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내리는 밤 / 김명기
마당 어귀, 잎 다진 대추나무 어린 가지
오들오들 떨며 우묵한 어둠을 끌어 덮는 밤,
끝단 해진 당신 작업복
늘어진 허리고무줄 같은 삶을 베고
돌아누운 아버지
끙끙 앓는 입내 소리처럼 연신 눈이 내린다.
시든 꽃무늬 벽지 위에 단단히 닻을 내린 채
오랫동안 유랑 중인 벽시계가
정교한 발자국 소리를 내며 남루한 밤을
대물림하는 시간 뒤란 작은 댓닢들이
물고 있던 바람을 뱉어 놓는다, 시간이란
이불 홑청을 한 땀 한 땀 기우는
바느질 같은 것이기에
서로 다른 길을 멀리 돌아가기도 하지만
당신이 고방 한구석에 벗어놓은 양말 속
수북한 살비듬이 이미 내게도 생겼으므로
결국 나는 가슴이 발등과 점점 가까워지는
속도를 닮아갈 것이다.
오래전 나를 지나 돌아누운 당신도
끝끝내 만나지 못할 지점을 향해
당신을 쫓아가는 나도
여전히 유랑 중인 벽시계를 따라
하염없는 저 눈 속으로 걸어가는 이 밤
뒷산 어디쯤에선가 고통의 근수를 견디지 못한
큰 나무들이 관절을 꺾으며 뚜둑뚜둑 비명을 지른다
- 시집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문학의 전당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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