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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나무를 찾아서] 천년 세월의 침묵 속으로 잦아든 나무들의 신비

by 丹野 2011. 1. 18.

[나무를 찾아서] 천년 세월의 침묵 속으로 잦아든 나무들의 신비

   밝은 회색과 흰 색의 얼룩이 신비롭게 피어나는 백송의 줄기 표면. 예산 용궁리 백송.

   [2011. 1. 17]

   겨울 날씨가 무척 사납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충남 예산을 다녀왔습니다. 큰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서 마음 졸이면서 다녀온 길이었습니다. 추사고택과 그 곁의 백송을 찾아보았지요. ‘한파주의보’가 내릴 만큼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나무 주위로는 정적만 흘렀습니다. 두어 시간 쯤 머무르는 동안 시동도 끄지 않은 상태로 잠시 멈춘 고급 승용차에서 중년 부인이 후다닥 내려서 그야말로 ‘인증샷’ 한 장 찍고는 쏜살같이 사라져가는 게 인적의 전부였습니다.

   내내 침묵이었지요. 나무와 사람 사이에 놓인 침묵은 2백 여 년 전 추사 김정희와 지금 이 나무를 바라보는 나그네와의 사이에 놓인 시간의 거리만큼 깊고도 적막했습니다. 백송은 나무 줄기 표면의 신비로운 느낌이 오래 남는 나무입니다. 전체적으로는 그저 소나무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나무라고는 하지만, 줄기의 인상적인 특징 때문에 매우 특이하게 느껴지는 나무입니다.

   지난 가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보은 용곡리 고욤나무의 줄기에 발달한 코르크.

   나무 앞에 처음 도착했을 때에는 낮게 깔린 구름 위로 파란 하늘이 선명했지요. 바람이 무척 거센 탓에 흘러가는 구름의 속도도 빨랐습니다. 얼마 지나니, 하늘은 온통 눈 구름이 뒤덮었습니다. 겨울은 나무 줄기 표면이라든가, 나뭇가지라든가 겨울눈처럼, 지난 계절에 자세히 보기 어려운 부분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계절입니다.

   얼마 전에 충북 보은에 새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고욤나무의 줄기가 생각납니다. 천연기념물 제518호인 보은 용곡리의 고욤나무는 고욤나무의 전형적인 생김새를 조금 벗어난 나무이지만, 그 나름대로 상당히 멋진 나무입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나무여서 줄기 껍질에 무성하게 발달한 코르크의 신비로운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두툼한 코르크는 이 나무가 지나온 세월의 무게와 맞먹는 두께인 듯합니다.

   천리포수목원의 게스트하우스인 벚나무집 앞에 서있는 사막소나무의 줄기 표면.

   천리포수목원의 나무들을 관찰할 때에도 이 계절에는 줄기 표면이 유난히 눈에 들어옵니다. 예산 백송을 보러 가기 전 날은 천리포수목원에서 하루 머무르면서 나무들을 만났는데, 그곳에서도 역시 나무 줄기를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위 사진은 ‘사막소나무(Pinus clausa)’라는 이름의 소나무 줄기 표면입니다.

   ‘사막소나무’라는 이름은 아마 처음 들어보셨을 겁니다. 미국의 플로리다 반도 지역에서 자라는 소나무의 한 종류인데, 그 개체 수가 많지 않아, 멸종 위기 상태인 나무라고 합니다. 특히 사막 지역에서 잘 자라는 나무여서, 미국에서는 Sand Pine 혹은 Sandhill Pine이라고 부르는 나무여서 우리 수목원에서는 한글로 ‘사막소나무’라고 부르는 겁니다. 아마 우리나라의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나무이지 싶습니다.

   우리 수목원에서 가장 키가 큰 몇 그루의 나무 가운데 하나인 튜울립나무의 줄기.

   이건 튜울립나무의 줄기입니다. 정확하게 하자면 튜울립나무 품종인 Liriodendron tulipifera 'Fastigiatum'입니다. 5월 쯤에 가지 끝에서 튜울립을 닮은 꽃을 피우기도 하고, 잎사귀도 튜울립을 닮았다 해서 튜울립나무라고 부르는 나무이지요. 일부에서는 목백합이라고도 하는 나무입니다. 최근 들어서는 이 나무가 음이온을 많이 뿜어낸다는 게 알려지면서 도심의 가로수로 많이 심고 있습니다만, 그 전에도 이미 플라타너스라고 부르는 양버즘나무와 함께 심었던 나무입니다.

   양버즘나무와 섞여 있을 때에 튜울립나무를 구별하는 걸 어려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얼핏 보면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 잎 모양을 조금만 꼼꼼히 보면 충분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구분이 어렵다면, 잎을 모두 떨어뜨린 이 계절에 보면 확연히 구분할 수 있을 겁니다. 튜울립나무의 줄기는 양버즘나무의 줄기 껍질과 달리 얼룩이 없고 사진에서처럼 미끈하니까요.

   비틀리고 꼬이면서 신비롭게 솟아오른 이천 도립리 반룡송.

   나무 줄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지난 주에 답사하고, 신문의 칼럼으로 썼던 이천 도립리 반룡송이 떠오릅니다. 줄기의 모습 가운데 아마도 우리나라의 큰 나무 가운데에는 가장 유별난 나무이니, 그럴 수밖에요. 줄기 표면은 여느 소나무와 다를 게 없는 나무이지만, 그 줄기가 마치 용트림하듯 솟아오른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랍니다. 가까운 벗은 이 나무의 줄기 일부를 클로즈업해 찍은 사진을 놓고, “웬 짐승 사진을 다 찍어왔냐?”고 농담을 하기까지 할 정도인 나무이지요.

    사람의 소원 한 가지씩은 꼭 들어주는 나무로 알려진 반룡송 이야기는 신문 칼럼을 통해 보십시오. [신문 칼럼 보기] 공교롭게도 엊그제 지방의 한 신문에서 새로 낸 책 ‘우리가 지켜야 할 나무’를 소개하면서도 바로 이 반룡송을 중심으로 책을 소개했더군요. 그만큼 인상적인 나무라는 이야기이지 싶네요. [신문의 책 소개 글 보기]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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