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經
이종암
비우고 비워낸 겨울 빈 자리에
새봄 기운이 든다
대지와 가지에 봄은 기어코 올라와
촘촘히 번져가는 연둣빛 천지
장육사 가는 길 늙은 오동나무는
보랏빛 말씀들 주렁주렁 매달고
머리 굵어진 초록 중생들 앞에서
천천히 오동경 읽고 계신다
꾹꾹 눌러 제 몸에 경經 받아 적는
길 가는 봄 들판은 바쁘다
연두는 자기를 지워 초록으로 가는데
나는 나를 지워 어디로 가는가?
오동나무에 피는 오동꽃 말씀들
끝내 바닥으로 내려가 땅의
퉁소소리*로 출렁댄다
그리고 봄날이 다 간다
* 『장자』의 「제물론」에서 땅의 퉁소소리를 地籟(지뢰)라고 한다.
이 시는 이성희의 글 「평담 속에 무궁한 기운이 생동하니(하)」
(『신생』2004년 봄호)를 읽다가 시를 얻었다.
―시집『몸꽃』애지, 2010
선암사 삼인당
삼인당
이종암
선암사에는 명품이 많다
무지개다리 승선교 냄새 없는 뒤깐
또 삼성각 앞마당 길게 누운 소나무
그러나 진짜 명품은 따로 있다
절 입구 작은 연못, 삼인당三印塘
신라 승려 도선국사가 축조하여 불렀던
삼인을 나는 모른다
그저 계란 모양의 연못 그 안
또 알 모양의 섬, 알 속의 알 본다
두 그루 자미나무
물 위 가지마다 꽃불 피우는데
저 작은 꽃송이들
저마다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걸 본다
그렇지, 지구알 위에 사는 사람들
사람이 우주의 한 송이 꽃이다
―시집『몸꽃』애지, 2010
미시령 넘어 속초가는 길
하늘공책
이종암
미시령 넘어 속초 가는 길
고갯마루 지나 내리막, 막 접어든
순간,
눈 앞 능선에서 불쑥
삐죽하게 치솟은 바위
내 가슴 깊숙이 찌른다
붓
끝마다
뭘 쓰려나
아, 날 찍어 뭘 쓰려나
하늘은 다만 넓고 푸르다
―시집『몸꽃』애지, 2010
브로치
이종암
우주 어디로 가는 중인가
황금 반달
구월 반하늘에 떠 있는 반달을 보다
네게로 가는 마음 곧장 뻗고 뻗어
저 반달을 따다 네 가슴에
달아주고 싶다 문자를 보내니
어제는 소나무 가지에 있었는데
오늘은 내 가슴에 왔다고 하네
날마다 그 반달 브로치
바라보며 만지작대며 나는 잠드네
헛헛한 세상의 길 다 잠재우고
더는 다른 떠듦도 없이
빛나고 빛나는 브로치에 눈이 멀어
하늘의 반달
나는 이제 볼 수도 없겠네
―시집『몸꽃』애지, 2010
하동에서
봄날, 하동
이종암
매화 피고 나니
산수유 피고
또 벚꽃이 피려고
꽃맹아리 저리 빨갛다
화개花開 지나는 중
꽃 피고 지는 사이
내 일생의
웃음도 눈물도
행行,
다 저기에 있다
― 시집『몸꽃』애지, 2010
둥근 그림
이종암
백화점 지하 대중식당에서 늦은 점심 먹다가 보았다
기름으로 얼룩진 작업복 청년과 아직 볼이 발그스레한 앳된 여자가 구석진 자리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떡라면 먹는 여자를 쳐다보는 청년 잇바디가 다 드러나 있다 청년의 된장찌개도 나오자 그는 된장 속 두부 조각을 얹은 하얀 쌀밥 만삭인 여자 입속으로 쑤욱 밀어 넣는다. 제 입도 한껏 따라 벌어지며
아, 소리 없는 웃음으로 그려 내는
저 둥근 그림!
―시집『몸꽃』애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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