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이야기 II]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식물 사진을 남기는 법
[2010. 4. 20]
지난 주에 천리포수목원에서 사라진 동강할미꽃, 노랑할미꽃을 이야기했습니다. 함부로 식물을 훼손시키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나쁜 사람들 가운데에는 좋은 사진을 자기 홀로 가지기 위해 그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 편지를 받아보시고 놀랐다고 하셨습니다. 수목원에서조차 그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식물 사진에 대한 생각부터 털어놓겠습니다. 저도 식물 사진을 열심히 찍습니다. 지난 12년 동안 나무와 풀을 만나면서 찍었던 사진들을 모아 이달 말이나 다음 달 초 쯤이면 저도 제 이름으로 된 사진집을 한 권 내게 됩니다. 좋은 식물 사진을 찍으려는 욕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식물 사진을 이야기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토마스 후버라는 사진가입니다. 저처럼 나무를 전문적으로 찍는 그는 '나무가 촬영을 허락하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는다'고 합니다.
표현만 다를 뿐, 나무가 전해주는 느낌이 있을 때 비로소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무가 전해주는 느낌은 그러나 금세 다가오지 않습니다. 솔숲편지를 통해, 여러 차례 말씀 드린 것처럼 나무는 아주 천천히 바라보는 사람에게만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그의 다양한 빛깔과 표정을 천천히 드러냅니다. 나무는 또 식물은 서두르는 자에게 결코 자신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식물을 피사체로 한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오랜 기다림이 필수입니다.
정말 좋은 식물 사진은 어떻게 찍어야 할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진 말입니다. 당연히 그 가장 중요한 비결은 앞에 말씀 드린 것처럼 식물 앞에서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욕심은 금물입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식물들처럼 모든 욕심을 버리고,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햇살 따라 차근차근 식물을 눈에 담는 것입니다. 시간이 오래 되면 오래 될 수록 좋은 사진을 남길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지지요.
오래 전에 '매직 아이'라는 게 초등학교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형체를 알 수 없이 혼돈스러운 그림이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놀랍게 변하는 것이었지요. 두 눈동자의 초점을 그림 속의 한 지점에 모으고 오래도록 바라보면, 신기하게도 도화지 속의 그림이 입체적으로 드러나는 재미있는 게임이었지요. 바로 그 매직아이가 좋은 사진을 찍는 비결입니다.
식물 사진에서의 매직아이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사진 속 피사체와 배경의 관계부터 짚어보지요. 좋은 사진은 피사체 뿐 아니라, 피사체를 둘러싼 배경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피사체라 하더라도 배경을 잘못 배치한다면,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드러내기 어렵지요. 배경이 혼잡할 경우에는 피사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배경을 흐릿하게 하는 아웃포커싱 기술이나, 배경과 피사체의 빛의 밝기 차이를 이용해 배경을 아예 검게 만드는 기술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자. 이제 식물 사진을 찍기 위해서 우리가 매직아이 기술을 활용할 차례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식물을 두루 살펴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물은 서서히 바라보는 사람에게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식물만의 느낌을 전해줍니다. 그때 쯤 되면 가만히 식물 앞에 서서 두 눈의 초점을 그 식물만의 독특한 느낌이 도드라지는 부분에 맞춥니다. 매직아이를 할 때처럼 오래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눈이 피로해질 때 쯤에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놀랍게도 눈 감아 까맣게 될 줄만 알았던 시야에 조금 전에 뚫어져라 바라보았던 그 식물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두 눈 크게 뜨고 바라보았을 때 보지 못했던 특별히 더 아름다운 부분이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것도 물론입니다. 이쯤 되면 성공하신 것이지만,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그 식물과 어울릴 듯한 자신의 경험이라든가 추억을 떠올리는 겁니다. 물론 눈은 감은 채입니다. 진달래 개나리처럼 익숙한 꽃이라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시겠지요. 혹시 천리포수목원의 식물들처럼 난생 처음 보는 꽃이라면 그냥 자신만의 상상을 떠올리는 거지요.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신비롭게도 추억의 배경은 까만 도화지 속으로 들어가 조금 전의 그 예쁜 꽃 뒤에 잘 배치됩니다.
그 추억의 배경에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처럼 살가운 사랑을 베풀어주신 분이 들어있기도 합니다. 눈 감고 바라보는 식물의 선명한 이미지 뒤편에 그렇게 엣 시골 집의 풍경과 그 곁에 환하게 웃으시며 두런두런 옛 이야기 풀어놓으시는 외할머니가 보이게 되지요. 혹 잊었던 옛 사랑의 알싸한 추억도 있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떠나간 그 여자의 흐릿한 뒷모습이 새겨질 수도 있지요.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영상이 있을 수 있을까요? 오로지 세상에 단 한 장 뿐인 영상이고, 또 세상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나만의 걸작 사진은 그렇게 완성되는 겁니다. 그 순간에 이르면 배낭 속의 카메라 따위는 이미 걸리적거리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굳이 번거롭게 그걸 꺼내서 셔터를 누를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혹은 그 식물 사진을 다른 사람이 더 찍지 못하도록 식물을 캐내거나 훔쳐가기 위해 이곳저곳 눈치보며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할 필요도 없어지지요.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려 마음에 찍은 단 한 장의 사진은 단언컨대 아주 오래도록 훌륭한 사진으로 남을 겁니다. 제 아무리 다양하고 훌륭한 기술을 가진 사진가라 하더라도 2010년 봄 천리포수목원에서 피어난 진달래 꽃의 배경에 옛날 제 외할머니 댁 뒷동산을 담지 못합니다. 제게는 누구보다 소중했던 외할머니의 모습도 담지 못합니다. 또 이 봄 천리포의 목련 동백의 배경에 그때 그 여자의 해맑은 눈동자를 어떻게 표현하겠어요? 더 말할 필요도 없지요.
좋은 사진을 찍어 많은 분들께 나무와 식물을 알리겠다는 생각으로 늘 카메라를 들고 나돌아다니는 제가 올리는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진정성 있게 들리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시한 사진 한 장 남기겠다고 마음대로 식물을 훼손하는 사람이라든가, 혼자서만 보겠다는 욕심으로 함부로 식물을 훔쳐가는 용서하기 어려운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덧붙이자면, 매직 아이처럼 오래 바라보는 걸 바탕으로 한다는 생각은 식물을 찾아 헤매는 저의 오랜 생각입니다. 돌아보니 12년 동안 나무를 찾아 헤매는 동안 저 역시 무작정 카메라 셔터만 눌러대던 때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특히 한 그루의 나무라도 더 많이 바쁘게 보고 싶었던 처음엔 저도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단 한 장의 사진이라도 식물이 전해주는 느낌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송이의 꽃, 한 그루의 나무를 더 소중하게 눈길로 어루만지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들입니다.
식물 이야기를 기다리시는 분들께 오늘은 사진 이야기, 혹은 식물과 교감하는 이야기만 늘어놓았습니다. 간단히 오늘 편지에 첨부한 아홉 장의 사진 속 식물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해야겠습니다.
맨 위부터 네 장은 '하얀 개나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미선나무의 꽃입니다. 환경부에서 멸종위기식물 2급으로 지정한 희귀 식물입니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특별한 희귀종입니다. 하지만 이 미선나무의 자생지도 욕심 많은 사람들의 무분별한 채취로 요즘은 자생지가 많이 훼손되었지요. 지금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는 자생지는 충북 괴산의 세 곳과 충북 영동, 전북 부안 등에 있긴 합니다만, 앞으로 더 잘 보호해야 하는 식물입니다.
그 다음 사진은 산수유 꽃과 헛갈리기 쉬운 생강나무 꽃입니다. 산수유 꽃이 긴 꽃자루 끝에 피어나는 것과 달리 생강나무 꽃은 꽃자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짧다는 걸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다음은 이른 봄에 피어났던 복수초의 요즘 모습입니다. 초록의 잎에 둘러싸여 더 소담해 보입니다. 복수초 가운데에 한라산 지역에서 자생하는 종류입니다.
다음 두 장의 예쁜 사진은 제가 그냥 '애기 튤립'이라고 부르는 튤립 종류 Tulipa ungulatifolia 입니다. 키가 작아서 이 꽃을 제대로 보려면 몸을 한껏 낮추고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 아래 보랏빛 꽃 사진은 애기튤립 바로 옆에서 피어난 Crocus ancyrensis 입니다. 역시 작은 키의 식물인데 이처럼 모여서 피어난 모습이 한없이 앙증맞아 보이는 예쁜 식물입니다.
그리고 바로 위의 사진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우리가 잘 아는 민들레입니다. 하도 흔한 식물이어서, 어쩌면 눈에 제대로 담아본 적이 없는 식물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천리포수목원처럼 특별한 식물이 많은 곳에서는 아무리 예쁘게 피어나도 바라보는 이 별로 없는 그런 꽃입니다. 민들레 한 송이가 지나는 발걸음을 붙잡고 '나도 예쁘다'고 아우성치는 소리, 이 봄에 꼭 귀에 담아두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곁의 식물들을 사랑하는 첫 걸음이고, 그것이 곧 더 아름다운 식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첫 단계입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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