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이야기 II] 봄부터 준비해온 아네모네와 베고니아의 겨울 채비
[2010. 11. 15]
숲을 걷다가 때 아닌 장미 꽃을 만났습니다. ‘가을에 피어난 장미’라는 말이 참 생경하면서도 삽상하게 다가옵니다. 우리 수목원에 그다지 흔하지 않은 식물 가운데 하나가 장미이기에 더 뜻밖의 반가움이었습니다. 예쁜 꽃들을 관람용으로 전시하는 여느 식물원이라면 장미를 따로 모아 키우고 전시하는 ‘장미원’ 을 조성할 법도 하지만, 우리 수목원에는 장미원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 장미를 여름도 아닌 깊어가는 가을, 우리 수목원 숲에서 만났다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큰 나무 그늘 사이의 한줌 햇살을 받고 있는 낮은 키의 노란 장미는 쌀쌀한 가을 바람을 견디기가 힘겨웠는지, 외롭고 쓸쓸해 보입니다. 자기의 때를 정확히 알고, 그에 맞춰 살아가는 식물들이지만, 가끔은 이처럼 뜻밖의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건 어쩌면 식물이 알아채기 힘들 만큼 우리 사는 세상의 흐름이 뜻밖으로 바뀌는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지난 주에는 인천 지역을 대표할 만한 나무인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를 찾아보고 그 나무 이야기를 연재 칼럼으로 썼습니다.(지난 주 신문 칼럼 보기) 800년 된 큰 나무여서, 단풍 드는 속도는 늦을 줄 알고 있었지요. 그래도 길가의 은행나무들이 우수수 잎새를 떨구는 걸 보고는 그의 안부가 궁금해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나무가 꽤 유명해지면서, 찾는 사람도 많아지고, 그런 탓에 주변 풍경에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기는 하지만, 나무는 언제 보아도 장합니다.
장수동 은행나무 앞에는 개울이 흐릅니다. 그리고 그 개울을 건너서 나무에 다가서게 하기 위해서 작은 다리를 하나 놓았지요. 그런데 이 다리는 이제 못 쓰게 되었더군요. 다리 한쪽을 완전히 막아놓았더군요. 주변에 들어선 식당에서 그 공간을 막고 주차장으로 쓰고 있었어요. 다리를 막은 이유를 적어 플래카드까지 적어놓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지구라는 푸른 별의 유일한 피부병이 바로 인간”이라고 한 차라투스트라의 니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수목원에는 바람 쌀쌀해지면서 피어나는 꽃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 아네모네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이미자의 노래를 통해 이름만큼은 아주 익숙한 아네모네입니다. 그때는 물론 아네모네가 어떤 식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노래를 듣기만 했었을 겁니다. 가끔은 어울리지 않게 따라부르기도 했을 겁니다. 아네모네라는 식물에 대해 알게 된 건 나이 들어서였습니다.
아네모네는 우선 우리 토종 꽃의 하나인 바람꽃 종류 식물의 속명입니다. 바람꽃이라는 우리 이름이 훨씬 예쁜데, 이미자의 노래에서는 왜 굳이 ‘아네모네’라고 했는지 조금은 우습네요. 그 바람꽃 종류에 속하는 식물로는 바람꽃(Anemone narcissiflora)을 비롯해 가래바람꽃(Anemone dichotoma). 국화바람꽃(Anemone pseudoaltaica), 꿩의바람꽃(Anemone raddeana), 들바람꽃(Anemone amurensis), 숲바람꽃(Anemone umbrosa), 홀아비바람꽃(Anemone koraiensis) 등이 있습니다. 모두 미나리아재비 과의 아네모네 속에 들어있는 식물들이지요.
그러나 조금 헷갈릴 수 있습니다. 아네모네 속이 아니면서도 바람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식물도 있어서입니다. 일테면 변산바람꽃(Eranthis byunsanensis), 너도바람꽃(Eranthis stellata) 등은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기는 하지만, 아네모네 속이 아니라 에란시스 속이고, 나도바람꽃(Enemion raddeanum)이나 만주바람꽃(Isopyrum manshuricum), 매화바람꽃(Callianthemum insigne)은 또 다른 속의 식물입니다. 그러니까, 바람꽃은 아네모네라고 불러도 되겠지만, 변산바람꽃을 아네모네라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네모네 속에 속하는 바람꽃 종류는 봄에 꽃을 피우는 낮은키의 식물입니다. 대개는 4월에 꽃을 피웁니다. 물론 아네모네 속이 아니라 에란시스 속의 변산바람꽃은 그보다 더 일찍 피어나지요. 이어서, 5월 되면 세바람꽃(Anemone stolonifera), 숲바람꽃, 쌍동바람꽃(Anemone rossii)이 피어나고, 바이칼바람꽃(Anemone glabrata)은 6월에, 가래바람꽃과 바람꽃은 햇살 뜨거워지는 7월부터 피어나 8월까지 피어납니다.
아네모네 속 식물 가운데 가을에 꽃을 피우는 종류도 있습니다. 우리 식물도감에서 대상화(Anemone hupehensis var. japonica)라고 표기한 식물이 그렇습니다. 오늘 편지의 연보랏빛 꽃의 식물은 대상화는 아니지만, 대상화의 한 품종인 Anemone hupehensis 'Hadspen Abundance'입니다. 대상화는 한자로 기다린다는 뜻의 待와 서리를 뜻하는 霜을 붙여서 만든 이름으로, 서리를 기다리며 피어나는 꽃이라는 뜻이지요. 뜻으로는 느낌이 좋은데, 한자여서인지 어감에서는 도무지 그 느낌이 살아나지 않는 이름입니다.
Anemone hupehensis는 늦여름부터 가을 깊어지는 10월 말까지 꽃이 피어납니다. 가을 바람꽃으로 부르면 좋겠지만, 바람꽃이라 하면 봄꽃의 이미지가 강한 탓에 왠지 어색해 보입니다. 가을 아네모네 정도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가을 아네모네는 봄 아네모네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키가 크다는 것입니다. 생육 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잘 자라면, 1미터까지 자라기도 하지요. 추위를 피하느라 낮게 자라는 봄의 바람꽃들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이 꽃은 얼핏 보면 가을 아네모네를 닮아 보입니다. 연하게 붉은 빛을 띠었다는 점이나 부드러운 꽃 모습이 그렇다 할 수 있지만, 그건 사진으로만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많은 차이가 있지요. 우선 꽃잎의 숫자부터 다릅니다. 가을 아네모네가 다섯 장의 꽃잎으로 피어나지만, 이 꽃은 네 장으로 피어났다는 것부터 다르지요. 게다가 꽃 송이 가운데에 돋아난 꽃술의 모습도 전혀 다릅니다.
베고니아(Begonia grandis)입니다. 베고니아라는 이름의 식물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열대 기후에서 자라는 식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세계적으로 베고니아에 속하는 식물은 매우 많은 편입니다. 약 9백 종이 있다고 도감에 기록돼 있으며, 지금도 더 많은 품종들이 선발되고 있는 식물이지요. 꽃이 오래 핀다는 특징 때문에 관상용으로 많은 사람들이 심어 키우며 좋아하는 것이죠. 위키백과에서는 베고니아를 세계 10대 속씨식물의 하나라고 설명했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에 이미 들어와 있던 베고니아 과 식물에는 사철베고니아(Begonia semperflorens)가 있습니다. 꽃베고니아라고도 부르는 사철베고니아는 이름처럼 사철 내내 꽃을 피운다는 점에서 화분에서 많이 키우는 브라질에서 들어온 식물이지요. 오늘 ‘나무편지’의 사진의 식물인 Begonia grandis 는 중국에서 들어온 베고니아입니다.
대개의 베고니아 속 식물이 열대와 아열대 기후에서 자라지만, 중국을 고향으로 하는 Begonia grandis만큼은 비교적 추운 곳에서도 자라는 내한성 베고니아입니다. 겨울 추위를 잘 견디는 식물이라는 이야기이지요. 워낙 종류도 많고 새로 선발해내는 품종도 많아서, 베고니아라는 식물에 대해 오늘 편지 안에서 모두 알려드리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저 역시 아직은 더 공부해야 합니다. 저로서도 이제 베고니아와 첫 만남을 가진 정도에 불과하거든요.
가을 숲에서 눈길을 끄는 꽃이어서, 사진에 담기는 했지만, 저도 처음엔 이 꽃의 정체를 몰랐습니다. 일단 사진으로 찍어둔 뒤, 수목원 지킴이들에게 물어물어 알게 된 거지요. 십년 넘게 우리 수목원의 식물들을 만나고 있습니다만, 이처럼 제가 모르는 식물이 우리 수목원에는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식물이 더 많은 탓일 겁니다. 베고니아도 그 중의 하나예요. 눈길을 끄는 식물이 있을 때마다 하나하나 캐물어 알아가는 재미가 우리 수목원 식물을 관찰하는 재미 가운데 하나이지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이 즈음, 천리포수목원의 숲은 눈에 띄게 빠른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식물들이야 제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그 변화가 빠르게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푸르던 잎에 울긋불긋한 단풍이 드는 것도, 또 쌀쌀한 바람에 우수수 낙엽을 떨어드리는 것도 식물로서는 긴 시간에 걸쳐 천천히 준비해온 과정일 겁니다. 조락의 계절이라 할 이 즈음에 화사한 빛의 꽃을 피우는 것도 식물에게는 봄부터 준비해온 결과일 테지요.
늦여름부터 화사하게 꽃을 피웠다가 이제 꽃을 떨어뜨리고 대개의 식물들이 주도하는 조락의 흐름을 따라가는 한해살이 풀 가운데 ‘풀솜꽃’이라는 예쁜 우리말 이름도 갖고 있는 불로화(Ageratum houstonianum)가 있습니다. 멕시코가 고향인 이 식물은 고향에서 푸대접을 받는 식물입니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의 우리나라에 날아와서는 무척 사랑받는 식물이 되었습니다. 더 오래 우리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 싶어서 지난 주에 쓴 또 하나의 칼럼에 불로화 이야기를 썼습니다. (신문 칼럼 보기)
겨울 오기 전에 푸른 하늘 아래 아름답게 단풍 든 나무 천천히 바라보는 여유를 한번 쯤은 꼭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아마도 잿빛 긴 겨울을 푸르게 날 수 있는 마음의 가장 강력한 채비이지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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