코는 작가를 독창적 창작물의 생산자라기보다는 인류사 이래로 만들어진 수많은 코드를 수용하고 거기서 얻어낸 또 다른 코드 생산자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근래, 한국시에도 이런 이론을 반영한 듯한 시편들도 보인다. 독창적인 창작물은 있을 수 없으니 시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창작물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이 과거에 누군가가 말한 적이 있는 것들이고, 시로 발표되고 있는 것들은 과거에 누군가가 창작한 것들의 변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창작시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뒹구는 신문지의 글도 시인 셈이요, 상점의 간판들도 시일 수 있다고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창작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다만 원창작물에서 인용되거나 변용시킨 문장들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허무요 퇴폐의 극한인 셈이다
한국 시단에는 실험적인 시, 어떤 파격을 보여주는 시가 좋은 시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상한 관례가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물론, 새로운 형태의 모색이나 언어 구사의 문제, 구조의 문제에 있어서 파격과 실험은 기존의 가치가 지니는 타성을 깨뜰고 새로운 틀을 지향하기 위한 필요 요소이기는 하다.
그러나 실험이나 파격은 ‘새로움’으로 가기 위한 모색을 위한 것일 때, 참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시단에는 실험과 파격의 시만을 계속해서 써내는 시인들도 있다. 실험은 그 실험이 지니는 궁극에 닿기 위한 과정일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실험은 불확정성을 띠게 마련이고 필연적으로 결핍을 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방가르드 예술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적은 어떤 발견적 가치에 닿기 위한 것일 터이다. 아방가르드 예술의 존재 가치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실험과 파격이 지니는 의미를 분석하고 그 발전 방향까지를 예측해 보여주는 깊은 혜안의 성찰자가 시 비평가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많은 시 비평가들이 실험과 파격의 시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런 시를 좋은 시인 양 논지를 전개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참으로 좋은 시의 깊이에 닿을 수 없는 능력 부족의 분석자들이 접하기 쉬운 실험이나 파격의 시만을 그들이 지닌 분석의 틀로 밝혀내는 일에 매달리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김영랑의 시나 김종삼의 시, 박용래의 시가 김수영이나 김춘수의 그것보다 절대 못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시단 평론이나 강단 비평 어느 쪽에도 김수영이나 김춘수의 시에 대한 연구물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런 현상은 시적 수준의 우열 문제가 아니라 의미 중심이거나 반대로 의미의 소거를 지속적으로 추구한 김수영이나 김춘수의 시가 비평이나 연구의 논지를 전개하기가 수월하다는 데서 연유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좋은 시는 사람이 지닌 감수성이나 상상력을 진심의 상태에서 펼쳐 보이는 것이고, 그런 진심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곡진한 언어로 구조화해 낸 시일 터이다. 그런 시편들은 인간의 영혼을 상승시키며 초월적인 힘으로 사물과 현실이 지닌 안일과 타성 속에서 ‘발견’의 지평을 열어 보인다.
칠레의 산호세 광산 지하에 갇힌 채 69일을 버텨낸 광부 33명의 얘기는 퍽 감동적이다. 지하 688m에 갇힌 채 절체절명의 위기를 버텨낸 광부들도 그렇거니와 이들을 구조하기 위해 소통로를 마련하고 캡슐을 내려보내 이들을 지상으로 구조해 낸 사람들의 인간애도 아주 감동적이다. 지하에 갇힌 사람들은 용기와 신념을 불어넣기 위해 그들 사이에 규범을 만들고 그들이 만든 규범에 따르면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중에 누군가가 파블로 네루다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시를 낭송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었다. 그는 전문적으로 시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특별한 문학적 교양을 지닌 사람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평범한 광산 노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왜, 생사가 갈릴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시간에 시를 낭송했던 것일까. 나는 이 하나의 현실 앞에서 시가 인간에게 무엇인가, 무엇일 수 있는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근본 문제에 대한 극명한 답변이 내재하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깊은 지하에 매몰된 광부들에게 시가 다가서게 되는 필연이 그래서 가능한 것이 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는 인간성의 핵심과 연관되어 있는 예술이다. 인간의 정서와 상상력과 사유에 기반하는 예술이며, 인간 영혼을 심오한 가치로 고양시켜 주는 예술이다.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피와 살과 뼈로 구성된 유한 존재이고 미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지만 정서와 상상력과 사유와 영혼을 통해서 위대한 가치가 되기도 한다. 한 편의 시가 시대정신의 첨단을 이루고, 고난의 사람들에게 밝은 희망으로 타오르기도 한다.
2.
반구대 암각화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234-1번지로 지번이 나와 있는 나지막한 거북 모양의 산 아래쪽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 암각화는 6천여 년 전부터 새겨지기 시작해서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울산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울산의 암각화》(전호태 지음)는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실측을 토대로 암각화에 새겨진 296개의 도형을 분류하고 규정하고 있어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6천여 년 전이라면 단군신화 이전의 시간이다. 신화 이전의 시간 속에서 울산 일원에 우리의 선조들이 군집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고래잡이 포경선을 제작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고래를 사냥해서 식량 조달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이 암각화는 전해 주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는 지금의 울산광역시와 경주 일원에 살았던 신석기인들과 청동기인들이 만든 것이다. 민족지적(民族誌的)인 연구에 의하면 사냥, 채집 위주의 생활 집단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움직이는 거리가 주거 공간을 중심으로 10km 정도, 걸어서는 2시간 정도 이내의 거리라고 한다. 전호태에 의하면 반구대 암각화처럼 종교적 활동의 대상일 경우 20km까지도 그 범위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주술의식을 거행하는 장소는 생활공간과 떨어진 성스런 공간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암각화로부터 직선거리로 20km라면 지금의 울산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이 된다. 바닷가 해안을 포함하는 지역에 분포해 살던 사람들이 염원의 주술의식으로 거행하는 성스런 공간이 지금의 반구대 일원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암각화 바로 앞쪽으로는 100여m 정도의 냇물이 있고 맞은편 건너 쪽엔 펑퍼짐한 땅이 마련되어 있다. 주술의식이 거행되는 암각화 공간과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생활공간이 나뉘어 있다. 암각화 앞 작은 계단에서 주술사가 의식을 거행하고 생활공간의 사람들이 예배를 거행하였을 것이다.
주술사의 집례로 예배를 거행하는 거기 그들은 암각화를 새기고 그것들에 의탁하여 그들의 염원을 실현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296개의 도형 중에서 지금 그 형상이 확인된 것은 218점이라고 한다. 이들 중 가장 많은 것이 동물상으로 193점이고 다음으로 인물상 14점, 도구상 11점, 미상이 78점이라고 한다. 이런 분류 중에서 고래가 58점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그런데 반구대 암각화 296개 중에서 내게 비상한 관심을 갖게 한 아주 조그만 도형이 하나 있다. 높이가 20.5cm, 폭이 24cm로 돌 쪼기 방식으로 만든 인물상이다. 이 인물상은 반구대 암각화의 도형들이 대부분 구체적 형태를 다루고 있는 데 비하여 아주 특이하게도 인체의 세부들을 모두 소거시키고 몸통과 팔다리, 손가락 발가락만을 다루고 있다. 이 도형의 사람은 팔과 다리를 수평이 되게 활짝 펼치고 있는데, 손가락 10개와 발가락 10개가 과장되게 제작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도형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인체를 완전히 왜곡시키고 있는 셈이다. 인체가 마치 날아오르는 한 마리 새의 모습처럼 되어 있다. 마치 현대 예술의 데포르마시옹 기법을 생각나게 한다.
그런데 이 땅의 석기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왜, 날아오르는 듯한 이 사람을 바위 면에 새겼던 것일까. 바위 면에 새긴 도형의 형태가 몇 천 년의 풍상을 이겨내고 오늘날까지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 건너 쪽 암각화 바위 면의 아래쪽에는 겨우 몇 사람 정도가 설 수 있을 정도의 좁다란 공간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 도형을 새긴 사람은 이 좁은 공간에 서서 뾰족한 돌로 바위 면을 두드리고 갈아서 이 그림을 완성해 낸 것이다. 상당히 적극적인 제작 의도 속에서 이처럼 특이한 형태의 인물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물 건너 반구대 바위 면으로 건너가게 한 의지는 무엇이었을까. 돌로 돌을 두드리게 한 이 석기인의 힘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인체의 구체적 세부를 과감히 소거해내고 날아오르는 인체를 상정해 내게 한 그 지적 사유와 상상력이 있게 한 그 창조의 능력은 어떻게 습득된 것일까.
반구대 암각화는 당대인들이 초월적 존재자를 향해 드리는 간절한 기원을 담아내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당대인들이 현실에서 겪는 좌절과 절망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열망을 도형의 형태로 바위 면에 새긴 것이다. 초월적인 존재와 당대인들의 영혼이 소통하는 기호 표현으로 ‘날아오르는 사람’의 형태를 상정한 것이며, 그것을 바위 면에 구조화함으로써 그들의 염원을 영속하는 형태 속에 담아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점은 예술작품 발생 이론의 첫 장에 나오는 얘기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예술은 사람의 삶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며, 결핍의 사람이 지니는 목마름도 채워 줄 수 있을 때 참가치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핍의 인간이 암각화를 창작해 낸 것이며 한 시대가 지니는 집단무의식이 암각화를 통해 초월적인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코드를 소유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날아오르는 사람’은 직관과 영감의 접점을 통해서 당대 사람들의 기원을 실현하고 구체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땅의 선사인들이 창작해낸 ‘날아오르는 사람’을 한 편의 ‘좋은 시’로 치환시켜 시의 참가치를 생각해 볼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좋은 시의 언어는 오감의 언어이며 상상력의 언어이다. 살아 있는 실체를 구현해 줄 수 있는 언어, 살아 있는 실체를 구현해 줄 수 있는 시가 좋은 시이다. 지금 우리는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오감과 상상력의 세계를 잃고 관념으로 굳어 버린 의미의 세계에 묶여서 살고 있다. 안일과 타성 속에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눈’도 흐려지고 ‘귀’도 멀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반복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접하는 일은 쉽고 편한 것이다. 인식 주체인 ‘나’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스스로 펼쳐 대상의 본질을 인식해야 하지만, 그런 과정은 번거롭고 힘들며 고통스러운 일이기까지 하다. 상상력과 감수성이 활발하고 역동성 있게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번다한 세속과 다른 심리적 긴장과 흥분 상태가 필요하게 마련이지만 그런 기회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고도의 집중과 언어 획득 역시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반복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접하게 되면 이런 어렵고 힘든 과정 없이 곧장 사물이나 현실에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쉽게 도달한 사물이나 현실은 관념과 타성이며 상식에 길들여진 세계일 뿐이다. 현실과 사물 속에서 감각을 회복하는 일이 시의 일일 텐데도 말이다.
3.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원을 담아낸 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결핍을 직관과 영감의 언어를 통해 보완해 주는 시, 그리하여 ‘밝은 눈’과 ‘맑은 귀’로 현실과 사물의 근원을 접할 수 있게 해주는 시를 우리는 필요로 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작은 웃음 보이며 맑게 맑게 반짝이며/ 노을 속에 서 있는 산 개울가의 너는/ 장님이 데리고 가던/ 어느 딸애의 살결 같은 꽃 ― 이우걸 〈달맞이꽃〉 전문
시인의 눈이 풀꽃 하나를 새로운 세계 속에서 발견해 보여주고 있다. 사소한 시적 대상을 명징의 세계로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관념과 타성의 사물과 현실을 새로운 풍경으로 호명해 내는 시적 혜안은 삶을 청신한 것이 되게 한다.
가난한 아버지가 가련한 아들을 껴안고 잠든 밤//마른 이불과 따끈따끈한 요리를 꿈꾸며 잠든 밤//큰 슬픔이 작은 슬픔을 껴안고 잠든 밤//소금 같은 싸락눈이 신문지 갈피를 넘기며 염장을 지르는, 지하역의 겨울밤 ― 박후기 〈자반고등어〉
슬픔을 바라보는 차고 시린 눈빛이 가슴 저리게 다가서는 시이다. 소금에 절여진 채 가슴을 포개고 있는 ‘자반고등어’를 통해 겨울밤 지하역에서 아들을 끌어안고 잠든 노숙인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큰 슬픔인 아버지와 조그만 슬픔인 그의 아들이 “마른 이불과 따끈따끈한 요리”를 꿈꾸며 잠이 들었다고 시인은 술회하고 있다. 비록 ‘자반고등어’처럼 소금에 전 ‘잠’을 자는 이 노숙인 부자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이 시대가 지니는 비애의 모습이면서, 그런 비애 속에 깃든 육친애이다.
시인은 소금에 절여진 ‘자반고등어’가 지니는 내포를 부자가 껴안고 잠든 노숙인의 현실적, 정서적 정황과 상호 침투 과정을 거치게 하면서 놀라운 의미지평을 발견해 보여준다. 그리고 시인이 창출해 낸 이 근원적 비애는 궁극적으로 동시대인들에게 사랑의 유대감에 눈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도 있을 것이며, 비애의 궁극에서도 변함없는 육친애를 확인할 수 있게도 해 준다.
여자가 있었네
푸른 눈동자의 여자가 있었네
가늘고 긴 휘파람을 불면
푸득푸득! 햇살을 털고 어느 사이엔가 내 곁으로 와 파도치던 여자, 밀주든 독주든 그윽이 잔을 치던 여자
정성껏 비늘을 걷어내고 껍질을 벗겨
한 점 두 점 제 살을 발라 밤새도록 내게 먹이던 여자
곤이며, 애며 남김없이 제 것을 다 주던 여자
그리하여 은빛 가시와 비린 뼈만 남은 여자
해풍이 불 때면 바다를 등지고 앉아 고개를 떨구던
그 여자
누나가 되어 날 쓰다듬어 주었고
아내가 되어 양귀비꽃처럼 활짝 웃던 여자
우리 모두가 붙어먹던 여자
목 타는 새벽녘엔 제 젖을 물려주던 여자
토닥토닥 등 두드리며 잠 재워주던 여자
잠 깨니 사라져 버렸네
별이 간 길 따라 떠나버렸네
입 안엔 아직 비린 기억이 꿈틀대는데
푸른 눈알 파먹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네
― 김요일 〈인어 이야기〉
소멸된 것, 사라져 버려서 이제는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을 최초의 자리로 복원시켜 보려는 염원은 모든 사람에게 간절한 것이 되게 마련이다. 그리움이 간절한 것일수록 소멸된 빈자리는 큰 것이 된다. 시인은 이제는 소멸되어 버리고 없는 그리움의 자리에서 곡진한 말들을 찾아내고 있으며, 그렇게 찾아내진 곡진한 말들이 ‘그 여자’를 불러낸다.
시인이 되살려 내고 있는 ‘그 여자’는 “한 점 두 점 제 살을 발라 밤새도록 내게 먹이던 여자/ 곤이며, 애며 남김없이 제 것을 다 주던 여자/ 그리하여 은빛 가시와 비린 뼈만 남은 여자”이며, “누나가 되어 날 쓰다듬어 주었고/ 아내가 되어 양귀비꽃처럼 활짝 웃던 여자”이며, “목 타는 새벽녘엔 제 젖을 물려주던 여자/ 토닥토닥 등 두드리며 잠 재워주던 여자”다. 이 시에서 시인이 불러내 준 ‘여자’는 온전한 헌신과 희생의 모습으로 여실하며, ‘누나’나 ‘아내’의 모습으로 자애롭다. 시인의 말들이 오감의 언어로 살아 움직이면서 망극한 성애의 기억을 현재의 시간 속에 되살려내 주고 있다.
인간의 영혼을 상승시키며 초월적인 힘으로 사물과 현실이 지닌 안일과 타성 속에서 ‘발견’의 지평을 열어 보여주는 시가 좋은 시이다. 시는 인간성의 핵심과 연관되어 있는 예술이다. 인간의 정서와 상상력과 사유에 기반하는 예술이며, 인간 영혼을 심오한 가치로 고양시켜 주는 예술이다.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피와 살과 뼈로 구성된 유한 존재이고 미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지만 정서와 상상력과 사유와 영혼을 통해서 영속하는 가치가 되기도 한다.
? 이건청 |
1942년 경기 이천 출생. 1967년〈한국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반구대 암각화 앞에서》《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외.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목월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등 수상.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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