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내 시에 영감을 준 여행, 여행지-① |
교통수단의 발달과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1990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여행은 보편화와 대중화의 단계를 넘어 전문화, 특성화, 예술화의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우리 시와 시사 속에서도 여행은 시인들의 정서, 의식, 언어, 리듬, 상상력 등을 바꾸어놓을 만큼 중요한 시적 기제機制로 작용하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 여행은 어떤 의미일까? 이번 호 기획특집으로 마련된 <내 시에 영감을 준 여행, 여행지>는 갇힌 일상에서 벗어난 시인들이 낯선 시공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어떻게 시로 담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여행은 시인에게 위안과 함께 아름다운 삶의 서사를 느끼게 하며, 잊혀지지 않는 시상詩想을 꿈처럼 건네준다. 일상의 짐을 잠시 벗어 놓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나는 여행은 지금-여기의 시공을 벗어나는 영혼의 날개가 되기도 하며, 바깥을 떠돌던 자아가 지금-여기라는 삶의 심층으로 다가서는 한 순간이기도 하다. ―― 편집자 [1] 제주도의 시 허 만 하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시작한다 ―― 정방폭포에서 낯선 지형이 풍경이 될 때까지 날개를 젓는 새.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여는 날개를 위하여 하늘은 있다, 하늘은 해맑은 가을의 깊이를 위하여 있다. 빈 하늘에 걸려 있는 눈부신 옥양목 한 필. 길이 없는 땅 끝에서 물줄기는 수직으로 선다. 냉혹한 낙차를 부들부들 떨며 떨어지는 물소리. 일거에 몸을 던지는 결단의 수위를 위하여 아슬아슬 한 뼘 더 높이 날아오르는 시 한 줄의 외로운 높이. 제주도의 자연은 이국적이었다. 제주도를 처음 찾아보았던 것은 졸시 「성산리에서」(시집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에서 밝혀져 있다시피, 1985년 8월 5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공항을 벗어나는 길 가로수는 협죽도였다. 그 분홍색 꽃빛깔은 아직도 내 기억의 길섶에 피어 있다. 그때 며칠을 묵었던 그랜드호텔 둘레만 하더라도 멀리 지평선을 거느린 한정한 풍경이 살아 있었다. 어떻게 바쁜 시간 틈을 얻어, 아내와 둘이서 ‘소박한’ 시절의 제주도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일출봉 정상에 올랐었다. 앨범에는 분화구를 둘러싸는 삐죽삐죽한 바위들과 먼 수평선 물빛과 산자락의 느긋한 풀밭이 담겨 있었다. 몹시 더운 날이었다. 나는 목이 말랐었다. 제주도의 바람과 햇빛을 처음 만나보았던 것은 나의 뇌출혈 발병 전의 일이었다. 그때의 신선한 감동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아름답게 살아 있다. 거동의 자유를 잃은 나는 그 후에도 아이들 권유로 몇 차례 이 섬을 찾아보았으나 제주도는 옛날의 소박함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이번 청탁에 따라, 지난 시편들을 살펴보고 느낀 것은 의외로 제주도(우도 포함)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겨울의 산방산 자락에서 피어나던 금잔은대 수선화의 황홀한 향기에 놀랐던 시를 소개하고 싶었지만 지나치게 긴 산문시라, 정방폭포에서 모티브를 얻은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시작한다」를 소개하기로 한다. 정방폭포에 내려서기 전에 갈치 요리로 이름나 있던 한 꾸밈새 없는 음식점에 들렀던 일이 자욱한 물보라 소리 넘어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 집에서 갈치 회를 처음 맛보았던 것이다. *잊지 못할 여행지 3곳 : 강원도 오대산 일원, 경상북도 부항재 고개, 전라남도 운봉길(운봉에서 경북 남원에 이르는 지리산 북쪽자락 길) 허만하 = 1932년 대구 출생. 1957년 《문학예술》로 등단. 시집 『해조』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야생의 꽃』 『바다의 성분』 『허만하 시선집』 등과 시론집 『시의 근원을 찾아서』, 산문집 『길과 풍경과 시』 등이 있음. 이산문학상, 청마문학상, 육사시문학상, 목월문학상 수상. [2] 사랑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 믿으면 마 종 기 파타고니아의 양 거친 들판에 흐린 하늘 몇 개만 떠 있었어. 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은 믿어보라고 했지? 그래도 굶주린 콘도르는 칼바람같이 살아 있는 양들의 눈을 빼먹고, 나는 장님이 된 양을 통째로 구워 며칠째 먹었다. 어금니 두 개뿐, 양들은 아예 윗니가 없다. 열 살이 넘으면 아랫니마저 차츰 닳아 없어지고 가시보다 드센 파타고니아 들풀을 먹을 수 없어 잇몸으로 피 흘리다 먹기를 포기하고 죽는 양들. 사랑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고 믿으면, 혹시 파타고니아의 하늘은 하루쯤 환한 몸을 열어줄까? 짐승 타는 냄새로 추운 벌판은 침묵보다 살벌해지고 올려다볼 별 하나 없어 아픈 상처만 덧나고 있다. 남미의 남쪽 변경에서 만난 양들은 계속 죽기만 해서 나는 아직 숨겨온 내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파타고니아는 남아메리카의 남쪽, 남위 40도 정도에 있는 콜로라도 강 이남의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남부를 통칭한다. 재작년 9월, 우리 일행은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며칠을 지내고 항공편으로 더 남진하여 칠레의 작은 항구 도시이고 파타고니아에 속하는 푸엘토 바라스에 도착했다. 활화산이 웅장한 모습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이 항구에서 현지인들이 에리조스라고 부르는 싱싱한 성게를 안주 삼아 우리는 맛있는 백포도주를 밤새 마시기도 하였다. 얼마나 크고 싱싱하고 값싼 성게를 매일 먹었는지! 며칠 후 아침 일찍, 일행은 이 아름다운 도시를 떠나 눈 덮인 안데스 산맥의 남쪽을 넘어 아르헨티나 쪽의 바리로체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버스와 배를 몇 번씩 갈아타고 산의 정상 근처에서는 타이어에 쇠줄을 단 무개차도 타고 아찔하게 잠깐씩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그리고 한 시간 정도는 엄청난 눈더미 속을 힘겹게 걸어서, 평지 같으면 한두 시간 정도의 자동차 거리를 무려 12시간 걸려 산을 넘었다. 이 힘든 하루는 그러나 내게는 너무나 감격적인 체험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정신없는 혼돈 속에서 힘들게 공부했던 오래전 의대생 시절, 내게 유일한 친구같이 나를 잡아주고 용기를 준 소설가 생 떽쥐뻬리의 『인간의 대지』에서 주인공인 조종사 기요메가 조난 후 오래 눈 속을 헤매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바로 그 안데스 산맥이어서였다. 세계적인 스키장이고 파타고니아의 일부인 바리로체에서 며칠을 보낸 후 우리는 지프 차를 타고 더 남진하여 광활한 파타고니아에 푹 들어섰다. 하루 종일을 달려도 두서없이 버려진 것 같은 들판은 너무 넓어서 끝이 없고, 계속 흐리기만 한 하늘 역시 점점 더 넓어져서 언제 이렇게 넓고 춥고 어둡고 절망적인 하늘을 본 적이 있었던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거기에 또 다른 무서움의 정체는 땅 위의 짐승을 노리면서 흐린 하늘을 쉼 없이 날고 있는 독수리보다 크고 무서운 콘도르 떼였다. 우리가 묵게 된 곳은 허술한 목장이었는데, 끼니때마다 우리는 콘도르에게 눈을 빼앗겨 죽어야 했던, 장작불에 구운 즉석 양고기 구이를 먹어야 했다. 나는 그 며칠 양고기만 먹어서인지 온몸이 자꾸 아파왔다. 그래서 나는 여행 중 어느 작은 성당에서 읽고 마음에 다가온 한 구절, 당신이 비록 사랑을 느끼지 못하며 산다고 해도 세상 어딘가에는 반드시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던 말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왠지 나처럼 외로워 보이던 그 춥고 흐린 하늘을 계속 올려다보면서 지냈다. *잊지 못할 여행지 3곳 : 경남 함양의 상림, 전남 강진군, 충남 서산의 개심사 마종기 = 1939년 일본 출생. 1960년 《현대문학》 시 추천 완료. 시집 『조용한 개선』 『두 번째 겨울』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이슬의 눈』 『그 나라 하늘 빛』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등과 산문집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 등이 있음.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편운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수상. [3] 칼을 찾아라! 정 진 규 尋劒堂에서 名山엘 들면 보인다 어김없다 端緖를 잘 잡고 서 있는 봉우리가 하나씩 있다 붓끝과 같다 하여 그 첨단을 筆峰이라 이른다 너의 단서에 내 혀를 나의 단서를 처음 댔을 때 그토록 와서 닿았던 우주의 뜨거운 律端, 떨리던 필봉과 필봉 그게 모든 사물들에게도 꼭 하나씩 꼭지로 솟아 있다고 믿는 但書로 나의 시들은 그간 씌어져 왔음을, 내 사랑의 단초도 그러하였음을 시력 좋은 분들은 찾아 읽었을 것이며, 그것이 그저 但書로 끝나고 있는 것들 또한 추려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 요새는 도처에 잡히지 않는 端緖 투성이다 보이지 않는 것 투성이다 나도 애를 먹고 있다 백내장 수술도 했다 했으나 神通치 않다 헛것만 보인다 筆峰이 솟지 않는다 어제 오늘 내리는 亂紛紛의 春雪들 눈송이 하나하나에도 端緖가 있는 법이어서 저리 亂紛紛을 지으는 것인데 형상을 보이는 것인데 그 속에서도 산수유꽃 노오랗게 치를 떠는 것인데 나도 치를 떠는 것인데 우수 경칩도 지났다 지척인 봄, 어디 갔느냐 심증은 잡았다 물증을 잡아야 하리 단서를 얽은 단서를 끊어내야 하리 다른 길 없다 尋劍이다 칼을 찾아라! 어느 해 이른 봄 춘설春雪 난분분亂紛紛턴 날 충남 수덕사修德寺행을 했다가 그 절의 말사 개심사開心寺의 요사체 심검당尋劒堂에서 잠시 쉬었던 적이 있다.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654년)에 창건, 중창과 중수의 과정을 거쳤다 하나 보기 드물게 임란 때도 전화를 입지 않은 사찰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절이다. 특히 대웅보전(보물 제143호)과 심검당은 여늬 절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모습의 것이 아니다. 심검당이 더욱 그렇다. 기둥 하나 서까래 하나에서도 자연 그대로의 역사의 향훈을 체감할 수가 있어 아하, 시간의 영원성이란 게 바로 저런 것이로구나 하는 느낌을 깊게 가지게 된다. 심검당尋劒堂, 마음의 칼을 찾아주는 집. 불가에서 말하는 그 칼은 어떤 칼인가. 그곳 심검당 마루에 걸터앉아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 명상에 젖었다. 이곳에만 심검당이 있는 게 아니었다. 절을 다니다 보면 심검당 편액을 이곳저곳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해인사에서도 만난 기억이 있고, 통도사에서도 오어사에서도 보았는데 ‘칼’이라서 그랬는지 편액 글씨가 모두 무서울 정도로 단호했었다. 그 칼은 어떤 칼일까 나는 말 그대로 심검尋劒의 명상을 이어갔다. 분명 살생殺生의 칼은 전혀 아닐 터, ‘반야검般若劒’이란 말이 떠올랐다. ‘반야般若’란 두루 아시다시피 통합, 통찰로 본성本性에 이르는 불이不二의 세계. 어떻게 그러한 세계가 칼의 속성과 일치할 수 있는가. 한참 생각해 보니 그 칼은 ‘반야’에 이르는 길을 막는 번뇌를 거두어내는 예리한 마음의 칼이었다. ‘심우尋牛’의 ‘우牛’와도 다를 바 없었다. 본성本性의 실체를 상징할 수도 있었다. 모든 깨달음은 제 안에 자연 생성되어 있는 것과 몸으로 만나질 때 그 실체가 보이는 법, 그즈음 나는 나의 본성을 가로막는 바깥의 상황들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 어두움들로 반야검의 소재를 찾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수덕사행도 그로부터의 해방을 꿈꾸었던 그야말로 심검尋劍의 여행이었던 셈이다. ‘맞아떨어진다’는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위의 시에 나오는 ‘단서端緖’를 원초적 실마리, 바로 본성으로 읽으면 저러했던 나의 번뇌를 금방 요해了解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필봉筆峰’은 또한 본성의 핵으로 그러한 핵의 만남을 사랑의 절정으로 불이不二의 극단極端으로 상징화하여 전개를 한 것이 위의 시라고 읽으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끝으로 부언코자 하는 것은 과연 여행시라는 장르가 무리 없이 성립할 수가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조금 회의케 하는 바가 있다. 여행을 통해서 대상을 만나고 시의 깨달음이 올 수는 있는 일이지만 그렇게 장르화하면 시의 영역이 좁아지고 틀에 매이는 느낌이 없지 않아서이다. 대부분의 나의 시는 공간의 이동을 통해서 얻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하긴 길든 짧든 넓든 좁든 모든 공간의 이동은 여행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어찌하였든 위의 시는 수덕사 여행길에 만난 개심사 요사체 심검당에서 발단된 한 편의 소산이다. *잊지 못할 여행지 3곳 : 해남 보길도(고산 유적지), 제주 모슬포(추사 유허지), 경주 남산(석불군) 불국사, 석굴암 정진규 = 1939년 안성 출생.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마른 수수깡의 平和』 『몸詩』 『알詩』 『本色』 『껍질』 등이 있음. 한국시협상, 월탄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 등 수상. 문화훈장(보관) 수훈. [4] 황사바람 뚫고 열 시간 산행 이 성 부 황사바람이 쓸 만하다 ―― 내가 걷는 백두대간 109 철없는 봄눈 쌓여 산책길을 지워버렸다 대낮인데도 해는 흐지부지 떠서 어디 아편 맞은 하늘처럼 온통 게슴츠레하다 황사 데불고 온 성난 바람이 나를 눈물콧물 흐르게 하고 산골짜기 모두 가려 먼 데를 볼 수 없다 동서남북 어디인지 가늠을 못하는데 내 안에 잠자던 도발끼가 파르르 눈을 뜬다 불확실성이야말로 나를 틔우는 첫 번째 힘이다 몇해 전이던가 이 등성이에서 꼭 이 무렵에 야간행군하던 젊은이들이 많이 죽었다 전쟁이 사라진 뒤 오십 년이 지났어도 적 없는 전쟁은 여기까지 올라와 사람들을 쓰러뜨렸다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 산 위에서도 적지 않아 그 사연들 더듬어 나도야 간다 지도와 나침반과 표지기를 좇아 이리저리 헤맨 지 네 시간여 민두름한 정수리 편편한 곳에 이르렀다 하늘도 세상도 모두 한통속인 찌푸림이어서 그 가운데 서성이는 내가 나도 두렵다 황사는 모래먼지 안개뿐만 아니라 저의 꿈도 보듬고 바다를 건너와서 쓸 만하게 나를 이토록 더 나아가게 함이여 *표지기 : 산길을 알리기 위해 나뭇가지에 매달아놓은 리본. *민두름산 : 충북 영동군과 전북 무주군 경계의 민주지산(해발 1241m)의 다른 이름. 충청도 쪽에서 보면 민두름하게 보이므로 붙여진 우리말 이름인 듯. 백두대간은 우리나라 땅의 깊은 곳에 솟아 있는 가장 형세가 큰 산줄기 이름이다. 백두산으로부터 남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북한 땅을 거쳐 남한의 향로봉·설악산을 지나 지리산까지 이르는 한반도의 척추라고 할 수 있는 산줄기를 가리킨다. 이중 남한쪽(진부령-지리산) 도상거리圖上距離가 690km, 실제 걷는 길로는 800km가 훨씬 넘는 거리로 잡으면 된다. 1990년대부터 산에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 일기 시작한 백두대간 종주가, 2000년을 전후하면서부터는 붐을 이루다시피 했다. 나는 1990년대 중반 직장에 다닐 때부터 드문드문 백두대간 구간을 잘라서 종주했는데, 처음에는 길춘일 씨(『71일간의 백두대간』 저자)가 운영하는 산악회를 따라다니는 무박여행(토요일 밤에 서울을 떠나 일요일 하루 산행을 하고 돌아옴)이었다. 그러나 이 무박여행은 산행 시작이 랜턴 불빛에 의존하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진행되는 강행군이었으므로, 아무것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슴프레 날이 밝아지면서부터라야 비로소 나는 산을 보았고 느꼈고 생각할 수 있었다. 내 고향 무등산이나 서울 근교의 산들과는 달리, 대간의 산길들은 낯설고 새로웠고 깊고 야성적이었다. 나의 체질에 딱 알맞는 산길이라고 판단되었다. 1998년 직장생활을 마치고 나서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대간 구간종주에 들어갔다. 혼자서도 대간종주에 나섰으나 그때마다 교통편이 불편하고 경비가 많이 들었다. 오랜 시간 깊은 산속을 혼자 걸어야 하는 두려움과 외로움도 있었다. 그래서 후배시인 김영재·윤경덕을 끌어들였다. 느긋하게 토요일 오후에 서울을 떠나 산 아래 민박집에서 잠을 자고, 일요일 동이 틀 무렵부터 산행에 들어갔다가, 7~8시간 또는 10여 시간 산행하고 그날로 서울로 돌아왔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산중에서 텐트를 치고 일박하는 때도 있었다. 무박과는 달리 처음부터 산행에서 만나는 풍경과 사물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어 좋았다. 「황사바람이 쓸 만하다」는 김영재와 함께 민주지산-삼도봉을 할 때 얻은 작품이다. 사상 최대의 황사였다는 그날, 우리는 10여 시간 동안 산속을 뚫고 나아갔었다. 역경은 때로 사람을 성숙시킨다. 그리고 도전을 촉발시켜 더 나아가게 함으로써 목표를 앞당기게 만들기도 한다. 황사바람이 ‘쓸 만하다’는 까닭이다. *잊지 못할 여행지 3곳 : 지리산, 전남 강진, 경남 통영 이성부 = 1942년 전남 광주 출생. 1962년 《현대문학》 추천완료 등단. 시집 『우리들의 양식』 『백제행』 『야간산행』 『지리산』 『도둑산길』 등 다수.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대산문학상 등 수상. [5] 어느 전생에 나 거기 살면서 유 안 진 반월성터의 달 신라의 궁터에 초승달이 뜨다니 반월성 터인데 어찌 초승달인가 시작이 반이라 하여 반월성半月城이었단 말인가 천년도 짧아서 반달에 그치었으니 초승달로 새로 시작한다는 뜻인가 천년 전의 달빛에도 오늘의 술은 잘도 익어서 구름에 달 가듯이 나그네는 왔다가 갔고 천관녀도 을화로 환생되기도 했었지만 거렁뱅이 지귀志鬼 가슴에다 사랑을 불질렀던 선덕여왕의 팔찌만큼 둥근 달은 떠오른 적 없었는가 사국四國을 통일했어도 기껏 반달이었다고 못 다한 부채負債는 그대로 물려져 기어코 만월滿月을 채워내야겠다는가 초승달 어린 몸이 겁도 없이 저 혼자서 어두운 저녁 하늘을 실눈 뜨고 가고 있다. 이 시는 스승 목월 기념관 개원행사에 가서, 천년 신라의 궁궐터 반월성터에서 갓 떠오른 초승달을 보며, 신라가 만월滿月을 지향하여, 지은 반월상半月城이란 이름에서 모티브를 얻어 썼다. 가야 백제 고구려와 신라의 4국통일四國統一로도, 만월에 못 이른 신라 천년이었다. 석양의 여광餘光이 아직도 훤한 초저녁, 반월성터에서 본 초승달은, 만월을 못 이룬 천년 신라의 한스러움과, 모종의 사명을 부채처럼 물려받고 태어난 아장걸음 증손자 같았다고나 할까. 「안동소주」는 임하댐 수몰 직전 집안 행사에 가서 썼다. “이 풍진 세상을/아모리 아모리/저 세상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해도/때없이 맞닥치는/겨울비 같은 좌절과 낭패를/들켜지고 마는 굴욕과 수모를/불 싸질러 흔적 없이 사르어 주는/45도 화주火酒 안동소주/사나이의 눈물 같은/피붙이의 통증 같은/첫사랑의 고백 같은/내 고향의 약술 그 얼로 취하여/이 풍진 시대로/저 시대의 너털웃음 웃어가며/성큼성큼 건너뛰며 나 살으리”인데, 발표 몇 년 뒤에 태어난 안동소주 회사가 어찌 알았는지, 광고료로 소주를 보내주어 마시고 기분 쨍했다. 「춘천春川은 가을도 봄이지」는 춘천 갈 때마다 지명 춘천春川에 감동되어 썼는데, 우수작품으로 뽑혀 100만 원이나 받았고, 춘천시에 초청되어 과분한 대접도 받았다. 지난 세기말 광주 문학행사에 갔다가 담양대숲을 구경하고 「담양 참대밭에서」도 쓴 적 있어, 받은 대접에 부담감이 덜어지는 기분도 들었다고나 할까. 나에게는 여행지가 선물하는 시상詩想으로, 고향 이상의 인연이 되곤 한다. 따라서 나에게는 여행이야말로 신작과 마주치는 우연을 선물하는 미래의 고향이다. 가슴 두근거림으로 기다려주는 낯선 곳들이여, 어느 전생에 분명 나 거기 살면서 사랑하여 울었노라고. *잊지 못할 여행지 3곳 : 경남 마산시 가포바닷가, 전북 전주의 덕진호수, 울산의 장생포항구 유안진 =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달하』 『봄비 한 주머니』 『다보탑을 줍다』 『거짓말로 참말하기』 등이 있음. 정지용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월탄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등 수상. [6] 내 생의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나이테 문 정 희 율포의 기억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꿇는 것일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율포는 나의 외가이다. 눈물 많고 주름살 많은 외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외가 식구들은 율포를 순 우리 말로 밤개라고 불렀다. 밤개의 식구들은 모두가 따스했다. 붉고 큰 새우를 삶아 놓고 모두 둘러 앉아 함께 먹었다. 바닷가 아이들은 뻘 묻은 손으로 내가 입은 간딴꾸(일본말로 간단한 옷, 즉 원피스)와 자줏빛 우단으로 만든 모카신을 만져보곤 했다. 한없이 철석이는 바다, 갈매기와 파도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바다가 밀려나가면 거기 퍼덕거리던 낙지, 꼬막, 조개와 게들…… 율포는 그때 나에게 니르바나였다. 햇살에 발갛게 그을린 피부를 가진 외가집 친척들은 나를 끔찍이도 사랑했다. 무어든 보여주고 싶어 안달했다. 그러다가 어느 핸가 여름 감기에 걸려 난생 처음 주사를 맞은 것도 율포이다. “솔나무 끝으로 살짝 쑤시는 것 같다”는 말에 홀려 주사를 맞았는데 너무 아파서 오래 울었다 . 지금도 율포를 떠올리면 나는 말 못할 황홀과 슬픔을 함께 느낀다. 바다에 나가 소식이 없는 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무당이 춤을 춘 자리에 놓여 있던 붉고 푸른 재…… 으스스한 표정의 장승과 노을처럼 길게 퍼져가던 서편제 가락…… 내 생의 깊은 곳에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나이테로 자리잡은 율포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얼마 전 오랜만에 율포에 갔다. <길에서 읽는 한국 시>라는 특집을 위해 한 신문사 담당자와 함께 떠난 취재 여행이었다. 마침 비가 오고 있었고 바다는 거기 그대로 놓여 있었지만 내 마음의 율포는 보이지 않았다. 소나무 사이로 난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돌아서니 어느새 다가왔는지 짙은 해무海霧가 나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릴 뿐이었다. *잊지 못할 여행지 3곳 : 광주 무등산, 경북 군위 인각사 , 전남 화순 운주사 문정희 =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나는 문이다』 외 시선집 『지금 장미를 따라』 등 다수. 영역시집을 비롯하여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알바니어 번역시집 외에 다수의 언어로 번역됨.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수상. [7]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노 향 림 반 고흐의 마을 ―― 압해도 8 압해도 사람들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이마받이를 하고 문득 눈을 들면 사람보다 더 놀란 압해도 귀가 없는 압해도 반 고흐의 마을로 가는지 뿔테 안경의 아이들이 부는 휘파람 소리 일렬로 늘어선 풀들이 깨금발로 돌아다니고 집집의 지붕마다 귀가 잘려 사시사철 한쪽 귀로만 풀들이 피는 나지막한 마을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압해도를 듣지 못하네 압해도는 내 시 속의 여행지이면서 마음의 여행지다. 해남에서 내가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을 따라 목포로 이사했다. 산정동 높은 꼭대기 벼랑 위에 집이 딱 한 채 떠 있는 곳이었다. 너무 높아 물을 끌어들일 수 없었던 곳이어서 몹시 불편하고 우선 사람이 살지 않아 사람이 그리운 곳이었다. 그리고 먹을 물이 없었다. 우물이 없었다. 해방 직후의 혼란기라서 식구들은 누구에게 물이 없노라고 불평할 수도 없었다. 물을 구하는 데엔 온 식구가 동원되어야 했다. 학교가 끝나면 오빠들은 부모님과 함께 늘 물을 구하러 아랫동네 혹은 더 먼 동네로 내려가던 모습들이 떠오른다. 거의 물과의 전쟁을 하다시피 해서 길어온 물은 물동이나 양동이에 가득 길어 와도 모자랐다. 길어온 물이 다시 가파른 벼랑으로 올라오면서 쏟아질까봐 조심하느라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거의 날마다 나오지 않는 물과의 전쟁으로 식구들은 어린 나만 남겨두고 저 끝 먼 벼랑 아래로 내려가는 바람에 나는 늘 혼자였다. 무섬증이 앞섰지만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면 압해도가 손에 닿을 듯 소잔등처럼 고즈넉하게 바다에 누워 있었다. 나는 복막염으로 앓아누워 있었지만 창이 있는 곳까지 무릎걸음으로 가서 창밖 압해도를 바라보는 것이 위안이 되곤 했다. 그 옛날 압해도는 왕이 통치했던 하나의 소국이라 했다. 내 유년 시절에 들었던 동화 같은 이야기가 실제 왕이 있었던 건 사실이라고 한다. 내 호기심은 더 자극이 되어 이따금 압해도로 가는 똑딱선을 오래 바라보곤 했다. 그림같이 펼쳐진 옛 왕이 있었던 나라, 그 섬나라에 가고 싶었다. 젖먹이 어린 시절 어머니의 등에 업혀 몇 번 배를 타고 들어갔다고만 들었다. 그 뒤로는 가지 못했던 섬. 무꽃 유채꽃 배꽃 살구꽃이 피고 무화과가 많았다는 섬. 거기 짙푸른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서 언제나 나를 부를 것 같은 꿈의 섬. 언젠가 저 섬을 건너가야지, 그 건너엔 그 무엇인가가 꼭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가난해서 병원에 갈 수도 없었고 병원도 없었던 목포를 떠올리면 병과 가난과 압해도가 저절로 떠오른다. 시인이 된 뒤에도 압해도를 향한 그리움이 커져 원초적이고 신화적 공간으로 다가왔다. 50년 동안 못 가본 섬, 그 섬은 나를 아끼느라, 아니면 나를 거부해서인지 몰라도 그리움만 키워서 시인이 되게 했다. 90년대 어느 날 나는 그를 원고지 위에 옮기기 시작했다. 내면에 쌓인 그리움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반 고흐의 ‘푸른 보리밭’이 떠오르고 바닷바람을 맞은 풀들이 한쪽으로 쓸리는 모습, 쓸려서 귀가 없는 풀들과 짙푸른 바다빛과 일체감이 일었다. 반 고흐의 색채와 나만의 강한 이미지와 감각을 보여주어야 했다. 시집 제목부터 결정을 했다.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압해도를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고도 막상 실체는 못 보았던 것이 그리움만 커져 시가 되었을까. 비교적 과작인 나는 한꺼번에 연작시가 많이 써지기는 처음이었다. 이 시의 제목이 「반 고흐의 마을」인데 독자들은 어느덧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로 바꾸어 버렸다. 지금은 연육교가 생겨 신비감이 조금 사라졌지만 목포의 뒷개(뒷항)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혼자 압해도에 갔다 오곤 한다. *잊지 못할 여행지 3곳 : 강릉-정동진, 태백-태백산, 해남-미황사 노향림 = 전남 해남 출생. 197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눈이 오지 않는 나라』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등이 있음.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8] 발 아래 벼랑을 신고 살았던 신 달 자 벼랑 위의 생 너무 늦게 왔다 정선 몰운대 죽은 소나무 내 발길 닿자 드디어 마지막 유언 한 마디 던진다 몇 몇백 년 벼랑 위에 살다 벼랑 위에서 죽음을 넘어선 소나무는 내게 자신의 위태로운 평화를 보여주고 싶었나봐 발 아래 벼랑을 신고 산 여자를 소나무는 애틋하게 그리워했을까 죽음도 하나의 삶이라고 하나의 경건한 침묵이라고 말하고 서 있는 정선 몰운대 죽은 소나무 따뜻하고 깊은 목숨으로 내 마음에 들어와 아무도 보여주지 않았던 두 발을 내 발 옆에 나란히 놓아두고 있네. 어느 해 가을이었을 것이다. 나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고 무작정 나를 끌고 가는 그를 따라 정선 몰운대를 찾았다. 바람도 그 쪽으로 불고 있었고 나도 거기 있었다. 이상한 경험이었지만 나는 과거도 미래도 없이 그냥 거기 그 자리에 존재하는 이상의 시간도 공간도 삶도 없어 보였다. 그래, 그런 느낌이었어. 몇백 년 그렇게 서 있는 듯 나는 그렇게 거기 서 있었다. 내 밥상이 거기 있었고 내 이부자리가 그 어딘가에 개켜 있는 듯 나의 삶의 조각들이 거기 숨어 있는 듯한 느낌……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거친 벼랑 위에서 너무나 긴 시간을 그렇게 별 항변 없이 삶의 시간보다 더 긴 죽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소나무가 왜 낯설지 않았을까.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으며 마치 자매라도 만난 듯 친근했을까. 아니라면 전생에서 한 오백 년 같이 살던 서방이라도 되는 듯 익숙하게 그 소나무는 내게로 다가왔던 것이다. 아니다. 자매도 서방도 아니고 그것은 나 자신이었을 것이다. 나 자신의 분신이 어딘가 바람에 흔들리듯 있을 것이라고 내 집 창가에서 잠 안 오는 밤에 생각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내가 울면 그 울음의 긴 여운이 어디선가 메아리로 들려 오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정선 몰운대 죽은 소나무” 그것은 또 하나의 내 혼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눈물은 많아졌는데 소리나는 울음은 잦아들었다. 그래, 그렇다. 벼랑 위가 바람에 자주 흔들렸을 것이다. 지난 겨울은 눈도 비도 바람도 불어났었다. 내 울음이 줄었던 것은 대리 울음 우는 자가 있었던 것이다. 나의 또 하나의 이름이었던 그가…… *잊지 못할 여행지 3곳 : 격포 채석강, 서산 부석면 간월암, 해남 미황사, 강화도 석모도, 거창 위천 수승대 신달자 =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봉헌문자』 『아가』 『아버지의 빛』 『오래 말하는 사이』 『열애』 등 다수. 대한민국문학상, 시와시학상, 한국시인협회상, 현대불교문학상 등 수상. [9]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너와집 김 명 인 너와집 한 채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 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에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너와집 한 채」를 쓴 지도 어느덧 이십 년 저쪽이던가. 행정구역조차 멋대로 바꾸어서 ‘강원남도 울진군’을 노래했던 이 시의 배경은 한갓 추억 속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러고 보면 그 ‘울진군’이 ‘강원도’에 속해 있던 시절에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냈었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무작정의 탈주를 꿈꾸지 않았다면, 아직도 나는 태백산맥의 발부리가 파도에 씻기는 동해 어느 어름에서 한 생을 이어가고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울진군은 원래 고구려의 땅이었다. 태백산맥이 반도의 남쪽으로 세차게 쏠리다가, 첩첩이 멈춰 서서 외줄기 해안선으로 동해와 마주하는 그 경계에 해발 천여 미터를 넘긴 준봉들을 세워 놓았으니, 백암산, 칠보산, 일월산 등이다. 울진군은 산맥에 걸쳐놓은 선반처럼 해안 쪽으로 길게 벋었으니, 1960년대에 갑작스럽게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심정적으로 강원도 사람으로 자처하니, 아집에 붙들린 딱한 마음가짐일까. 어느 핸가 그 울진군의 북면, 내륙의 덕구온천에서 다시 태백산맥 깊숙한 곳으로 걸어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세상일로 몹시 시달림을 받았던 시절이었다. ‘나’로 이어지는 남들의 시선이 주체스러워서 피하고만 싶었던 그때, 그 골짜기로의 잠행은 시간을 놓아버린 주체로서의 한없는 연민과 소망을 함께 피워 올렸다. 이성의 힘에 기대어 세상을 읽어가려 했던 그동안의 시간들이 저만큼 밀려나면서, 생의 일회적 여정 위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득 아뜩하고 슬퍼졌었다. 이 풍경과 저 풍경 사이, 어떠한 맥락에 속해 있지 않아도 저절로 풍경인 세계가 내륙 깊숙한 곳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하여 어떤 시간에 놓아두어도 풍경됨을 훼방하지 않는 적요가 거기 고여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니, 나는 어느 한 순간도 현실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단지 본향의 물맛 때문에 연어처럼 헤맨 아득한 방황의 기억만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시간에 침식 받으면서 풍화를 견디는 길 위의 나그네일 뿐인가. 그런 생각들이 무인지경의 그 골짜기에서 이 작품을 품게 했다. *잊지 못할 여행지 3곳 : 지리산 뱀사골, 해남군 보길도, 영덕군 해안도로 김명인 = 1946년 경북 울진군 출생.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동두천』 『물 건너는 사람』 『바닷가의 장례』 『길의 침묵』 『파문』 『꽃차례』 등이 있음. 소월시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수상. [10]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정 호 승 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속에 절 하나 지어놓고 삽니다. 자기 인생의 절이자 운명의 절이지요. 그 절은 어릴 때 엄마 손을 잡고 따라가 본 절일 수 있고, 어른이 되어 어느 한때 운명적으로 가본 절일 수 있습니다. 제 마음속에도 그런 절이 한두 개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부석사입니다. 부석사는 제가 40대 초반에 처음 찾게 된 절입니다. 《월간조선》 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에만 전념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제 스스로 원한 일이기는 하지만 사회의 한 조직에서 일탈된 뒤에 오는 허전함과 공허감을 달래기 어려웠습니다. 마치 망망대해에 혼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해 가을 잠시 여행을 떠났습니다. 청량리에서 중앙선 기차를 타고 영주에 내려 무심코 부석사를 찾게 되었습니다. 부석사 가는 길가엔 온통 사과밭이었습니다. 마치 밤하늘의 별들이 내려와 사과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까지 이르는 길엔 노란 은행나무가 줄을 서 있었습니다. 은행나무 숲길 옆으로도 사과밭이 이어졌고, 군데군데 크고 작은 상사석相思石이 놓여 있었습니다. 상사석이 무엇입니까. 떠나간 님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아니 평생 동안 앉아 있던 바위 아닙니까. 저는 상사석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려 보았습니다. 나를 위해 다시 돌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간지주 앞을 지날 때, 한 젊은 여자가 당간지주 앞에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 여자가 전생에서부터 나를 기다려온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안양루安養樓를 지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내 일생이 누군가의 배흘림기둥 하나만이라도 될 수 있다면……’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뒤 부석사를 자주 찾았습니다. 부석사는 찾아갈 때마다 어머니 품속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50대 초반엔 무량수전 안에 들어가 처음으로 아미타불님께 절을 올렸습니다. 문틈으로 부처님을 바라보는 것과 직접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엎드려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아미타불이 그런 저를 보고 빙그레 웃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부처님께 무슨 절을 올리느냐고 물을 필요는 없습니다. 절을 올린다는 것은 흠숭하는 분에 대한 제 마음의 표현일 뿐입니다. 절이란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하고 이웃을 향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뒤 당나라 임제臨濟 의현義玄 선사께서 하신 말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저는 그 말씀을 읽는 순간, 등골이 송연해졌습니다. 아니, 몽둥이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으며, 마음속에 큰 바위 하나가 “쿵! 쿵!” 소리를 내며 끝없이 굴러가는 듯했습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강한 질책의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 나는 아직 이 나이가 되도록 사랑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가. 아직 이 나이가 되도록 사랑에 그토록 연연하는가.’ 누가 죽비로 제 마음을 강하게 내리친 것 같아 저는 한동안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그동안 사랑을 하면서도 진실한 사랑을 하지 못했다는, 그러면서도 사랑의 벼랑 끝으로 뻗쳐 나온 나무뿌리에 매달린 것과 같은 삶을 살아왔다는, 그런 후회와 자성이 뒤섞인 자책의 마음이 그만 저를 주저앉게 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두고 단 한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시작노트 한켠에 단단히 메모를 해두고 감히 떨리는 마음으로 다짐을 했습니다. ‘앞으로 혹시 내가 시집을 내게 된다면 이 말씀을 시집의 제목으로 삼으리라.’ 삶과 죽음이 둘로 나누어질 수 없듯이 사랑과 죽음 또한 둘로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사랑과 죽음은 하나의 동의어입니다. 예수의 사랑에 죽음이 없다면 오늘날 그의 사랑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저는 늘 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그래도 저는 아직 사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냥 삽니다. *잊지 못할 여행지 3곳 : 영주 부석사, 순천 선암사, 화순 운주사 정호승 = 1950년 대구 출생. 1972년 《한국일보》로 등단.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이 짧은 시간 동안』 『새벽 편지』 『포옹』 등이 있음.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수상. [11] 왜 모든 길 끝엔 절이 있느냐 박 세 현 휘갈겨 급히 쓴 시 부론에서 회항하는 길 발바닥이 젖어 있다 내가 물 위를 걸었더냐 내 또래 산벚나무가 기대섰던 산신각 근처를 어정대다가 멧새가 급히 삼킨 적요를 되뱉는 시늉도 봤다 단청 없이 견디는 대웅전 뒷길로 훌훌 져버리던 목련이 미완으로 남긴 한 잎의 고요를 친견함 부처가 성불하기 직전에 허전을 입가심하러 다녀갔을 법한 절집을 내려오면서 읊은 대사 한 줄 왜 모든 길 끝엔 절이 있느냐 젖은 발바닥에 묻은 꽃잎이 뜯긴 살점마냥 비리다 어떤 여행지는 기억되기도 전에 지워져서 아쉬울 때가 있다. 이 시의 근거가 된 장소도 끝내 복원되지 않는다. 부론이라는 표지가 있으나 그게 기억의 세부를 불러오지 못하고 있다. 자주 갔기 때문도 아니고 표나는 풍경이 없어서도 아닌 듯하다.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여행지를 밀어낸 말 속에서 나는 그 풍경을 오롯이 복원한다. 풍경과 대면했던 사정도 찾아진다. 그래서인가? 나는 내 시 속의 ‘그 장소’를 두 번 다시 찾아나설 수 없다. 어떤 공간과 나의 생각이 헤어지는 저간의 사정이 이러하다. 시 속에 등장하는 공간은 아마 원주에서 충주로 가는 국도 어느 지점으로 추정된다. 길 나섰다가 절집 이름을 보고 쑥 들어가서 한 바퀴 돌고 나왔을 것이다. 그때는 분명했던 관찰의 윤곽들이 내 기억을 거치고 말에 붙들리면서 제 모습을(그런 게 있다고 믿으면서) 놓쳐버린 모양이다. 봄 되면 조그만 땅뙈기를 사고 싶어진다. 이게 나의 증상이다. 이곳저곳 돌아다니지만 결론은 없다. 사고 싶은 욕심과 사는 것이 다른 분열을 사랑했던 셈. 이제 봄마다 내 옆에 머물던 증상의 근원을 나는 알아버렸다. 겨우내 얼어 있던 땅 헤집고 흙의 살냄새 풍기는 곳에서 금방 돋은 진달래 몇 포기 눈에 넣는 게 내 욕심의 목차는 아니다. 그건 자연주의도 친환경도 부동산적 사고 어디에도 선이 닿지 않는다. 그것은 어린 날의 풍성했던 자연과 거기에 묻은 기억을 호출하는 방식이었겠다. 남의 것을 내것처럼 볼 줄 아는 미학을 갖추게 되면 나의 징후는 소멸된다. 매화나무 한 그루 심지 못하고 지나가는 봄도 달콤하다. 우리가 통과하는 삶의 매순간이 여행일 것이고, 순간순간 시공을 놓아주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여행자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시는 그 사이에서 정신없이 몰아쉰 날숨 같은 것이었겠다. *잊지 못할 여행지 3곳 : 1970년대 강릉 안목항, <모래시계> 이전의 정동진, 불사하기 전의 선암사 박세현 = 강릉 출생. 1983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사경을 헤매다』, 산문집 『설렘』이 있음. [12] 내 생의 섶지코지는 더 이상 지상엔 없다 고 재 종 섶지코지 정상의 판자집 한 채 제주도 섶지코지 정상에 판자집 한 채 있다 성산포 가다 우측 바닷가에 큰 녹색 오름 그 정상에서 남해파도 우지끈 먹고 서 있다 그 옆에서 연인들 사진 펑펑 찍고 갸웃거려도 난 그 집 거기 왜 서 있는지 묻지 않는다 세간의 쓰라린 슬픔 늘 부풀려올 뿐인 나는 하늘과 바다만을 향해 선 그 집 모른다 다만 더께진 욕망에 막힌 내 생 무심히 열고 오늘도 삐그덕거릴 뿐인 그 집으로 외로 앉아 머리에 갈매기똥 온통 뒤집어써도 좋겠다 내 잠깐 길을 잃고, 웬 모를 집에 든다면 아아, 이도 저도 다 사무치게 쓸쓸하다면 거기 그 집으로 앉아 그냥 그 집도 없이 남해바다 숱한 파랑, 먼 수평선 그 뒤까지 한 이레쯤 눈길 망연히 두고 싶은 집 그러면 그러면, 때 맞춰 시린 해조음에도 울며 내 생 조류처럼 들고 나는 법도 알 수 있을 집 섶지코지 정상에 판자집 한 채 외로 서 있다 한 문화저널 인터뷰에서 중견시인 한 분이 여행에 대해 묻자 자기는 해외여행은커녕 제주도에도 한번 가본 적이 없다고 한 걸 본 적이 있다. 보들레르의 시구대로 “우리들을 비참한 일상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이 알 수 없는 열병”인 여행은 한자리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안정적인 일상에 만족하지 못하며, 세상이 제시하는 어떤 법칙과 한계선 너머의 저편을 응시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한 꿈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여행이 초대하는 것 중의 하나인 “세상의 아득한 저 끝에 대한 꿈은 언제나 사납고 매혹적인 법”(다비드 르 브르통)이다. 이런 여행을 별로 하지 않는 그 중견시인은 “평상심이 도”라고 한 어떤 선사처럼 아마도 권태와 환멸의 일상 속에서 생의 황홀과 관조를 얻고 있음에 분명하다. 물론 이는 그가 산골마을에 정착해 살며 생산해내고 있는 여러 가편의 시들을 보아 알 수 있다. 그 시인처럼 나도 지금껏 해외여행 한번을 다녀온 적이 없다. 우선적인 이유는 ‘목구멍에 풀칠하기 바빠서’이지만, 어려서부터 연약하여 오늘까지 병치레를 그친 적이 없기에 장기여행이 힘들어서다. 하지만 우리의 상상을 채찍질하는 길들, 숲들, 강과 바다 그리고 수많은 유적과 공간들에서의 유랑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왜 내겐들 없으랴. 자본과 생활의 끔찍한 시간들 속에서 잠시 벗어나 순수하게 ‘나’를 들여다보고 ‘나의 길’의 의미를 묻고 싶은 이 열정이 아직도 식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십 년도 더 넘었을까. 사무치게 사랑하면서도 사무치게 쓸쓸하기만 한 불혹 너머의 그때. 이문재의 「해남길, 저녁」에 나오는 시구처럼 “아직 어려서, 마구 젊기만 해서” “후욱 비린내 나는” 삶의 비루를 모르는 젊은 아이와 함께 제주도엘 간 적이 있다. 가서 남들 다 가는 알려진 관광지보다는 남들 안 가는 곳만을 골라 다니며 존재와 사랑, 그 궁극의 묘처를 묻던 곳 중의 하나인 섶지코지. 그 얼마 뒤 송승헌, 송혜교 주연의 방송극 <올인>에 헌팅되어 관광지로 개발되어 버렸음이니, 내 생의 섶지코지는 더 이상 지상엔 없다. *잊지 못할 여행지 3곳 : 충북 충주에서 강원도 문막까지의 남한강길, 곡성에서 구례를 거쳐 하동까지의 섬진강길, 동해 낙산사에서 한계령 너머의 백담사 고재종 = 1957년 전남 담양 출생. 198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새벽 들』 『사람의 등불』 『날랜 사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쪽빛 문장』 등이 있음. 신동엽창작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13] 그때, 내 속은 어찌 정선이었나 문 인 수 정 선 산 넘는 재가 많다. 산 넘는 길들은 그러나 산 넘어 간 것이 아니라 산 넘어 산 속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샛길, 샛길 치며 또 그 끝을 끌어올리며 산에 붙는 것이다. 산에 붙은 가파른 감자밭 옥수수밭, 바람 아래 거듭 시퍼렇게 번져 오르는 것이다. 숨이 몹시 가쁘니 느린 노래가 풀려서 골짜기마다 쌓이는 쌓이는 물, 저 강 여러 굽이 산 넘어 가는 것이다. 나의 시, 1990년부터 십수 년간, 그때 나는 왜 여행이었으며 하필이면 왜 또 정선이었나. 일상이라는 아스팔트 포장은 깜깜하고 딱딱해서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다. 인생이 그저 잘 미끄러져나갈 뿐이다. 정선, “그 어느 한 쪽으로도 시계가 트인 곳이 없는, 험한 산세로 빙빙 둘러쳐진, 산간오지만이 갖는 그런 위압스런 사위가 돌들을 그렇게 붙박아놓고 있는” 정선이야말로 젖어 갇힌 내가 잘 보였기 때문인 것 같다. 정선은 그렇듯 험한 산이 많아 원경이 없다. 앞이 트이지 않는다. 올려다봤자 ‘하늘 세뼘’이다. 그리하여 제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정선에서는 생긴 것 같다. 흐린 봄날 정선 간다./처음 길이어서 길이 어둡다.//노룻재 넛재 싸릿재 쇄재 넘으며/굽이굽이 막힐 듯 막힐 것 같은/길/ 끝에/길이 나와서 또 길을 땡긴다.//내 마음 속으로 가는가//뒤돌아보면 검게 닫히는 산, 첩, 첩,//비가 올라나 눈이 오겠다. ―― 나의 시, 「정선 가는 길」 뒤집어 말하겠다. 내 마음 속에서 촉발되는, 미역줄기처럼 올라오는 그 젖은 길은 그때 전부 정선 가는 길이었다. 정선 가는 길이야말로 내 마음 속으로 가는 길이었다. 거칠지만 정선의 풍광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나는 그 아름다운 ‘곳’으로 간 것이 아니었고, 그저 내가 내 마음에 젖어 흥건히 갇히러 간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 죄가, 가책이 가장 잘 만져지는 ‘과거’로 간 것이었다. 정선은 아리랑의 발원지다. 아리랑은 아시다시피 한의 소리다. 한은 결핍이다. 결핍은 결국 서러움이다. 그 긴, 미끈거리는 줄거리를 따라가면 내겐 정선이 나오곤 했다. 그러다 그 길 어디쯤, “저 쇄재가 자물통같이 철커덕, 저문” 거기 당도해 갇히곤 했던 거다. 갇혀 “닫힌 말문 안에서 어떤 노래가, 물안개 하염없이 피어오르”는, 그 풀려나고 싶은 염원을 지그시 누르면서 “정선 아라리,/이 애터지게 느리고 구성진 가락을/동강 물길 위에 놓아” 천천히 풀면서, 나는 내 ‘헌 데’를 용서하곤 했다. 그때는 그렇게, 정선 가면 나는 시가 잘됐다. 나는 실제로 지금까지 정선 관련 시를 60여 편 썼다. *잊지 못할 여행지 3곳 : 경상남도 창녕군 우포늪,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면 욕지도, 전라도 변산반도 일대 문인수 = 1945년 경북 성주 출생. 1985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내 속은 어찌 정선이었나』 『뿔』 『홰치는 산』 『동강의 높은 새』 『쉬!』 『배꼽』 등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노작문학상, 편운문학상, 시와시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미당문학상 등 수상. [14] 신이 나눠주는 하루분의 산소 정 일 근 룽 ―― 히말라야에서 티베트의 늙은 라마가 내가 떠나온 동쪽나라를 알지 못한다, 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늙은 라마가 본 세상이란 해 뜨는 동쪽 산에서 해 지는 서쪽 산까지 뿐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알고 싶은 것도 라마에게는 욕심이어서 내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동쪽에 대한 내 설명이 장황해져버렸는데 마주친 늙은 라마의 깊은 눈은 이미 내가 떠나온 곳보다 더 먼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이쿠! 너무 많은 말을 했구나. 늙은 라마에게서 말이란 세상에 대한 욕심을 만드는 죄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호흡은 가빠지고. 하늘이 가까운 사원에서 사람의 말이란 신이 나누어준 하루분의 귀한 공기를 갉아먹는 나쁜 병균 같은 것, 내 말이 나의 공기를 다 갉아먹어 버려 숨이 끊어지는 고통이 엄습하고 다가가려면 자꾸만 멀어지는 벽 끝으로 늙은 라마는 안개처럼 돌아앉으며 룽이라 중얼거렸다. 룽은 티베트 말로 바람, 늙은 라마의 입술과 입술 사이에서 빠져나온 룽이 발밑에 쌓인 내 말들을 날려버리는 것을 보았다. 룽이란 한 마디에 설산의 흰 봉우리들이 빨래처럼 구겨지며 펄럭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서야 천 조각 하나로 가리고 살아온 늙은 라마의 몸은 자연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고, 평생을 풀만 먹어 짧은 머리카락이 초록 풀밭처럼 빛나는 것을 보았다. 해와 달, 별과 내가 늙은 라마의 중얼거림 속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2000년 네팔을 경유해 에베레스트 산으로 향했다. 울산의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를 따라가는 길이었다. 그때만 해도 네팔과 히말라야는 산악인이 열망할 뿐, 시인이 쉽게 찾아가지 않는 오지 여행지였다. 직항이 없어(지금도 직항은 없다) 홍콩 공항을 경유해서 꼬박 24시간 만에 네팔로 갔다. 도착하니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공항은 어두컴컴한 불빛의 시골 야시장 같았다. 나는 단숨에 우리나라 50년대쯤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시내 숙소에서 잠을 깨고 만난 다음 날부터 히말라야 카라반이 시작될 때까지 내가 둘러본 네팔은 ‘오래된 미래’가 고스란히 남아 있던 최고의 여행지였다. 카라반이 시작되고 나는 급한 성질에 급히 산을 오르다 베이스캠프에 올라 고산병에 걸려 쓰러졌다. 참으려고 했지만 고산병은 하산하지 않으면 폐에 물이 차는 폐수종으로 진행돼 사망할 수 있어 다시 하산을 했다. 느릿느릿 산을 내려오면서 올라갈 때 보지 못한 많은 풍경과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좋은 여행이 될 수 있었다.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행복했다. 숨쉬기가 가장 힘든 고통이었지만 그때마다 산소통 같은 자비의 손들이 나를 도왔다. 그중에서도 곰파(라마교 사찰)에서 만난 라마승들의 환대가 고마웠다. 소개한 시 「룽」도 그 경험으로 씌어졌다. 고산의 라마승은 아주 천천히 저음으로 말했다. 나는 배웠다. 히말라야에는 신이 나눠주는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하루분의 산소가 있는데 말을 많이 하면 이내 소진된다는 것을. 나는 세계여행을 하고 와서 시를 잘 쓰지 않거나, 오랜 시간 뒤에 시를 쓰는데 그곳에서 돌아와서는 여러 편의 시를 썼다. 그 뒤에 시인들은 유럽여행에 지쳤는지 히말라야로 발길을 돌리는 일이 많아졌다. 등산이 아닌 트레킹이란 이름으로 설산 아래를 천천히 걷는 여행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얼마 전 그곳을 다녀온 후배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사이 빈부 격차만 심해졌을 뿐 착한 사람들의 변화는 없는 것 같았다. 내년이 네팔 관광의 해라고 한다. 아무래도 다시 다녀와야겠다. 혼자서 배낭을 챙겨 떠나고 싶다. 눈 맑은 사람들을 만나면 ‘나마스테’라는 인사를 나누며. 곳곳에 핀 각양각색의 나팔꽃들과 인사를 하며. *잊지 못할 여행지 3곳 : 경북 경주 남산, 울산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 울산 고래바다 고래탐사 정일근 = 경남 진해 출생. 1984년 《실천문학》과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 등이 있음. 소월시문학상, 영랑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등 수상. <2편에서 계속> 문화저널21 & 계간 시인세계 munhak@mhj21.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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