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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나무 생각] 꽃 향기 싣고 온 바람 결 따라, 꽃에게 말을 걸기 위해

by 丹野 2011. 4. 4.

[나무 생각] 꽃 향기 싣고 온 바람 결 따라, 꽃에게 말을 걸기 위해

   꽃잎 안쪽으로 돋아난 꽃술과 짙은 무늬가 돋보이는 얼레지 꽃의 속살.

   [2011. 4. 4]

   바람 결에 묻어온 꽃 향기가 달콤합니다. 후각보다 먼저 달콤한 꽃 향기를 탐색한 건 시각입니다. 근시, 원시 안경을 서둘러 번갈아 가며 사방을 두리번거리게 되는 봄 날 아침입니다. 수목원의 숲에는 봄을 알리는 꽃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소리없이 봄을 불러왔어요. 올에는 꼭 한 송이만 피어난 얼레지에서부터 순백의 설강화, 샛노란 앵초와 수선화에 이르기까지 수목원 동산은 저마다의 빛깔과 향기로 피어난 봄꽃들로 가득 찼습니다.

   봄꽃 중에는 흔치 않은 핑크 빛의 꽃잎을 날아갈 듯 활짝 뒤로 젖혔습니다. 언제 보아도 마치 도도한 여인의 모습입니다. 땅바닥에 낮게 엎드려서는 고개를 외로 비뚤어야만 겨우 볼 수 있는 얼레지 꽃의 속살에는 짙은 청색의 무늬가 들어있어 더 예쁩니다. 지난 해에는 서너 송이였는데, 올에는 딱 한 송이만 올라왔습니다. 좀더 기다리면 지난 해에 피었던 얼레지도 올라올까요? 기다림은 계속 됩니다.

   한 순간 하늘로 날아갈 듯 도도하게 꽃잎을 활짝 젖혀올린 얼레지 꽃.

   처음엔 지난 해보다 개화가 늦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난 해의 답사 수첩을 뒤져보니, 비슷하거나 오히려 조금 빠른 개화입니다. 겨울이 추웠던 탓일까요? 몸보다 마음이 느낀 겨울은 잔인하리만큼 추웠습니다. 까닭에 봄을 그리워 하는 마음이 깊었던 겝니다. 구제역, 지진, 원자력. 모두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참담한 사태들이었지요. 훌훌 털고 봄마중에 나서려는 마음이 봄의 걸음걸이를 더디게 느낀 거였겠지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었다고 했던 옛 시인의 시처럼 우리도 봄을 기다리는 그리움이 어느 틈에 병이 됐던 걸까요? 봄이 더디 온 건 자연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었던 겁니다. 겨울이 아무리 촙고 잔혹했어도 어김없이 봄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찾아옵니다. 비상하려는 몸짓으로 활짝 피워올린 얼레지 꽃 송이 앞에 한껏 몸을 낮추고 가만히 봄의 속살을 눈으로 어루만져 봅니다.

   착한 소녀의 전설을 간직한 앵초.

   비교적 꽃 피어있는 시기가 긴 앵초도 노란 꽃송이를 함초롬히 피워냈습니다. 암울했던 지난 겨울을 장하게 버텨낸 생명의 노래입니다. 노란 빛에서부터 흰 색과 보라색, 그리고 한 송이의 꽃에 다양한 색을 동시에 머금고 피어나는 종류까지 앵초는 그 빛깔이 참 여러가지입니다. 그 많은 앵초 가운데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른 이 봄의 노란 앵초가 가장 싱그럽습니다. 그가 부르는 봄 노래가 더 없이 향긋합니다.

   북유럽에서는 앵초 꽃이 피어나면 운명을 지배하는 사랑의 여신 프라이야에게 봉헌했다고 합니다. 큰 병을 앓는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던 마음씨 착한 소녀가 보석으로 지은 성의 문은 이 꽃으로 열 수 있다는 따뜻한 전설도 간직한 꽃이지요. 나중에 기독교에서는 여신 프라이야 대신 성모마리아를 대치해서 '성모마리아의 열쇠'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지요.

   꽃잎 안쪽의 부관이 마치 봄 노래를 부르는 나팔처럼 돋아난 수선화 꽃.

   이 봄을 여는 꽃으로 수선화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천리로수목원의 봄 꽃 중에 수선화를 빼놓을 수는 없지요. 아직은 'Tete a tete'라는 종류의 수선화만 피어났지만, 지금부터 초여름까지 온갖 종류의 수선화가 끊이지 않고 피어날 겁니다. 대개는 진노랑 빛을 띠지만 살펴보면 흰 색에서 주황 색까지 빛깔도 제가끔이고, 생김새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다양합니다.

   활짝 펼쳐진 바깥 쪽의 꽃잎을 배경으로 가운데에 '부관(副冠)'이라고 부르는 나팔 모양의 부분은 여늬 꽃에서는 보기 힘든 수선화 꽃의 특징입니다. 이 부관은 수선화의 다양한 종류들을 서로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하지요. 어떤 수선화 꽃은 바깥 쪽의 꽃잎이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데 안쪽의 부관이 크게 발달하고, 또 꽃잎과 다른 색깔로 안쪽에서 무늬처럼 도드라지기도 하지요. 그 다양한 수선화 꽃들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새 봄의 청초함의 상징처럼 다가오는 새하얀 설강화.

   벌써 한 달도 더 지난 2월 말쯤 피어났던 설강화는 이제 지천으로 흐드러졌습니다. 겹꽃으로 피어나는 설강화는 겨우 꽃잎을 열기 시작했지만, 이미 피어난 설강화와는 서서히 작별을 준비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도 봄이 성큼성큼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봄은 슬그머니 여름에게 숲의 주인공 자리를 내어줄 준비를 합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가 이 봄을 더 찬란하게 맞이하기 위해 꽃에게 말을 걸어야 할 때입니다. 오늘 늦은 밤, KBS-1TV '낭독의 발견'이 마련한 '꽃에게 말을 걸다'라는 주제의 프로그램에서는 저도 나섰습니다. 한복 짓는 이효재 님, 꽃 그림 작가 백은하 님과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밤 12시 35분에 방영하는 이 프로그램에서 봄 꽃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보세요. 저도 화면에서 봄마중에 나선 여러분들께 살짝 인사 올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