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어錢魚비늘 속의 잠 외 9편
전어錢魚비늘 속의 잠·1
김영자
둥근 한 켜 들추어 보았을 때 살 속의 그늘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오는 걸 밖으로 나온 살 마디들이 쨍그랑 소리로 깨어지는 걸 붉은 아가미의 잡목 숲에 싸인 몇 포기 지느러미는 알 수가 없었다지요 아가미 뚜껑 흑색 반점이 세상을 뜨면서 사막에 사는 쌍봉낙타를 얼마나 만나고 싶어하였는지 몰랐다지요 비늘은 껍질이 아니었다는데 푸른 살 은백색의 살 갇혀있는 가시의 집이었다는데 셀 수도 없이 서걱거리는 발자국 찍고 해가 지면 십만 개 넘는 알을 한꺼번에 쏟아낸다지요
우리들은 벗겨 내린 각질들을 짊어진 살점의 어미를 생각하며 청보랏빛 꽃나무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걸어들어 갔지요
전어 비늘 속의 잠·2
김영자
칼끝에서 벗겨지는 잠은 알몸이었다 벗겨진 잠을 파란 비닐봉지에 털어 넣고 있던 여자는 냄새를 썰었다 칼소리가 빨랐다 몸의 길이가 점점 헐리기 시작할 무렵 물 벗겨낸 전어 몇 마리 붉은 접시 위에서 길을 물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새 길 여는 소리 들려 묵은 잠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부스럭거렸다 단단한 물을 엮으며 도마 위에서 흔들리던 물풀이 키를 세우고 전어 꼬리는 잠속에서 끈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맑은 해가 둥둥 떠내려가는 저녁 무렵 굽은 산이 허리를 편다
봄굴비
김영자
생지느러미가 날고 있었다 마른 눈들이 빛나고 봄을 물고 있던 입술들이 벌어지자 칠산 앞바다에 올라붙었던 아가미들이 꽃자줏빛 살을 쏟아내고 있었다 노란 비닐끈 한 가닥 지푸라기의 눈물에 몸을 적시는데 물굴비들이 굴비 행세하는 세상의 아침에 짭쪼롬한 모래미마을 백수해안도로가 웃는다 조기 울음소리 가버렸지만 천의 몸을 엮었던 통나무 덕장 빈자리 법성포 사람들은 아직 젖은 몸에 소금을 문지른다 문지르고 또 문지르며 아가미에 소금을 넣는다 섭간을 한다
내가 섭간을 한다 내 젖은 몸에 간을 하며 달꿈을 꾼다 한 무더기 씀바귀꽃이여
망아지를 위하여 / 김영자
─소금에 대하여·3
나무바퀴를 돌렸다 연자매처럼 빙빙 돌렸다 지상에서 품고 내려온 망아지 이야기가 수레바큇살을 타고 돌았다
땅속 깊이 내려온 망아지가 돌고 있다 광부들의 손에서 어미가 되어 수레를 끌고 지상으로 지상으로 나른 소금덩이의 무게와 소금가루에 눈 먼 슬픔의 덩어리와 눈을 싸맨 헝겊의 길이에 감기고 있다
말발굽은 무덤에 가져가 소금꽃이라도 피웠으면 좋았지 뛰어볼 수도, 달려 볼 수도 없었던 소금덩이 무거워 무거워 쓰러졌던 관절 꺾이는 소리가 빈 소금집을 흔든다
소금호수 / 김영자
──소금에 대하여·4
물길이었다 소금뼈의 눈물이었다 새의 날개와 풀무치의 녹색 날개가 푸드득 푸드득 소금기둥에 묶인 높다란 산들을 데리고 내려오는 중이었다 물과 뼈 사이에 길이 생기고 킹가 대성전大聖殿을 짓던 광부들이 몸을 씻어 묵은 달을 건져내었다 깨끗해진 광부들의 얼굴이 호수 위에서 별처럼 뜨고 있다 물의 마디마디에 숨어 있던 칼날들이 실눈을 뜨고 웃는다
소금밥 / 김영자
──소금에 대하여·6
물이 울었다 풍경은 다시 그 물 속에서 울었다 지산동芝山洞 골목에서 양동良洞 골목에서 모든 골목 골목에서 주먹밥 만들던, 소금밥 던져주던 어머니들이 변두리에서 눈 뜨고 있던 시대와 솜이불 덮어 날아오는 총알 막았던 오월 아침 빛고을에서 어리디 어린 아이들이 입을 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소금물에 둥둥 떠다녔다 꼭꼭 숨겨놓고 차마 내보낼 수 없었던 울부짖음이 핏물자국이 구석구석에 박혀 우우 울던 계절의 밥덩이가 먼 나라 비엘리츠카 소금벽에 부딪치며 이동하고 있다 소금 끈이 이어지고 있다 밥과 물이 소통하고 있다
소금노을 / 김영자
──소금에 대하여·7
소금을 먹을 때마다 노을이 태어났다 노을이 태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자꾸만 소금을 먹었다 껍질이 된 노을은 붉은 해의 방에서 뽑아낸 실뭉치가 되어 물들고 수억 년 전 거대한 바다의 목숨이 되었다 뼈만 남은 빈 집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물이 모여 와 다시 길을 만들고 저공비행하는 새들이 몰려 와 구부러진 날개를 폈다 꽁지깃에 노을을 묶고 훨훨 춤을 춘다 밀봉된 끈을 날리며 비상한다
소금화석 / 김영자
──소금에 대하여·8
비늘도 아니고 꼬리도 아니어서 나뭇잎도 아니고 수염도 아니어서 늙은 봄의 흔적인가 했더니 가슴뼈 한 쪽에 남아있는 날것의 숨소리가 팔딱거리네
단단해진 틈새에 짠바람 돌아 살 속에서 솟구치는 푸른 힘줄이 살아있어 살아있어 깊은 잠을 자는 중, 물을 적시는 중이네
꽃삽 한 자루로 그리신 분의 그림이 물 속에서 지금 태어나는 중이네
재滓의 수요일 / 김영자
우리는 한복판에 서서 재를 받는다
이마에 재를 받는다
재를 받으며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일 잊지 않기 위해
엉겅퀴꽃빛 제의祭衣를 휘장처럼 흔든다
젖은 번개가 내리고 천 개의 달이 우는데
이마를 가시로 덮은 채
우리는 잔을 마신다
붉은 잔을 마시며 산을 넘는다
산을 넘어 안팎으로 찢겨진 살을
밟고 또 밟으며 둥근 무릎을 감싸고 빠져 나온다
감쪽같이 달아나고 싶었던 밤 숨기기 위하여
종려나무 잎새에 남아있는
나귀 발자국 소리와
뼈가 꺾이는 오후를
별들이 돌아가는 새벽 통로에
밀어 넣으며 집어 넣으며
우리는 오후 3시에 입을 맞추고 다시 입을 맞춘다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고 있는 우리
풀밭에서 훔쳐낸 햇빛 한 줌을
털어낸다 비늘처럼 털어낸다
물 밖에 선다
바람 밖에 선다
사각거리는 나뭇잎들도 비늘처럼 벗겨지고
우리는 눈 시리도록 흰 알몸이 되어
재의 수요일 자줏빛 옷을 입고 자줏빛 산을 넘는다
어둠리에서 / 김영자
기러기 떼가 낮게 떴다
어둠이라 불리는 동네에
초겨울 새벽 기러기들이 흰 달을
하나씩 입에 물고
떼지어 왔다 물갈퀴를 접었다
끼루룩 끼루룩 입을 열면서 흰 달을 쏟아내는
쇠기러기 날개에는 별들이 포개지고
우리들은 새벽미사를 마치자마자
산과 함께 갔다 나무들
눈뜨는 소리 귓속에 묻으며
어깨를 덮은 넓은 비듬을 툭툭 털어내었다
낮게 뜬 기러기 떼 처음 본다는
바오로 신부님 새벽 산길을 열고
우리들은 산봉우리를 오를 때마다
흰 날개를 하나씩 달기 시작했다
날개를 폈다 흰기러기가 되어
낮게 뜨기 시작했다
어둠의 껍질 안에서 붉은 해들이 손잡고
원을 그리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해의 몸들이었다
기러기들이 새끼 앞세우고
한 덩어리 되어
끼루룩 끼루룩 하며 날기 시작했다.
출처 / 시와산문 그리고 시와녹색 http://cafe.daum.net/k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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