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수론
신작시 대숲 외 6편/ 문 인 수
대숲
시퍼렇게 털 세운 대숲 한 덩어리가 크다.
저 어슬렁거리는 풍경은 사실 전국 어디에나 붙박인유적이다. 그들은 왜 마을 뒤, 산 아래에다 대숲 우거지게 했을까
대숲 속은 아직 덜 마른 암흑이 축축하다.
꽉 다문 입, 마음속의 깜깜한 짐승을 풀어놓았을까. 날 풀어놓고 싶어하는 비밀이 지금 사방 눈앞에, 귀에 자자하다. 댓잎 자잘한 동작들이, 소리들이 그렇듯 무수하다. 울부짖음이란 본디 제 것이어서 자디잘게 씹어 삼켜야 하는 것, 또 한 떼 새까맣게 끓어오르는 것.
마을 뒷산 아래, 너무 깊이 뿌리내려 떠나지 못하는 바람의 몸, 바람의 성대가
하늘 쪽으로 몰려 쏟아지는 광경이 폭포 같다.
무넘이 무넘이 시퍼렇게 넘어가곤 한다.
파냄새
노점 아주머니가 부지런히 대파를 다듬는다.
아주머니한테 아직 묻어 있는 色, 잠시 입을 가리며
킬킬킬 웃으며 오늘도 펑퍼짐한 몸 한 무더기를 털썩,
낳아놓았다. 어둑살 아래, 좌판에 쑥 쑥 뽑아놓는 대파,
파는 가지런히 하얗게 깔려
무릎 앞이 바로 생생한 건반이다. 지난 날
어느 시골 초등학교 교실의 풍금 소리가 날 것 같다는
내 생각 따위, 바람에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이 금세 지운다. 희끗희끗
나부끼는 추억이랄까,
파껍질들은 언 길바닥에 달라붙고 들러붙고 밟힐 뿐이다. 다만
깨끗한, 독한 파냄새를 계속 뿜어대는 저 아주머니의 깊은 속엔
더 많은 입김이, 긴 화차 같은 일생이 꽉 꽉 들어차
악물렸을 것이다. 이제 어디에나 앉기 편한 엉덩이로 눌러 잡은 자리,
아주머니의 오십대 후반을 시꺼먼 방한복에 묵직하게
뚤뚤 뭉쳐놓았다. 저 바닥은 사실
혹한이 돌보는 셈이다. 얼거나 썩지는 않겠다.
꼭지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生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그늘에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 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
주전자 꼭다리 떨어져 나가듯 저, 어느 한 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만금이 절창이다
물들기 전에 개펄을 빠져나오는 저 사람들 행렬이 느릿하다.
물밀며 걸어 들어간 자국 따라 무겁게 되밀려 나오는 시간이다. 하루하루 수장되는 저 길, 그리 길지 않지만
지상에서 가장 긴 무척추동물 배밀이 같기도 하다. 등짐이 박아 넣는 것인지,
뻘이 빨아들이는 것인지 정강이까지 빠지는 침묵, 개펄은 무슨 엄숙한
식장 같다. 어디서 저런,
삶이 몸소 긋는 자심한 선을 보랴, 여인네들…… 여 나문명 누더기 누더기 다가온다. 흑백
무성영화처럼 내내 아무런 말, 소리 없다. 최후처럼 쿵,
트럭 옆 땅바닥에다 조갯짐 망태를 부린다. 내동댕이치듯 벗어 놓으며 저 할머니, 정색이다.
“죽는 거시 낫것어야, 참말로” 참말로
늙은 연명이 뱉은 절창이구나, 질펀하게 번지는 만금이다.
쉬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겄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누였다고 합니다.
온 몸,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 썼을 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
이 땅에 붙들어 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밤늪
달빛이 늪의 물에 오래 가만히 있다.
달빛 풀리는 물이랑이, 바람 타는 갈대숲이 추는
춤, 춤 속으로 흘러들 뿐 하염없이 오래
가만히 있다. 딴 짓 하지 않는다.
으스름 아래 어디 저 집요한 소쩍새 있다.
개구리 물오리 풀벌레 소리 또한 오래
딴소리하지 않는다. 저 몇 그루 뚝버들의 시꺼먼,
산의 시꺼먼 대가리들 또한 왈칵,
재채기 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다 오래,
무슨 일이 참 많다. 이 소란한, 방대한 고요가 그것인데
누가 밤새도록 걸어놓은 양수기의 발동 소리가,
거기에 발이 툭, 걸린 내 마음까지도 다시 긴
둑길을 따라 천천히 흘러 들어간다. 딴 짓,
딴소리하지 않는다. 오래 가만히 있다.
중화리
대숲 대나무 꼭대기에 까마귀 떼가 시꺼멓다.
대나무들 우듬지가 휘청휘청 몸부림치며 날아오르려 하고 까마귀들,
커다란 열매처럼 한사코 주렁주렁 자리 잡으려 한다. 풀리지 않는다. 이
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지 까마귀들 제 날개에 붙어 한꺼번에 후다닥
가볍게 떠 날아가고, 대나무들은 또 제 뿌리 짬으로 붙어 일괄 시퍼렇게
와스스 돌아온다. 에라, 마음 비운 것처럼 생멸처럼 어느 명절 끝처럼 결
국
만사 해결된 것처럼 고요하다. 이 곳 역시 노인들만 사는 마을,
중화리. 없는 것 빼고 컹 컹 컹 컹 다 있다.
문인수론
주변인의 초상과 고요한 풍경의 시
이형권(문학평론가)
1.
문인수는 1945년 경북 성주에서 해방둥이로 출생하여 1985년 「심상」신인상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그는 소위 중앙 문단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학연이나 지연(地緣/紙緣)에 얽매이지 않는 당당한 지방 시인이다. 서울 이외의 지방 문화가 점점 자생력을 잃어가고 있는 오늘날, 비주류로서의 여러 악조건들을 극복하고 정통 서정시의 중심에 자리를 잡은
그의 모습은 시사해 주는 바가 적지 않다. 그는 비록 다른 시인들에 비해 늦은 나이에 등단을 했지만, 이 불리한 조건을 오히려 높은 수준의 시적 성취를 위한 각고와 성숙의 계기로 삼았다. 그의 작품들은 시적 성취라는 것이 반드시 연륜이나 외적인 여건 따위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그의 서정시는 현실 감각을 동반한 1980년대의 신서정시나 성찰적 인식을 중시하는 1990년대의 내면화된 서정시와는 다른 서정시의 경지를 개척해 가고 있다.
문인수는 그동안「늪이 늪에 젖듯이」(1986),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1990),「뿔」(1992)「홰치는산」(1999),「동강의 높은새」(2000).「쉬!」(2006),「배꼽」(2008) 등 6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이 시집들은 사반세기에 이르는 그의 시세계를 총결산하는 것이지만, 그가 시단에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동강의 높은 새」를 발간한 이후부터이다. 이전의 시편들도 전원적 서정과 주변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이라는 측면에서 이후의 시편들과 긴밀하게 연관되지만, 사유의 깊이라든가 수사적 세련미를 앞세운 시적 완성도에서 확실한 변화가 있었다.
이를테면 “동강”의 물결을 “새 한 마리”가 “단일획 깊이 여러 굽이 새파랗게 // 일자무식의 백 리 긴 편지를 쓴다”(「동강의 높은 새」)라고 묘사하고, 동백의 낙화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라고 표현한 기발한 시구들은 우리의 서정시가 도달한 한 절창이다. 그래서 시적 성취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는 2000년대 시인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실제로 그는 2000년대 들어서 이 땅의 서정시에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그의 시는 예컨대 객관의 주관화라든가 회감의 원리, 순수 서정의 지향과 같은 기왕의 서정시적 관습을 견지하면서도, 주변인에 대한 관심과 관찰자적 시선, 내밀한 사유와 명상적 분위기, 절제된 언어와 고도의 수사적 장치 등 분명히 다른서정 시인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글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문인수시에 빈도 높게 드러나는 주변인의 초상과 고요의 풍경이다. 그의 시에는 보통의 서정시와는 달리 특정한 인물이 등장하곤 하는데, 그들은 대개 현실에서 소외된 변두리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주변인이다. 그런 주변인의 형상과 행동을 일정한 거리에서 관찰하는 방식은 시상 전개의 독특함을 보여준다. 보통의 서정시가 대상에 대한 성급한 서정화나 일방적인 주관화를 지향한다면, 문인수의 시는 오히려 그러한 서정화, 주관화를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면서 하나의 풍경으로 형상화하면서 그 본질을 천천히, 찬찬히 탐색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깊은 서정의 울림을 동반한다.
2.
문인수 시에는 “꼭지”와 같은 독거노인, 장애인, 노점상, 미망인, 농민, 어민, 늙은이 등이 빈도 높게 등장하여 서정의 주체로 기능한다. 이들은 대개 신산스런 인생경험 충분히 겪은 중년층이나 늙은이들이 대부분이어서 연령상으로도 인생의 주변적 시기를 살아가는 부류에 속한다. 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도 도시의 변두리나인적이 드문 농촌, 산촌, 어촌과 같은 전원적인 변두리이기 때문에 이들의 정체성과 잘 어울린다. 문인수 시인이 이들을 자주 전경에 내세우는 이유는 이들이야말로 삶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生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그늘에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 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
주전자 꼭다리 떨어져 나가듯 저, 어느 한 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 「꼭지」전문
“꼭지”는 도시의 변두리에서 “독거노인”으로 살아가는 어느 “할머니”의 이름이다. “꼭지”라는 이름은 과거 가부장적 사회에서 축복받지 못하는 딸의 이름으로 흔히 쓰였다고 한다. 딸 부잣집에서 딸은 이제 “꼭지”떨어지듯 그만 낳고 싶다는 소망이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여“꼭지”라는 이름에는 태생부터 일평생을 천덕꾸러기로 살아온 “할머니”의 가난하고 고독하고 서러운 삶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시적 정황으로 볼 때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동사무소”에서 자원봉사자들의 점심 봉사가 있는 날이다. “꼭지”는 한 끼니를 때워보려고 “고픈 배”를 움켜쥐고“동사무소”를 향해 가는데, 화자는 그 모습이 마치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고 한다. 기력이 쇠하고 등이 굽은 “꼭지”가 목적지를 향해서 천천히 힘겹게 가는 모습이 “달팽이”와 닮았다는 것이다. 보통의 서정시라면 이 대목에서 화가가 연민의 감정을 드러내면서 다소 감상적인 태도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시상의 흐름은 여전히 냉정한 관찰자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꼭지”를 “저 할머니”라고 명명하는 것도 그런 태도와 관련된다. 화자는 “꼭지”가 “生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걸어가는 모습을 응시할 뿐이다. 시상을 변화가 있다면 “민들레꽃 한 송이”에서 비롯되는데, 이 꽃의 노란 색감은 살길이 막막하고 힘겨운 “꼭지”의 생애를 적실하게 상징한다. 누구나 극단적으로 힘들 때에는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법, “꼭지”의 힘겨운 생애가 “민들레꽃”의 노란 색깔로 상징된 것은 자연스럽다. “젖배 곯아 노랗”던 “기억의 끝”을 떠올리며 느릿느릿 힘겹게 “동사무소”를 찾아가는 “꼭지”의 모습은, 길가에 버려진 “민들레꽃 한송이”와 다르지 않은 애잔한 주변인의 초상이다.
화자는 이 느린 걸음걸이로는 고달픈 현실 너머의 세계인 “하늘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을지 의문을 던진다. 그저 “시간”이 “새”처럼 날아갈 뿐이어서 그녀의 목적지인 “동사무소” 혹은 “하늘 꼭대기”까지 가도 가도 멀게만 느껴진다.
이 대목까지도 화자는 주관적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꼭지”의 모습을 묘사하기만 한다 (마지막 연의 “이년의 꼭지”에 약간의 감정이 개입하지만 이 시를 지배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관찰자적 태도가 오히려 독자의 감동을 불러온다.
이처럼 생의 밑바닥을 포복하듯 힘겹게 살아가는 “꼭지”의 모습에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다. 이 연민지정이 화자의 노골적을 감정이나 개입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시적 감동으로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만일 화자가 먼저 감정을 드러내거나 감동을 요구했다면 이
시의 정서적 효과는 반감되었을 것이다. 화자가 독자들에게 감동을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깊고 자발적인 감응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런데, 주변인들의 초상이 “꼭지”와 같이 비극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으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인수의 시에서 주변인들의 삶은 고독하고 고달픈 것이지만, 그 속에서 얼마든지 서정적, 긍정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시적 대상이다. 예컨대 “노점 아주머니”의 힘에 부치는 삶을 “저 바닥은 사실/ 혹한이 돌보는 셈이다. 얼거나 썩지는 않겠다”(「파냄새」)는 식의 역설적 가치를 지닌다. 즉 “그 어떤 절망에도 배꼽이 있구나”(「배꼽」)에서 말했던 것처럼 어떠한 “절망”의 상황에서도 절망을 넘어서는 역설적 생명 에너지를 발견한다.
아래의 시에 등장하는 “저 할머니”의 모습도 그렇다.
물들기 전에 개펄을 빠져나오는 저 사람들 행렬이 느릿하다.
물밀며 걸어 들어간 자국 따라 무겁게 되밀려 나오는 시간이다.
하루하루 수장되는 저 길, 그리 길지 않지만
지상에서 가장 긴 무척추동물 배밀이 같기도 하다. 등짐이 박아 넣는 것인지,
뻘이 빨아들이는 것인지 정강이까지 빠지는 침묵, 개펄은 무슨 엄숙한
식장 같다. 어디서 저런,
삶이 몸소 긋는 자심한 선을 보랴, 여인네들…… 여 나문 명 누더기 누더기 다가온다. 흑백
무성영화처럼 내내 아무런 말, 소리 없다. 최후처럼 쿵,
트럭 옆 땅바닥에다 조갯짐 망태를 부린다. 내동댕이치듯 벗어 놓으며 저 할머니, 정색이다.
“죽는 거시 낫것어야, 참말로” 참말로늙은 연명이 뱉은 절창이구나,
질펀하게 번지는 만금이다.
― 「만금이 절창이다」전문
이 시는 “저 할머니”가 다른 “여인네들”과 “개펄”에서 일을 마치고 일몰즈음의 “만금”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보여준다. 몸 부리고 사는 어촌생활이 다 그러하듯이 “저 할머니”의 삶도 “하루하루 수장되는” 것과 같고, “누더기 누더기” 살아온 “흑백/ 무성영화”같이 고달프기만 하다.
하루하루를 “최후처럼” 최선을 다해 살아온 “저 할머니”의 삶은 지나온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과 내일의 것도 다르지 않을 듯하다. 그래서 “저 할머니”는 온종일 질펀한 개펄에서의 노동을 끝내고 그 수확물을 “트럭 옆 땅바닥”에 내려놓으며 정색을 하고는 “죽는 거시 낫것어야”라고
말한다. “정강이까지 빠지는 침묵”과 같은 “개펄”을 힘겹게 빠져나와 던진 이 한마디가 이 시에 등장하는 유일한 소리이다. 그만큼 이 시에서 전경화된 것이 이 소리다. 그런데 이 소리는 삶의 고달픔을 표현한 것인 동시에 풍요로운 수확에 대한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다. 이 소리는 지나온 삶의 힘겨움을 일시에 덜어내는 정직한 자기 위안의 소리이자, 죽음 같이 힘겨운 삶이라도 소중하다는 긍정적 인식을 동반하는 것이다.따라서 그 소리는 “개펄” 바닥같이 고달프고, “조개” 속살같이 풍요로운 “저 할머니”의 삶을 응축해서 쏟아내는 언어이므로 “늙은 연명이 뱉은
절창”이 되는 것이다. 그 소리의 곡진함은 울림이 강하여 “만금” 전체에 “질펀하게 번지는” 것이다. 그래서 “만금이 절창이다”.
3.
주변인의 초상과 함께 문인수 시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국면은 무위자연을 닮은 고요의 풍경이다. 이 풍경의 주인공은 앞서 살펴본 주변인들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특정한 사물이나 자연물이 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이때 사물은 동식물로 비유되고 동식물은 사람으로 의인화되곤 한다. 주목할 것은 고요의 풍경 속에는 자기 목소리가 강한 주체가 등장하여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면서 소란을 피우는 일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풍경의 주인공들은 그 풍경을 있는 그대로 구성하는 자족적 역할에만 충실하여 다른 것들과 충돌하거나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 없다. 따라서 문인수 시에서 고요는 그 자체가 자연이고 생명이다.
달빛이 늪의 물에 오래 가만히 있다.
달빛 풀리는 물이랑이, 바람 타는 갈대숲이 추는
춤, 춤 속으로 흘러들 뿐 하염없이 오래
가만히 있다. 딴 짓 하지 않는다.
으스름 아래 어디 저 집요한 소쩍새 있다.
개구리 물오리 풀벌레 소리 또한 오래
딴소리하지 않는다. 저 몇 그루 뚝버들의 시꺼먼,
산의 시꺼먼 대가리들 또한 왈칵,
재채기 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다 오래,
무슨 일이 참 많다. 이 소란한, 방대한 고요가 그것인데
누가 밤새도록 걸어놓은 양수기의 발동 소리가,
거기에 발이 툭, 걸린 내 마음까지도 다시 긴
둑길을 따라 천천히 흘러 들어간다. 딴 짓,
딴소리하지 않는다. 오래 가만히 있다.
― 「밤늪」전문
이 시의 지배적 이미지는 밤의 “늪”에 은은한 “달빛”이 비추는 가운데 잔잔한 “바람”이 부는 풍경이다. 여기에 “물이랑”과 “갈대숲”,“소쩍새”와 “개구리 물오리 풀벌레”, 그리고 “산”의 그림자와 “뚝버들” 등이 덧보태진다. 언뜻 보면 “소란”하기만 할 것 같은 이 “밤늪”이 “방대한 고요”의 세계라는 역설적 표현이 이 시의 지배소이다. 사실 “밤늪”의 “바람”이나 “물이랑”, “소쩍새”, “개구리 물오리 풀벌레” 등은 모두 소리를 내는 것들로서 “고요”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 소리들은 오히려 “밤”의 “늪”에 깃들은 고요함을 강조해 주는 구실을 한다. 먼 숲속에서 이따금씩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가 오히려 들판의 적막감을 강조해 주듯이, 한밤중에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늪”에서의 작은 소리들은 오히려 고요한 풍경을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 더구나 “달빛이 늪의 물에 오래 가만히 있다”는 정적인 분위기와 “개구리 물오리 풀벌레 소리 또한 오래/ 딴소리하지 않는다”는 순정한 분위기는 고요한 상태를 더욱 강화한다. 이 절대적인 “고요”의 풍경은 일종의 생태적 이상 세계를 표상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로 일체화되어 전일적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단순한 자연(친화)시가 아니라 본격적인
생태시로 읽을 수 있는 이유는, 시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내 마음”과 “양수기의 발동 소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등장함으로써 이 시는 본격적인 의미의 생태적 인식은 근대적 인간에 대한 성찰이나 문명세계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필요조건을 갖춘 셈이다.
앞서 등장한 “바람” 소리나 “소쩍새” 소리가 순수 자연의 소리라면, “양수기 발동 소리”는 인공 문명의 소리라고 할 수 있을 터, 이 소란스러운 문명의 소리마저 “흘러들어가”고 포용할 수 있는 이러한 고요의 경지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생태적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곳은 단순한 “고요”의 세계가 아니라 “소란한, 방대한 고요”라고 하는 역설적 세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밤늪”은 바로 생태적 원리가 지배하는 “방대한” 생명의 세계를 표상한다. 고요는 무음의 적막함이나 무생명의 침묵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인위적 소음마저도 흡인하여 감싸 안는 포용력을 지닌 것이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고요함은 자연이다(希言自然)”라고 한 것도, 고요는 무언(無言)이 아니라 “희언(希言)”이라고 했으므로 절대적인 무음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고요의 경지는 오히려 자연과 생명의 소음과 어수선함마저도 포용하는 크고 완결된 이상 세계나 우주적 생명의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다.
1) 대숲 대나무 꼭대기에 까마귀 떼가 시꺼멓다.
대나무들 우듬지가 휘청휘청 몸부림치며 날아오르려 하고 까마귀들,
커다란 열매처럼 한사코 주렁주렁 자리 잡으려 한다. 풀리지 않는다.
이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지 까마귀들 제 날개에 붙어 한꺼번에
후다닥 가볍게 떠 날아가고, 대나무들은 또 제 뿌리 짬으로 붙어 일괄시퍼렇게 와스스 돌 아온다. 에라, 마음 비운 것처럼 생멸처럼 어느명절 끝처럼 결국
만사 해결된 것처럼 고요하다. 이 곳 역시 노인들만 사는 마을,
중화리. 없는 것 빼고 컹 컹 컹 컹 다 있다.
― 「중화리」전문
2) 온 몸,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 매려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 「쉬!」부분
1)은 “중화리”라는 어느 시골 마을의 풍경이다. “대숲 대나무 꼭대기”에서 벌어지는 “까마귀 떼”의 소란과 그 이후의 “고요”가 대조적이다. 이 시의 “대숲”이 마을의 사연과 역사를 간직한 신성한 공간이라면(「갈대숲」)이라는 시에서 “너무 깊이 뿌리내려 떠나지 못하는 바람의 몸, 바람의 성대”라는 시구를 보라) “까마귀 떼”는 그 공간을 소란스럽게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 시의 초점은 “까마귀 떼”가 “자리”를 잡으려고 소란을 피우는 상태가 아니라 그 이후 “대숲” 마을이 평화로운 “고요”의 풍경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이다. “대숲” 마을은 일종의 신화적 공간으로서 잡스런 소음마저 포용함으로써 “만사 해결된 것처럼 고요하다”는 것이다. 이 고요지경은 마치 청춘의 고뇌와 욕망을 넘어선 “노인들만 사는 마을”의 분위기와 다르지 않을 터, 그곳은 “없는 것 빼고 컹 컹 컹 컹 다 있다”에 드러나듯이 평화롭고 넉넉한 공간이 되는 셈이다. 하여 “중화리”는 삶의 소란과 집착과 조바심마저 넘어서는 고요와 자족과 여유가 온전히 살아 있는 시원적이고 평화로운 삶의 터전이다.
2)의 모티브는 “환갑이 넘은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이다. 시인 스스로 “그”는 바로 정진규 시인이라고 밝힌 적이 있어서 흥미를 더하는 이 작품은 언뜻 보면 아주 평범한 가정사적인 에피소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 쉽다. 그러나 이 시는 “그”와 “그의 아버지” 사이의 부자지간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로 읽기보다는, 한 생명과 다른 생명의 소통, 혹은 한 생명의 다른 생명에 대한 깊은 애정의 차원에서 읽는 편이 바람직하다. 생명력이 소진하여 나타나는 “툭, 툭 끊기는 오줌발”을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라는 진술에는, 부자지간의 육친지정을 넘어서 사위어가는 한 생명의 회생을 염원하는 진솔한 마음씨가 담겨 있다. 오줌을 시원하게 누이려는 염원, 생명줄을 오래 이어가고픈 한 인간의 극진한 염원이 “쉬!”라는 한 음절 속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하니 그 순수하고 진지한 염원에 “우주가 참 조용”할 수밖에 없을 터, 생명을 향한 긴절한 소망 앞에 “우주”마저 고요지경에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이 고요한 순간이 바로 한 생명이 우주 전체와 상통하는 시간이다.
4.
모든 것이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이 시대에 문인수 시인은 주변적인 인물과 고요한 풍경의 세계에 주목한다. 이 역설적 관심이 그의 시가 존재하는 근거이다. 그가 그려낸 인물의 초상은 세상을 앞장서서 이끌어가는 중심적 인물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현실의 바닥을 온몸으로 살아가는 초라하고 작은 주변인들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들이 누구보다도 인생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또한 그가 그려낸 풍경은 왁자한 소리들이 크게 울려 퍼지는 소음의 세계가 아니라, 고요하고 조용한 가운데 사물과 자연이 저의 존재 의미를 진진하게 드러내는 세계이다. 그가 추구하는 주변적이고 고요한 것의 가치는 현실적, 현상적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시원적, 본질적 가치의 세계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곳이 일종의 낭만적 이상향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현실과 무관한 초월적인 세계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곳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세계로서 시인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다.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야말로 절경이다. 그래,
절경만이 우선 시가 된다.
시, 혹은 시를 쓴다는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결국
사람 구경일 것이다.
여섯 번째 시집 『배꼽』의 ?시인의 말?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는 문인수 시인의 시에 대한 생각이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나 있다.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고 할 때의 “절경”은 인간이 제거된 풍경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완벽한 자연이나 사물의 풍경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모방하는 것만으로 시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절경만이 우선 시가 된다”고 할 때의 “절경”은 “사람”을 의미한다. 이때의 사람이란 사람다운 사람, 즉 작고 초라하고 늙었을지라도 진정성을 간직한 존재를 지시한다. 그리하여 “시를 쓴다는 것”, 그것은 “사람구경”이라는 진술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때 “구경”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데, 이 말에는 그가 추구하는 시는 주체의 시가 아니라 객체의 시 혹은 풍경의 시라는 의미를 함의한다.
따라서 절경의 시학은 문인수 시의 특성을 온전히 밝혀준다. 절경의 시학은 문인수 시인이 2000년대 우리 시단에 돌올하게 빛나는 새로운 서정을 개척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시에서 절경을 구성하는 작고 초라하고 가난하고 늙은 주변인들은, 모두가 작위나 가식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착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생애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초상이 우리 시사에서 돌올한 이유는 대개 이러한 주변인들은 리얼리즘 계열의 시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면서 민중사관적
차원에서만 다루는 관행에 변화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 주변인은 어떤 행위나 목적의 대상이 아니라 저 스스로 의의를 간직한 순수한 자연과 별반 다름없는 무위적 존재로 등장한다는 점도 리얼리즘시와 다른 점이다. 이때 주변인이라고 하는 것은 탈구조주의의 용어를 빌리면 타자로서 사회적 소수자이자 인간 세계에서 소외된 자연물이나 사물까지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문인수의 시에서 어떤 사물이나 자연물까지도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받으면서 앞서 살핀 주변인다운 무위적 존재로 형상화되곤 한다.
이형권 약력 /
경기도 안성 출생. 1998년 「현대시」를 통해 평론으로 등단. 문학평론가. 「시작」.「애지」편집위원.
현재 충남대학교 교수.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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