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적 시론>
시를 위한 몇 개의 단상斷想
이경교
1. 부활 시론
좋은 시인을 갖고 있는 시대는 분명 행복한 시대이다. 역설적으로, 시가 문화의 변방으로 떠밀리기 시작한 그 무렵부터 우리 시는 오히려 때깔이 짙어지고 깊이 또한 깊어지고 있다고 말하면 나만의 오해일까. 그것은 영상이 문화의 주류로 나서면서 개성을 잃기 시작했다는 내 진단과 짝을 이룬다. 상품성이 강조되다 보니, 영상물들은 유행의 물결에 휩쓸리거나 베끼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것은 윤택해진 사회조건, 후기 자본주의적 욕망이 요구하는 자본으로서의 예술, 생산물로서의 예술이 빚은 비극이다. 예술성이 대량생산의 욕구에 부응하거나 화폐가치로 전환되는 세계는 황폐한 예술시대의 서막이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시는 자유로운 장르이며, 버려짐으로써 높은 정신의 밀도가 유지된 예술분야이다. 이것은 분명 축복이다. 시가 죽은 시대는 오히려 위대한 시가 성장할 징후이며, 위대한 시가 출연할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회는 시의 고결성을 믿는 소수의 시인, 예술에 대한 집념과 그 잠재적 욕구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실현될 것이다. 사실 그러한 조짐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2. 뜻밖의 정경
지구의 지하핵은 엄청난 용광로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 내부는 측정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지하 2900킬로 안쪽의 핵 부분부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다. 정신의 어느 지점에서 돌연 마주치는, 저 극적인 변화야말로 깨달음의 상징이며, 전복적 반격의 다른 이름이다.
좋은 시는 극적인 변화 위에서만 가능하다. 세계의 반영이나 모사가 아니라, 전혀 뜻밖의 정경을 빚어냄으로써, 상투적 감수성이 아니라, 새로운 감수성을 이끌어내는 행위가 그것이다.
3. 차이로서의 자연
시는 시인의 내면화된 행동이다. 시인의 내면을 지배하는 요소 중, 자연에 대해 성찰해 보자. 자연이 더 이상 음풍농월의 잔재로 머무는 낭만주의 방식으로는 안된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인공적인 자연은 혐오감을 줄 수도 있다. 시인에게 선택된 자연대상은 사실 시대인식의 반영이며, 시인의 세계관이 투사된 현장이다.
21세기의 자연은 어떤 모습으로 해석과 여과의 과정을 거치는 걸까. 탈근대적 시대의 자연은 전근대적 인식으로서의 자연과 분명히 다르다. 이 시대의 특성을 탈중심decentering 과 소멸disapperance 이라고 부르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이 시대가 더 이상 중심이나 권위를 용인할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가 지적했듯이, 문화의 구조는 우열이 아니라 차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들이 다양성을 낳는다. 자연을 보자. 자연이야말고 다양한 차이들이 다양성을 낳는다. 자연이야말로 다양한 차이들이 평등하게 존속하는 현장이다. 자연 속엔 단풍드는 수종이 있는가 하면 상록이 있고, 침엽과 활엽이 나란히 서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연만이 아니다. 인간관계 속에 내재하는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는데서 타자지향적 세계관이 싹튼다.
시 쓰기란 무엇일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관계의 맥락으로 수렴되는 행위이다. 그 순간 시인은 이미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대상들 속에 자리한, 미소한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시의 영감이 빛나는 순간, 시인의 이상이 궁극에 도달한 유토피아의 상황인 것이다.
4. 열림과 번짐
시인의 사유방식을 열림과 번짐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그건 닫힘과 쏠림의 반개념이다. 노자老子가 유약이 견강을 물리친다고 말했을 때, 그 진의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부드러운 사고와 유연한 감성만이 상투적 인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인이란 제 몸 안에 새겨진 상처마저도 아름다운 문양으로 바꿔야 하는, 형벌을 받은 사람일 테니 말이다.
그렇다. 물은 삼라만상을 제 안으로 끌어들여 모양을 빚거나 형태를 변화시킨다. 물거울에 비친 산과 나무를 보라. 그것은 분명 현실의 산과 나무지만, 뭔지 새롭고 다른 느낌의 산과 나무가 되곤 한다. 그래서 한번 물에 젖으면 모든 사물은 축축해지고, 더 선명해지며 부드러워진다.
5. 감응
시인이 오브제를 선택하는 행위는 시인의 감수성 속으로 대상을 끌어들여 적시고 건져내는 행위는 아닐까. 침례浸禮의 절차처럼, 시인은 자신이 골라낸 시적 대상들을 스스로의 감동 안으로 침수시켜 전혀 다른 양태로 그것들을 변형하고 재조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창조적 정서를 감응感應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말 그대로 감응이란 사물에 접촉할 때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시인은 잘 감동하고, 그 감동으로 인하여 마음이 열리는 사람이다. 하찮은 사물 하나에도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이다. 그러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우선 대상과 시인 자신을 가르는 경계가 사라진다. 대상과 시인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좋은 시인일수록 사실은 그러한 감각적 착락을 자주 느끼는 법이다. 아니 그런 황홀한 신비체험을 빈번히 경험하게 된다.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는 대상을 자신의 감동 속으로 생포하는 일이며, 오브제들을 감응의 물로 적시고 헹궈내는 작업이다. 시인의 무의식은 언제나 그 일을 쉬지 않고 반복한다. 그렇다. 물에도 길이 있듯이 물에도 결이 있다.
충남 서산 출생
동국대 및 동대학원 문학박사
1986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이응평전」「수상하다, 모퉁이」등
저서 「즐거운 식사」「푸르른 정원」 등
현재 명지전문대 문창과 교수
계간 <<시와 산문>> 2009년 가을호 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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