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이야기 II] 잔인한 계절, 사라진 동강할미꽃과 얼레지의 슬픈 운명
[2010. 4. 12]
더디다고 나무라던 봄의 걸음걸이가 갑자기 빨라졌습니다. 맞춤한 때에 여름에게 자리를 내 주려면, 여유가 없다는 걸, 알아챈 모양입니다. 그렇잖아도 천리포수목원의 봄은 여느 곳의 봄보다 더 더딘 편이어서, 수목원으로 찾아온 봄은 여느 해보다 서둘러야 할 겁니다.
오락가락 하는 날씨 탓에 수목원의 식물들도 참 뒤죽박죽입니다. 한 해 전이나 두 해 전에 꽃을 피우던 순서가 많이 흐트러지고 말았답니다. 목련보다 훨씬 먼저 피어나던 작은 풀꽃들이 목련에게 앞 자리를 내주는가 하면, 수선화와 함께 피어나야 할 크로커스가 벌써 꽃잎을 떨구기도 했습니다. 봄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아지다 보니, 나름대로 발길을 재우치는 까닭이겠지요.
맨 위의 사진은 민간에서 '크리스마스 로즈'라고 불리는 Helleborus niger var. altifolius입니다.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 즈음에 피어나는 꽃이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어있긴 히자만, 우리나라에서는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이른 봄에 피어나는 꽃이지요. 하지만 올에는 이 꽃의 개화도 꽤 늦은 편입니다. 지난 해에는 3월 중순에 피어났으니까요.
이 꽃은 비교적 오랫동안 피어있는 꽃입니다. 꽃처럼 보이는 부분이 꽃잎이 아니라, 꽃받침이라는 게 그 까닭이지요. 대개의 꽃들은 번식을 위해 피어나잖아요. 그래서 꽃가루받이를 마친 꽃들은 이내 꽃잎을 떨구게 마련인데, 헬레보러스의 꽃은 꽃잎이 아니라 꽃받침이다 보니, 수정을 마쳤어도 오래 남아있는 겁니다. 오래도록 꽃을 볼 수 있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식물이지요.
헬레보러스에 이어 보여드리는 두 장의 꽃 사진은 비교적 생경하실 겁니다. 저도 처음 보는 꽃이지요. 우리 수목원에서 지난 겨울에 처음 들여와 심은 꽃입니다. 벌써 눈치 빠르신 분들은 이 꽃의 정체를 파악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꽃 역시 헬레보러스처럼 유럽 사람들이 무척 좋아하는 설강화(Galanthus) 종류의 식물입니다.
지난 겨울에 두 종류의 설강화를 새로 심었습니다. 그 가운데 작고 하얀 꽃잎이 겹으로 피어나는 겹꽃의 설강화 종류 Galanthus nivalis 입니다. 다른 한 종류는 그 동안 보았던 설강화와 꽃은 비슷한데, 잎사귀가 넓적하다는 차이를 가지고 있어서 그다지 생경하지 않지만, Galanthus nivalis 는 새롭습니다. 생육 조건이 잘 맞으면, 20센티미터 정도까지 자라는데, 올에는 처음 자리잡은 까닭인지 원래 크기만큼 자라지 않은 채 꽃을 피웠습니다. 내년에는 아마 지금보다 더 많은 꽃들이 더 크고 아름답게 피어날 겁니다.
목련도 꽃을 피웠습니다. 물론 아직은 몇 그루 뿐입니다. 그렇잖아도 목련의 개화 기미가 궁금해서 숲을 산책하면서 만나게 되는 목련마다 눈인사를 한참 나눴지요. 목련 가운데 우리 수목원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Magnolia biondii 는 이미 만개한 상태이고, 우리 토종 목련인 Magnolia kobus 도 꽃봉오리의 상당 부분이 열렸습니다. 멀리에서도 하얀 목련 꽃잎이 그대로 바라보이는 정도입니다.
지금 가장 예쁘게 꽃을 피운 목련은 수목원의 윈터가든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목련 Magnolia x loebneri 'Early Bird' 입니다. 지난 겨울부터 개화를 준비하던 꽃봉오리 가운데 따뜻한 햇살 닿는 남쪽의 꽃봉오리들은 이미 꽃잎을 활짝 열었습니다. 아마 전체의 40% 정도가 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차츰차츰 나머지 꽃봉오리도 피어나 먼저 피어난 꽃들이 불러제끼는 봄노래를 돌림으로 불러제끼겠지요.
물론 어떤 식물들이라도 처음 피어나는 꽃이 더 반갑겠지만, 목련은 유난합니다. 1천 6백 그루나 되는 아름다운 목련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천리포수목원이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해도 목련은 언제나 겨울의 긴 기다림을 담고 피어나는 꽃인 까닭에 더 그럴 겁니다. 매운 바람 부는 겨울에 이미 꽃봉오리를 피워올리고, 추위를 이겨내려 뽀얀 솜털로 꽃봉오리를 살짝 덮고 지내는 목련이잖아요.
어?r든 언제나 맨 앞자리에서 피어나는 꽃들은 반갑습니다. 봄이 상큼하고 즐거운 것도 아마 그렇게 한 해의 시작, 출발을 알리는 작고 귀한 생명체들이 사람보다 먼저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때문이지 싶습니다. 올해는 우리 수목원의 목련들이 언제 만개할 지 예측이 쉽지 않습니다. 언제 쯤 되어야 우리 목련들이 가장 아름답게 피어날지 생각해 봅니다만, 가름하기 참 어렵네요.
봄을 불러오느라 애쓴 우리 풀 가운데 노루귀(Hepatica asiatica)도 있습니다. 복수초(Adonis amurensis)와 함께 우리 산과 들에서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이지요. 낮은 땅에서 보일듯 말듯 작고 앙증맞게 피어난 노루귀 꽃이 참 예뻐 보입니다. 그 곁에는 노루귀와 대조적으로 새빨간 색으로 피어난 튤립도 있습니다. 눈을 찌를 듯 강렬한 빨간 색이지만, 우리 꽃이어서인지 제게는 노루귀가 훨씬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봄은 언제나 낮은 곳에서 먼저 찾아온다고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풀이 바로 노루귀입니다. 다른 화려한 봄꽃들이 피어날 수 있도록 낮은 곳에 가만히 앉아서 봄을 불러오지만, 언제나 누구 앞에 나서지 않고, 그냥 가만히 봄 오는 소리를 바라보며 한 생을 마치는 순박하고도 예쁜 우리 꽃입니다.
노루귀에도 종류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유난스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청노루귀이지요. 생김새는 똑같은데, 푸른 빛이 도는 보랏빛의 꽃을 피우는 노루귀입니다. 청노루귀는 분류학에서는 따로 나누지 않고 노루귀와 같은 학명으로 분류합니다. 또 꽃 모양에서 차이를 보이는 새끼노루귀(Hepatica insularis)와 울릉도에서 자라는 섬노루귀(Hepatica maxima) 도 있습니다.
이들 노루귀 종류의 식물들은 모두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식물로, 할미꽃(Pulsatilla koreana) 와 가까운 친척 관계의 식물입니다. 할미꽃 가운데에는 우리나라 동강 지역에서만 자라는 특산종으로 동강할미꽃(Pulsatilla davurica var. tongkangensis)이 있습니다. 여느 할미꽃과 달리 허리를 굽히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고 피어나는 예쁜 꽃입니다. 이 동강할미꽃을 우리 수목원에서도 심어 키웠는데, 앞으로는 볼 수 없게 됐습니다. 수목원 관람객 가운데 누가 캐어 갔다고 합니다. 동강할미꽃과 함께 노란 꽃을 피우는 노랑할미꽃(Pulsatilla koreana for. fulva)도 캐어갔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런 못된 짓을 저지른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노랑할미꽃을 캐어간 건 지난 해 봄에 이미 알고 있었지만, 동강할미꽃까지 훔쳐간 것은 모르고 있었지요. 그래서 봄 햇살 창가에 스밀 때마다 그 예쁜 동강할미꽃을 기다려왔는데, 허무한 기다림이 되고 말았네요. 저 뿐이겠어요. 지난 해에 우리 수목원에서 동강할미꽃을 보신 분들 가운데에도 다시 찾아오실 분들이 계실텐데, 참 아쉬운 일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얼레지(Erythronium japonicum) 이야기도 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위의 사진이 얼레지입니다. 얼마나 예쁜가요? 화려하지만 결코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고 한껏 고개를 숙인 채 피어나는 바람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우리 토종 식물이지요. 지난 주에 위의 사진에서처럼 두 송이의 얼레지 꽃이 피어났습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예쁘긴 하지만, 꽃잎이 조금 더 제껴지면 더 예쁘리라 생각하고 엊그제 다시 저 두 송이의 꽃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이 두 송이의 꽃이 모두 떨어졌습니다. 꽃 떨어진 꽃자루 부분을 살펴보면 이 꽃이 왜 떨어진 건지를 알 수 있지요. 이 꽃이 떨어진 것을 아쉬워 한 우리 지킴이들이 자세히 살펴보고는 모두가 이 꽃이 왜 떨어졌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물론 가끔은 새가 꽃을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이 경우는 사람이 직접 손으로 정교하게 따낸 것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직접 현장을 목격한 것이 아니어서 확정할 수야 없지만, 이런 경우는 누군가가 얼레지 꽃의 사진을 예쁘게 찍은 뒤에 다른 사람은 찍지 못하도록 일부러 따낸 것이라고 합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일은 흔히 벌어집니다. 동강할미꽃을 사진에 담느라 동강할미꽃에게는 꼭 필요한 오래된 잎사귀를 뜯어내기도 하고, 또 꽃에 맺힌 이슬을 연출하려고 자동차 워셔액을 뿌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요.
그런 사람들, 아무리 비난해도 들은 척 안 합니다. "한 장의 멋진 사진을 위해서 그 정도의 비난은 감수하겠다"는 심사인가요? 그렇게 만들어진 사진에 담을 수 있는 진정성이란 게 도대체 무얼까요? 못된 인간의 손아귀에 뜯겨 나가야 했던 얼레지 꽃의 운명이 슬퍼집니다.
그나마 잔인하게 뜯겨나간 두 송이의 얼레지 꽃이 있던 자리 저만치에 다른 얼레지 꽃이 피어나기는 했습니다만,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픕니다. 그야말로 천벌을 받아야 할 인간들. 찾아내 욕이라도 실컷 해 주고 싶은 인간입니다. 못된 인간들 이야기 그만두고 싶지만, 한가지 덧붙입니다. 위에서 보여드린 새 품종의 설강화까지도 벌써 누군가가 캐낸 흔적이 있더군요.
천리포수목원이 40년 만에 지금처럼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적잖은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문을 닫아걸고 일반에 개방하지 않았던 결과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사람과 자연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걸까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참담함입니다. 천리포수목원의 아름다운 식물들에게 이 즈음의 봄은 그렇게 잔인하게 지나갑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참. 맨 끝의 사진은 또 누군가가 캐내가고 싶어할 지도 모를 희귀식물 '흰진달래'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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