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시간 세계에 기입된 존재와 관한 두 음영
김 석 준
하이데거가 끝까지 자신의 철학 속에 물고 늘어진 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 존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그 이면을 상세하게 들여다보면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왜 시간인가. 존재 그 자체도 시간이고, 형이상학이 생성되는 단초도 시간 내부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학도 그렇고, 시말의 내접면도 시간이다. 나호열의 『눈물이 시킨 일』도 시간이고 이종문의 『정말, 꿈틀, 하지 뭐니』 도 시간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시간을 살아낸 각각의 존재의 내밀한 문양이 다르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 고유한 시말운동이 있고, 세계가 있다. 나호열 그것이 잠언적이고 성찰적인 태도 위에 기반하고 있는 시말운동인 반면에, 이종문의 그것은 다양한 일상적 존재가 펼쳐내는 잔상들을 섬세한 시선으로 시말화하고 있다. 이를테면 나호열의 그것이 존재의 심연을 응시하는 눈물 글성이는 말의 표정이라면, 이종문의 그것은 현상의 배후에 도사린 따스한 인간학적 표징이다. 비록 시말이 가닿은 언어의 접촉면은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따라서 시말과 시말 사이에 거대한 낙차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양자 공히 시말 속에 응고시킨 말의 절대값은 동일하다. 말하자면 두 시인 공히 인간학의 앞뒷면에 자리한 존재의 음영을 서로 다른 언어적 층위로 육화시켰다 하겠다.
1. 잠언적 사유 혹은 말의 위치
나호열의 금번 상재한 『눈물이 시킨 일』은 독특한 시적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의 문신”( 「참, 멀다」 중) 전체를 “0 그램의 허무”( 「운동 후기」중)로 키질하면서, “어디든 세상의 중심”(「세상의 중심」중)이 있음을 예증하고 있다. 때론 “생을 빠져나가는 출구”( 「밤과 꿈」중)어디쯤에서 방황하고 배회하면서 때론 “이 세상에 종점은 없다”(「 종점의 추억」중)는 사실을 직감하면서, 시인 나호열은 눈물이 생성시킨 잠언적 전언을 시말 속에 응고 시키고 있다. 따라서 나호열의 그것은 “평생을 헤매다/배운 말”(「사이」중)과 그 “말 속에 숨어 있는 슬픔”(「말 배우기」중)을 예인하는 시말운동에 다름 아니다. 말은 눈물이고, 눈물은 이 세상의 지난한 표정이다. 어쩌면 시인에게 삶 시간 세계란 “오늘도 아우슈비츠를 지나 ”( 「가운데 토막」중)다가, “잠깐이라도 천사가 되고 싶”(「꽃들은 달린다」중)순정한 의식의 편린들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호열의 시살이 전체는 “눈물”이라는 심급이 만들어낸 행위들에 관한 ‘수많은 주석들“(「나무」 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눈물은 말의비등점이자, 말이 시말로 형질전환되는 원초적 질료이다.
먹고 먹히되
승자와 패자가 없는 곳
서로가 서로의 양식으로
몸을 내어주는 곳
값싼 동정의 눈물이 조금도 용납되지 않는 곳
- 「세렝게티의 추억」 일부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가 늘 고민거리이고, 문제의 중신에 위치해 있다. 시간도 휘고, 세계도 휘어져 그 모든 것들이 아포리아에 이입하게 될 때, 삶은 무엇이고, 또 존재는 어떤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가. 눈물이고 슬픔이다. 삶 시간 세계란 먹이사슬이다. 거기엔 이유도 없고, 분명한 목적도 없다. 다만 그저 주어졌기에 존재할 따름이다. 그런데 시 「세렝게티의 추억」은 저 거대한 자연 내부에서 행해지는 일련의 존재운동을 졸렌( Sollen)의 관점이 아니라, 자인(Sein)의 관점으로 서술하면서 “눈물”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다. 원근법적 관점에서 볼 때, 저 “세렝게티”초원은 “평화로운 한 장의 그림엽서”로 비춰지겠지만, 시인 나호열은 “꿈의 이면”으로 치고 들어가 자연이 펼쳐내는 내밀한 법칙을 응시하고 있다. 자연은 엄존하는 현실이다. 따라서 자연은 냉혹하다. 거기엔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다. 다만 거기엔 “먹고 먹히”는 관계만이 있을 따름이다. 마치 앨런 와츠가 『 물질과 생명』에서 말한것처럼, 삶 시간 세계란 에너지의 순환운동이다. 때론 “서로가 서로의 양식”이 되는 저 처연한 운명을 승인하면서, 때론 세렝게티 초원의 평화로운 공존을 몽상하면서, 생에의 그 모든 운동이 무로 수렴하는 바로 그 자리에 존재의 의미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존재란 무의 운동이다.
이 세상의 모든 말들은
꽃에서 태어나서 가슴에서 죽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말을 가르치지만
그래서 침묵을 배우는 일은 더디고 힘든 일
- 「파문 波紋」 일부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 있다
나는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 「눈물이 시킨 일」 일부
당신이 듣고 싶은 말
내가 하고 싶은 말
그러나 그 말은 너무 멀리 있네
- 「사랑해요」 일부
존재를 지시하는 것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니다. 존재의 존재성은 말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는 옹색하다고 믿어지는 그 말을 통하지 않고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른다. 말 내부에 존재가 있고 세계가 있다. 말은 존재의 실체이다. 말은 존재의 선험적 가정이다. 그런데 나호열의 시 「파문 波紋」은 말과 침묵 사이를 꽃과 씨앗으로 비유하면서, 말의 존재론적 문양을 가늠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시말이란 무엇인가. 존재의 집, 즉 세계이다. 비록 그 말이 어리석음을 자인하는 과정으로 수렴하기는 하지만, 따라서 우리는 그 말해진 말을 “침묵”으로 휘어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도록 되어있지만, 말은 “파문”을 일으키는 “번역”의 세계이자, 세계의 의미가 고스란히 간직된 기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를 말로 번역하게 된다. “어린 아기의 첫 울음”도 말로 번역되고, “소나무의 정적”또한 말로 번역된다. 그것은 역으로 말이 곧 세계의 파문이라는 말을 성립시킨다. 설령 그 모든 말의 표징들이 침묵으로 휘어지는 운동일 때조차, 우리는 인간학 내부를 번역된 말로 가득 채우게 된다.
말해진 모든 말들이 의미로 중첩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그것이 잠언적 “경전”일 때, 말은 생에의 의미를 늘 새롭게 현동시키게 된다. 경전은 “다시”의 욕동이다. 경전은 “꺼꾸로”다. 따라서 경전은 삶 시간 세계를 “사랑”으로 포월하는 “꿈”의 지대이거나 새로운 완성에의 요구이다. 특히 시 「눈물이 시킨 일」은 말의 심연에 자리한 진리의 자리를 되비추면서 말 의미를 새롭게 현동시키고 있다. 비록 나호열의 시말길 전체가 말의 토포스 내부에 사랑과 눈물의 전언들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말들은 휘고 또 휘어 말 함수 전체를 진리 함수로 대변하게 된다. 때론 “하루”라는 첨예한 시간의 도정 위를 분주하게 건너면서 때론 영원이라고 믿어지는 정전적 의미의 지대를 참구하면서, 시인은 『눈물이 시킨 일』전체를 사랑의 전언으로 충일하게 만든다.
시인에게 말은 눈물이고, 사랑이다. 설령 그 “사랑해요”라는 말이 너무 멀리 있어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눈물이 말로 휘면, 그 말은 “영혼”이 되고 사랑이 된다. 따라서 나호열에게 말은 인간학적 체취나 열도가 기입된 그리움의 대상이거나 시간이 만든 “슬픔”의 기표이다. 그런데 문제는 말의 휨 작용이다. 아니 나호열의 금번 상재한 『눈물이 시킨 일』전체는 그 모든 의미의 층위를 사랑 쪽으로 휘어 “사랑해요”를 연발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 시인의 사상이 전체가 삶 시간 세계에 기입된 존재의 문양들을 아포리아로 휘어지게 만든 것처럼 보여지기까지 하지만, 말의 운동은 존재의 내밀한 사랑을 육화시키면서 이 세계가 사랑의 실체였음을 예증하고 있다.
계간 <<문학마당>>( 2011년 봄호)
김석준
1999년 <<시와 시학>>(시), 2001년 <<시안>>(평론) 등단. 시집 『기침소리』, 평론집『비평의 예술적 지평』, 『현대성과 시』, 『감히 시인에게 말을 걸다』, 『무덤 속의 시말』이 있다.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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