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의 노래
뼈의 노래 / 문정희
짧은 것도 빠른 것도 아니었어
저 산과 저 강이
여전히 저기 놓여 있잖아
그 무엇에도
진실로 운명을 걸어보지 못한 것이 슬플 뿐
나 아무것도 아니어도 좋아
냇물에 손이나 좀 담가보다
멈춰 섰던 일
맨발 벗고 풍덩 빠지지 못하고
불같은 소멸을 동경이나 했던 일
그것이 슬프고 부끄러울 뿐
독버섯처럼 늘 언어만 화려했어
달빛에 기도만 무르익었어
절벽을 난타하는
폭포처럼 울기만 했어
인생을 알건 모르건
외로움의 죄를 대신 져준다면
이제 그가 나의 종교가 될 거야
뼛속가지 살 속까지 들어갈걸 그랬어
내가 찾는 신이 거기 있는지
천둥이 있는지 번개가 있는지
알고 싶어 보고 싶어 만나고 싶어
- 시집『나는 문이다』뿔 2007년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 문정희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시간의 재가 되기 위해서 타오르기 때문이다.
아침보다는 귀가하는 새들의 모습이 더 정겹고
강물 위에 저무는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 것도
이제 하루 해가 끝났기 때문이다.
사람도 올 때보다.
떠날 때가 더 아름답다.
마지막 옷깃을 여미며 남은 자를 위해서 슬퍼하거나
이별하는 나를 위해 울지 마라.
세상에 뿌리 하나 내려두고 사는 일이라면
먼 이별 앞에 두고 타오르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이 추운 겨울 아침
아궁이를 태우는 겨울 소나무 가지 하나가
꽃보다 아름다운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 아니겠느냐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어둠도 제 살을 씻고 빛을 여는 아픔이 된다.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 문정희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며
숨죽여 홀로 운 것도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을지도 몰라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으면
당신을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입술을 열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마지막처럼 고백한 적이 있다면……
한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을 두려워하며
꽃 속에 박힌 까아만 죽음을
비로소 알며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의 심장이 뛰는 것을 당신께 고백한 적이 있다면……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처음으로
절박하게 허공을 두드리며
사랑한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석류 먹는 밤
문정희
오도옥! 네 심장에 이빨을 박는다
이빨 사이로 흐르는 붉고 향기로운 피
나는 거울을 보고 싶다
사랑하는 이의 심장을 먹는 여자가 보고 싶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져서
마녀처럼 두개골을 다 파먹는 여자
오, 내 사랑
알알이 언어를 파먹는다
한밤에 일어나 너를 먹는다
.
직립으로 눕다 / 김경성
빗방울에 눌려 떨어져도 고요하다
소리지르지 아니한다
입술 같은 꽃잎, 조금이라도 넓게 펴서
햇빛 녹신하게 빨아들여
몰약 같은 향기 절정일 때
바람에 날린다 해도 서럽지 않다
직립의 시간 허물어뜨리고
낮은 곳으로 내려와 눕는다
목단꽃 떨어져도 넓은 꽃잎 접지 않는다
꽃대에서 그대로 시들어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 꽃이어도 먼 곳까지 날았던
그림자의 기억이 있다
향기 환장하게 번져나는 꽃나무 아래 서서
꽃물 배이도록 젖어들다가
아, 나도 한 장의 꽃잎이 되어
네 꽃잎 위에 눕는다
포개어진 꽃잎 위로 스쳐가는
바람 부드럽다
- 시집 『 와온 』 문학의 전당 2010
Fernando Sor, La Romanesca(라 로마네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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