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 미네르바』 2011년 여름호 신인상
등뼈를 어루만지며 外 2편
등뼈를 어루만지며 / 김경성
종달리 해변 둥그렇게 휜 바다의 등 위에 올라앉아
내 등뼈를 어루만졌다
목뼈에서부터 등뼈를 타고 내려와 꼬리가 있던 곳까지 천천히 만졌다
오롯이 솟아있던 어린 등뼈 오간 데 없다
살집 속에 숨어버린 등뼈는 손가락으로 여러 번 어루만져야 드러났다
닿을 듯 닿지 않는
내 몸에서 가장 먼, 그대 여린 숨결 같은 불을
밝히는 등
등을 타고 흐르는
손이 닿으면 금세 젖는
나보다 그대의 눈에 더 잘 보이는
나란히 누우면 물 흘러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닿을 수 없는 강,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종달리 해변처럼 둥그렇게 잘 말아서
천천히 흐르게 하자
투 둑
강이 구부러지는 소리
투 두둑
물이 꺾이는 소리
내 안에 그토록 많은 사금파리가 들어 있었다니
하염없이 앉아서 구부러진 등뼈를 어루만졌다
흐르지 않고
상처의 틈에 고이는 물이
몸 안에서 출렁,
파랑주의보다
-시집『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2017
만 레이, 앵그르의 바이올린
각 / 김경성
오동나무 통꽃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날 나는 맨발이었다
오래전 그 사람이 걸어서 과거시험을 보러 갔던
옛길이라고 했다
아직도 먹을 갈고 있는지
계곡물은 자꾸만 음표를 그려대고
새들은 기억 속의 지도를 펼쳐서
해찰 한번 하지 않고 산을 넘어갔다
비 그친 후, 수음문자로 적어 내려간 흙길
말캉한 가상자리에 발가락으로 쉼표를 찍었다
계곡을 따라 흘러가는 옛길의 이야기는
길을 걷는 사람들이 계속 이어나갈 것이고
내가 내려놓은 문장은 각주가 없는 쉬운 말이기를 바랬다
산벚꽃 흩날리며 자꾸만 온점을 찍어대고
5막의 문설주에 기대고 있던 나는
다 읽지 못한 앞 페이지의 문장을 생각했다
길을 걷고 온 며칠 후,
무엇에 베인 듯 발바닥 지문의 결이 갈라져서 사포 같았다
부드러운 흙길 속에는
지문을 잘라버릴 만큼의 날카로운 모래의 각이 있었고
나의 몸속에도 각주가 필요한 문장이 있었다
해독하지 못한 말들을 거칠게 잘라놓은 모래의 각,
남겨진 것들이 모두 부드러운 말言이기를 바라지만
부드러운 것은 그렇게 제 마음 속 보이지 않는 틈 사이에
각이 있다
장맛비에 흠뻑 젖은 흙길
아직도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당초문 그려진 책 표지만 바라보고 있다
-시집『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2017
산란 / 김경성
그가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도
그의 마음속에 쌓아둔 것도
모두 흙 한 줌에서 시작되었다
설겅설겅 썰어놓은 짚단을 넣고 흙을 버무려서
대나무 엮은 발에 대고 벽을 쌓았다, 백 년 전의 일이라고 했다
시멘트 껍데기 한 꺼풀 벗겨 낼 때마다
풋풋한 지푸라기와 붉은 흙 살아서 꿈틀거렸다
탱자나무의, 머위의, 은꿩의다리의, 자궁이었던
아이를 낳고, 아이가 또 아이를 낳고,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의 자궁이었던
붉은 흙집 적산가옥, 산란의 눈부심을 무어라 적어야 할까
너에게로 가는 길로 들어서는 것도 흙길이었고, 강물을 거슬러서 올라갔던
은어 떼,
몸 누인 곳도
지층의 속 겹이었으니
벗어날 수 없는 산란의 감옥
한 줌의 흙이여
<등단 소감>
나는 폐허다 / 김경성
내 가슴의 흰 뼈에 돋을새김하고 있는 그대의 말들을 조금씩 꺼내서 돌에 새기고 있다.
수 천 년 후, 그보다 더 오랜 후 나는 바람의 눈이 되어 그 안에 가라앉을 것이다.
그때 세상 사람들이 걷어 올린 화석의 말들이 사랑으로 살아남아서 이 세상의 빛이 되기를 소망한다.
텅 빈 느티나무 몸속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앉아서 나무의 숨소리를 듣는다. 어디든 데려다 줄 수 있다고, 천 개의 날개를 가진 느티나무 날갯짓 멈추지 않고 파닥거리며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과 나무와 햇빛과 내가 하나의 숨이 되었다. 뜨겁다.
이제 사막으로 들어가야겠다. 일곱 마리의 낙타와 낙타를 데리고 가는 두 사람과 요리사, 안내자와 함께 바람의 옷을 입고 사막의 길을 7일 동안 걸어가면, 그곳에 누란의 왕국이 있다고 한다. 나는 오늘도 사랑으로 온전하게 남아있는 폐허, 누란의 왕국을 꿈꾼다.
폐허는 사랑으로 온전하게 남아있다. 나는 폐허다.
혼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이 세상이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이 꼭 사람과 사람과만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단단하게 하려고 시를 쓰는 것이고, 어떤 일을 행하고 난 다음에 자신에 대해서 되새김하면서 나한테 있어서 시는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며, 시를 통해서 자신을 되묻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침을 주시며, 시간의 흔적으로 가득한 오래된 길을 걸어갈 수 있게 용기를 주시는 나호열 스승님께 큰절 올립니다.
별똥별에 스친 말들이 어디쯤에서 귀를, 입술을 오므리고 있을까요. 저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몸과 마음을 열고 길 위에 오래 서 있으면 보일까요, 들릴까요, 삼킬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해낼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게 늘 위안이 되어주시는 시원문학회 문우님들, 우리시회 여러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 안에 있는 또 다른 제 자신을 찾아 나서라고 잉크와 만년필과 기차표를 손에 쥐여 주는 가족에게 참 많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심사위원 선생님. 저에게 연꽃 씨앗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로 들어가는 솟을연꽃살문 앞에 섰습니다.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제 앞에 남아 있는 날 동안 길을 걷고 또 걸으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서 저만의 말을 찾아내겠습니다. 고요하게 스며드는 은유를 찾아 나서겠습니다. 저의 혀에 갇힌 말의 씨앗들이 입술을 달싹거릴 때마다 꽃으로 피어나서 세상의 틈을, 세상의 모퉁이를, 세상의 각을 빛나게 해주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김경성
전북 고창 출생
2005년 『예술세계』신인상
시집『와온』
이메일 - goprah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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