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적 한웅큼
면벽面壁
돌아 왔습니다
침묵 앞으로
적막 속으로
나지막히 인사 합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얼굴 씻고
흐린 세상
바라본
눈도 꺼내어 씻고
무심코 만졌던 탐욕
두 손을
마지막으로 씻었습니다
침묵 앞에 무릎 꿇습니다
적막 속의
길로 들어섭니다
돌아 왔습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준 것은 정적이다. 나는 가끔 그에게로 가서 정적과 몸을 비빈다. 정적은 단순한 숨죽임이 아니다. 정적은 운동의 정지가
아니며, 페허의 잔영이 아니다.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삶의 원동력이 되는 숨결이 그 속에 있다. 언어의 그물을 뚫고 나오는 싹이며 가장 보잘 것
없는 생명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다. 건봉사나 회암사 절터 폐허에서 만나는 정적은 참 아름답다. 신 새벽 황토 숲길에서 만나는 정적이나, 이별을
예감하며 잠깐 깜박거리는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도 아름답다. 내년에 꽃 피우기 어렵다고, 장담 못한다고 누구의 스승이 되지도 못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라고 제자가 보내온 호접란 한 盆이 두 달이 넘도록 꽃 피어 있는 모습을 몇 시간을 싫증내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정적의
힘이다.
정적은 건너갈 수 없는 강이며, 너무 높아 올라갈 수 없는 산이며, 아직 읽어낼 수 없는 삶의 경전이기도 하다.
나는
정적을 덮기도 하고, 발길로 차기도 하며, 정적을 펼쳐 세상과 장막을 치기도 한다. 정적으로 밥을 먹고, 정적의 향기를 맡고 풍선처럼 정적을 이
똥막대기에 가득 채워 스모그 가득한 하늘 위로 밀어보기도 한다.
그가 나에게 준 것은 정적이다. 정적과 대화를 해보았는가? 영어, 일어, 중국어 어느 언어로도 정적과 대화를 할 수는 없다. 수화나 점자를
동원해도 그것은 마찬기지이다. 도(道)라고 해도 기(氣)라고 해도, 열반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 정적은 내가 인식하는 만큼만 나에게로 온다.
부피로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부피로, 무게로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무게로, 너비로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비로 다가온다.
그 정적은 나이가 마흔 아홉이고, 66 킬로그램의 무게와 173센티미터의 신장을 가졌다.
'나호열 시인 > 세상과 세상 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유화 / 원시적인 언어로써 지향하는 우주적인 삶의 원리 (0) | 2011.07.28 |
---|---|
고흐의 낡은, 혹은 구두 / 나호열 (0) | 2011.04.10 |
梅花를 생각함 / 나호열 (0) | 2011.03.27 |
삶 시간 세계에 기입된 존재와 관한 두 음영 / 김석준 (0) | 2011.03.23 |
인간의 겉과 속을 잇는 사랑의 탐구 / 나호열 (0) | 2011.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