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이야기 II] 어수선한 가을 보내고, 평안한 겨울 맞이하기 위해
[2010. 11. 29]
11월을 우리 말로 ‘이틈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달이라는 뜻의 예쁜 우리 말인데, 유래와 쓰임새가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일부 지방에서 쓰이던 옛 말인 듯합니다. ‘이틈’은 ‘이와 이 사이의 가느다란 틈’을 가리키는 말인 걸로 비춰봐서 아마도 11월이 가을인지 겨울인지 그 틈을 알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흐른다는 뜻 아닐까 싶습니다. 그 짧은 틈에 날씨도 참 오락가락하고, 턱없는 일도 참 많이 벌어진 11월이었습니다.
오늘은 가을을 보내며 눈에 들어왔던 열매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려 하는데, 그 전에 지난 주 편지에서 한 가지 바로잡아야 할 것부터 알려드립니다. 누린내풀(Caryopteris divaricata) 을 이야기하면서 그 꽃의 별명 중에 어사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뒤에 한 마디 보태기를 ‘옛날 어사들이 쓰던 모자’라고 했는데, 그건 제 앎이 모자란 탓이었습니다. 어사화는 어사들이 써서 어사화가 아니라, 임금을 뜻하는 御자와 임금이 내린다는 극존칭의 내릴 賜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결국 임금이 장원급제한 사람에게 내리는 꽃이라는 것이지요.
그게 틀렸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우리 ‘솔숲의 나무편지’를 꼼꼼히 봐 주시는 독자 분께서 알려주셨습니다. 하마터면 그냥 넘어갈 뻔했습니다. 모자람이 많은 앎을 깨우쳐 주시는 여러 독자님들의 도우심이 있어서 부끄럽지만 그래도 바르게 고칠 수 있어 고마울 따름입니다. 부끄러움 크지만 행복합니다. 지난 편지의 어사화에 대해 고쳐 알려주신 독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우리 ‘나무 편지’에서 눈에 띄는 오류가 있다면 언제든 알려주세요.
바람결에 겨울 내음 짙어지면서 나무들은 낙엽을 서둘렀습니다. 더 추워지기 전에 그 동안 수고했던 잎들을 내려놓아야 오는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을테니까요. 나무가 잎을 내려놓으면, 그 잎이 봄 여름 내내 양분을 모아 키워온 열매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제 갖가지 빛깔로 익어가는 열매들을 관찰해야 할 때입니다. 천리포수목원의 나무들에서도 그렇게 열매가 익어가는 중입니다.
오늘 편지에서는 찬 바람 불면서부터 눈길을 끄는 나무의 열매 이야기를 전해드리렵니다. 우선 맨 위 두 장의 사진은 나뭇잎이 새 주둥아리를 닮아 조구나무 혹은 오구나무라고 부르는 나무(Sapium sebiferum)의 열매입니다. 꽃 피었을 때 이미 보여드리면서, 오구나무는 열매도 참 예쁘다는 말씀을 드린 적 있습니다. 오늘은 그냥 사진만 보여드립니다. 저 열매들은 잎이 다 떨어져도 그대로 남아있을 겁니다.
오구나무의 열매에 이어지는 넉 장의 사진 속 열매는 칠엽수 종류(Aesculus pavia)의 열매입니다. 잎사귀가 일곱 개로 나눠진다 해서 칠엽수라 부르는 나무이지요. 어쩌면 우리 말 이름인 칠엽수보다 ‘마로니에’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나무이기도 합니다. 마로니에라는 이름은 한 장의 널따란 잎사귀(복엽)가 5~7장의 소엽으로 이루어진 비슷한 식물들을 한꺼번에 부르는 이름이라고도 하고, 서양에서 들어온 서양칠엽수만을 가리키는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정확히 하자면 우리가 칠엽수라고 부르는 식물은 일본이 고향인 Aesculus turbinata 라는 학명을 가진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마로니에가 칠엽수 종류 전체를 두루 가리킬 때 쓰는 이름이라면 칠엽수는 마로니에 가운데 한 종류가 되겠지요. 하지만 마로니에가 서양칠엽수(Aesculus hippocastanum)만을 가리키는 이름이라면, 칠엽수와 마로니에는 서로 다른 나무입니다. 그런데, 마로니에(marronnier)는 식물학적으로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프랑스의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이니, 마로니에라는 이름으로 나무의 종류를 세밀하게 구별할 수는 없지 싶습니다.
사실 칠엽수와 서양칠엽수도 그 생김새가 무척 닮았기 때문에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일반인의 눈으로는 불가능할 겁니다. 열매의 생김새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으니까요. 그 둘 중, 우리나라에는 칠엽수보다 서양칠엽수가 마로니에라는 이름으로 먼저 들어왔습니다. 서양칠엽수는 1912년에 네덜란드 공사를 지낸 분이 고종의 회갑 기념품으로 선물한 것을 계기로 들어오게 됐다고 합니다. 칠엽수는 그보다 십여 년 뒤인 1925년 쯤에 일본에서 들여온 것으로 알려졌지요.
칠엽수와 서양칠엽수를 포함하는 Aesculus 종류에 속하는 식물은 세계적으로 13~19종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서양칠엽수(Aesculus hippocastanum)입니다. 아마도 프랑스 몽마르트 언덕의 마로니에 가로수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서양칠엽수는 느릅나무, 피나무, 플라타너스와 함께 세계 4대 가로수로 손꼽히는 나무이지요. 가로수로 더없이 아름다운 서양칠엽수는 남유럽의 발칸반도 지역에서 자라던 것이 널리 퍼진 나무입니다.
프랑스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마로니에는 유명합니다. 서울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 때문입니다. 1975년까지 이곳에 있던 서울대 법대가 1975년에 캠퍼스를 관악구로 옮겨간 뒤에 공원으로 조성한 곳이지요. 현재는 동숭동 대학로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 마로니에라고 부르는 서양칠엽수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마로니에 공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곳의 마로니에는 일제 침략기인 1920년대 후반에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이 있던 때에 심은 것들입니다.
우리 천리포수목원에는 칠엽수에 속하는 몇 가지 종류의 식물이 있는데, 오늘 사진의 열매는 Aesculus pavia입니다. Aesculus pavia는 같은 종류인 칠엽수나 서양칠엽수에 비해 비교적 키도 작고, 잎사귀도 작은 편입니다. 또 잎사귀의 생김새가 칠엽수를 닮기는 했으나, 소엽의 숫자가 일곱 장인 것이 거의 없지요. 대개는 다섯 장의 소엽으로 돼 있어서, 칠엽수 종류라고 소개할 때마다 조금씩 머뭇거려지곤 한답니다.
늦봄에 피어나는 꽃에서도 차이가 있지요.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조금 작은 데다 색깔도 칠엽수나 서양칠엽수의 흰 빛과 달리 자줏빛이어서 독특한 느낌울 줍니다. 그러나 열매만큼은 여느 칠엽수 종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칠엽수 종류의 열매도 사진의 열매와 거의 똑같거든요. 밤을 닮았지만, 그보다는 조금 큰 편인 이 열매 때문에 서양에서는 칠엽수 종류의 나무를 아예 ‘말밤 Horse Chestnut’이라고 부르기까지 합니다.
지금은 다 떨어졌지만, 나무들이 낙엽을 서두르던 지난 시월에 하얗게 피어났던 꽃이 있었습니다. 개승마(Cimicifuga acerina)라는 여러해살이 풀입니다. 개승마는 미나리아재비과 식물의 하나인 승마(Cimicifuga heracleifolia)를 닮았지만, 승마가 아니어서 붙은 이름입니다. 식물 이름으로는 생경한 승마는 한자로 升麻라고 씁니다. 말을 탄다는 뜻의 乘馬와는 전혀 다른 뜻이지요.
승마는 잎사귀가 마(麻)를 닮았는데, 한방에서 약재로 쓸 때의 성질이 위로 오른다 해서 오를 승(升)을 앞에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약재로서는 갈색이나 검은 회색 빛을 가진 승마의 뿌리를 씁니다. 승마의 뿌리는 발열이나 두통을 비롯해, 인후염, 잇몸병, 피부병 등에 좋은 효과를 보이는 약재로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양의학에서는 오랫동안 매우 중요한 약재로 쓰였다고 합니다.
승마라는 이름을 가진 식물도 적지 않습니다. 승마와 개승마처럼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식물로 촛대승마(Cimicifuga simplex), 눈빛승마(Cimicifuga dahurica), 세잎승마(Cimicifuga heracleifolia var. bifida), 황새승마(Cimicifuga foetida)가 있는가 하면 범의귀과에 속하는 나도승마(Kirengeshoma koreana)와 외잎승마(Astilbe simplicifolia)가 있으며 그밖에 장미과의 눈개승마(Aruncus dioicus var. kamtschaticus), 한라개승마(Aruncus aethusifolius) 등이 있습니다. 이름은 같은 승마를 가졌지만, 전혀 다른 식물들입니다.
이 가운데 승마의 꽃은 8~9월에 피어나고, 개승마의 꽃은 그보다 조금 이르게 7~8월에 피어난다는 게 식물도감의 설명입니다. 그러나 우리 수목원의 개승마는 8월이 훨씬 지난 10월에 하얀 꽃을 피웠습니다. 갈수록 변화하는 우리네 기후 때문에 식물도감의 개화 시기는 적잖이 맞지 않습니다. 도감의 정보 중에서 다른 건 몰라도 개화 및 결실 시기가 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 그리 당황할 일도 아니게 됐습니다. 그저 그럴 수 있겠다 생각하고 넘어가는 수밖에요.
개승마는 30센티미터에서 큰 것은 1미터까지의 키로 훌쩍 솟아오르기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잘 뜨이는 식물입니다. 특히 하얀 색의 꽃이 줄기 꼭대기에 자잘하게 달리기 때문에 알아보기도 쉽습니다. 하얀 꽃술 하나하나는 7밀리미터 정도로 그리 큰 것은 아니지만, 한데 모여서 무성하게 피어나기 때문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지요. 게다가 잎사귀들은 땅 바닥에 낮게 드리워져 있어서 하얀 꽃들이 더 도드라져 보이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갖가지 스포츠 경기로 그저 즐거울 수 있었던 지난 며칠 동안이었습니다만, 도무지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들로 하루하루가 시끌시끌, 왁자지껄입니다. ‘뉴스 특보’라는 이름을 달고 뛰쳐나오는 새소식들로 편할 날이 없네요. 이틈달이라고도 부른다는 이 가을의 마지막 달을 잘 보내야 겨울을 포근하게 맞이할 수 있을 텐데, 정말 힘든 계절입니다. 이 고단함이 오는 겨울을 더 포근하게 지낼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었으면 좋겠네요. 그리 어수선하게 가을이, 그리고 ‘이틈달’이 지나갑니다.
모두 평안하시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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