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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의 조건
박제천
어떻게 써야 좋은 시가 되는 것일까. 여담이지만 무애 양주동은 생전에 명작소설을 한권 써보고 싶은 욕심을 갖고 있었다 한다. 그는 우선 소설의 첫 구절에 명작의 비밀이 숨어 있으리라 착안하고, 수많은 명작의 서두를 모아보았다. 불문학자였던 자신이 조선인 최초로 향가의 이두문을 풀어낼 만큼 학문 연구에 자신감을 가졌기에 명작의 서두들을 비교 연구하면 그 안에 명작의 해답이 나오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참담한 것이었다. 그의 멋진 착상과 달리 수집된 명작소설의 첫구절들은 하나같이 평범했다. 그저 단순한 도입부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결국 명작소설 쓰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한다. 사실,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테크닉 따위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예술가에게 테크닉이란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세잔의 말처럼 예술가의 테크닉은 자연을 만나면서 만들어지고 상황과 부딪혀가면서 발전하는 일종의 전략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좋은 시의 비밀 역시 같은 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시창작법들을 들춰보면, 시의 첫구절과 같은 세목들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는 테크닉을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참으로 훌륭한 정보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그걸 활용하는 사람한테 달려 있다. 한편의 시는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전체가 모여야만 표현의 구조가 성립이 된다는 기본을 전제로 테크닉을 활용해야 하는데, 좋은 첫구절만 생각하다 보면 유기적인 관계가 생성되는 대신, 구절과 구절의 이음새가 얽히고 무너져 작품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만다.
시쓰기와 시읽기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좋은 시를 읽을 줄 안다 해서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좋은 시를 읽을 줄 모르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좋은 시에는 그 작품을 좋은 시로 만들어주는 여러 가지 장치와 조건이 있기 때문에 좋은 시의 그 비밀을 깨우치는 만큼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따라서 좋은 시를 쓰고자 하는 자들은 먼저 좋은 시의 구조를 익힌 다음, 그 구조 내에서 테크닉의 비의를 찾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시를 읽으면 여운이 감돈다. 작품의 한 구절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작품에서 묘사된 사물이나 풍경과 마주치면 저절로 그 구절이 떠오르고, 그 구절이 생각나면 잇달아 작품 속의 풍경이나 사물이 그림처럼 전개된다. 지훈의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고깔에 감추오고]를 입안에서 굴리다보면 어느 산사의 밤에 승무를 추는 비구니가 화면처럼 나타나고 소월의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를 흥얼거리다 보면 불붙는 듯한 진달래 꽃그늘에서 옷고름 입에 문 처녀가 떠오르게 마련이다. [사물을 제대로 보아낼 때 오묘함이 생기고, 세밀하게 옮겨야만 생생해진다(體物爲妙¸ 功在密附)]는 [문심조룡(文心雕龍)]의 작시법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좋은 시는 어떻게 써야 하는가. 이 문제는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의 정답을 갖고 있지 않을뿐더러 설사 어떤 정답을 찾아냈다 하더라도 그 답안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것도 아닐 만큼 복잡하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시창작에 전념하는 시인들은 혼신의 노력을 통해 자신이 걸어갈 통로를 확보하지만, 그 경우에도 수시로 길을 잊어버리는 경험을 갖게 된다. 그때마다 시인들은 저마다의 독자적인 대응법으로 그 미로에서 빠져나오지만, 아예 그 미로에 갇혀버리는 시인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작시법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지고 출발한 시인들에겐 독자적인 세계를 확보해나갈 수 있는 몇 가지 효과적인 전략적 대응법이 마련되어 있다.
자연이나 사물은 예술가의 선택에 의해 본래의 의미 대신에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예술가의 상상력에 따라 자연이나 사물은 그에 알맞은 새로운 형상을 갖는 것이다. 풀어 말해 독자는 예술가가 오브제로 제시한 사물을 보고 읽는 게 아니라 그 사물을 바탕으로 축조된 상상력을 보고 읽는 것이다. [사실을 읽는 게 아니라 그 사실을 기반으로 구축된 몽상을 읽는 것]이라는 바슐라르의 말과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시인이 선택한 오브제는 그 속성이나 정보가 표현하는 사실을 활용하는 수단이지 오브제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다.
예술가들, 그 중에서도 실체가 없는 언어를 통해 예술작품을 만들어내야 하는 시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제약은 오브제에 치중하다보면 [자신의 말이나 깨우침]을 마음껏 쓰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오브제를 묘사하기보다는 자신의 정서적 표현이나 삶에서의 크고 작은 깨우침을 날것으로 표현하는 시인들이 적지 않다. 이데올로기와 맞아떨어지는 오브제를 구하기도 어렵겠지만, 잠언류의 표현이 가져다주는 지적 허영의 유혹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문심조룡은 이런 상황을 가리켜 [신묘한 도리[道]는 묘사하기가 어려운 것이라서 아무리 정교한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의 극진한 부분까지는 설명할 수 없다.]며 이를 해결할 방안은 오직 [상상력]을 활용해야 한다고 그 원리를 일깨워 준다(37장 誇飾). 나아가 그 상상력을 만들어내고 증폭시키는 비결로 제시한 것이 [문심조룡] 36장의 비와 흥이다. [비(比)란 자신의 의도를 명백하고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적절한 형상을 빌려 비유하는 것을 말하고 흥(興)이란 모종의 숨겨진 의미를 사물에 의탁하여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지칭한다.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http://blog.daum.net/prhy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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