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행위와 읽는 행위
나호열
■‘무엇을’과 ‘어떻게’의 문제
경상북도 고령읍 양전동 음각화는 높이 3미터 세로 6미터쯤 되는 바위에 상형되어 있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선사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의 생활상이나 제의祭儀의 풍습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라고 한다. 마을의 뒷산으로 올라가는 등성이 초입의 암각화를 바라보면서 나는 그 단단한 바위에 그림을 새겨넣고 있는 사람들과 완성된 암각화를 향하여 기도를 올리거나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의 환영을 따사한 봄볕 속에서 음미했다. 고고학자나 역사학자의 안목이 없으니 그저 땅바닥이나 도화지에 그린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함으로 치부해도 좋을 법 하지만 아마도 옛사람들은 그들의 어떤 목적 때문에 힘든 노역을 자처했을 것이다.
돌보다 단단한 철을 발견하기 전이었으니 돌로 다른 돌을 깎아 정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 목적이 굉장히 성스러웠거나 거부할 수 없는 희생을 요구할 만큼 권위적인 계층이 존재했을 것이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후대에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대의 필요와 요구가 암각화를 제작하게 만들었고 아직도 그 내용과 뜻을 해독하지 못하는 미스테리를 속시원하게 풀 수 있는 현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양전동 암각화나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지닌, 한 시대의 인간의 삶을 증언하는 자료로써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예술작품으로 격을 높이는 데에는 주저하게 된다.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모사 행위로부터 예술이 시작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고도의 직관적 심미안으로 완성되는 것이 또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더 범위를 좁혀 문학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문자를 매개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예술로써의 품격은 다양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을’이 주제적 측면을 다룬다면 ‘어떻게’는 기법이나 기술의 문제가 될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기법이나 기술이 좁게는 수사학修辭學의 범위를 뜻할 수도 있고 장르적 분지分枝로 넓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무엇을’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 거대한 사회현상으로부터 지렁이나 제비꽃과 같은 작은 생물이나 석탄이나 암모니아와 같은 무정물에 이를 수 있겠으나 그 핵심은 인간을 둘러싼 환경에 대응하는 태도의 드러냄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과 인간과의 갈등과 화해, 인간과 자연과의 대립과 조화, 더 나아가서는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와 관념 간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겠고, 심리적으로 촉발된 의식의 분열이나 불안과 같은 현상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무엇을’에 해당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층위를 섣불리 확정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고 해서 저급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고발하고 통일을 염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고급한 작품으로 인정받는다면 이는 어불성설일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에 내포된 다양한 의미를 곰삭일 수 있는 내공을 어떻게 쌓아가고 닦아갈 수 있는가를 자각하는 일이다. 시인이나 작가는 부처나 예수가 아니다. 이미 성불을 하고 바늘구멍 같은 하늘의 문에 도달했다면 구태여 글을 쓸 이유가 없다. 그래서 여기서 내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향해 가는 정신의 궤적이나 과정을 보여주는 일이고 거기에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학을 성취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무엇을’에 해당되는 몇 개의 풍경들
일반적으로 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여기서는 운문의 특성이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공간적 제약을 덜 받는다는 것이다.─ 비유를 통한 이미지 중심적인 특성을 갖는 반면에 산문, 특히 소설은 시 보다는 다양한 메시지를 시간적 계기성을 가진 사건으로 이야기한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어느 면에서 시는 도덕지향적인 측면이 있고 소설은 그에 비해 좀더 표현의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박세연의 소설 「꼬리」는 주목할 만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도시화되고 개인적 성향이 농후한 현재의 삶─가족의 의미, 성의 문제, 더 나아가서 익명을 요구하면서도 익명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역설적인 관계를 파헤치고 있는 작품이 「꼬리」이다.
딱히 그 사람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그 역시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으리라. 그럼에도 지금 내게는 그가 유일한 환상이고 설레임인 것은 분명하다. 그에게 무엇을 바라거나 언제까지 함께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지금의 자유로운 사랑이, 내 안의 평화가 깨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는 자위를 한다. 남편의 아내, 아들의 어머니는 없다. 지금 이 순간은 누구의 애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욕망, 절정에 이르고자 하는 간절함만이 절실할 뿐이다.
「꼬리」의 화자인 ‘나’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위의 묘사에서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여러 주제들이 끈끈하게 서로 들러붙어 있는 형국을 만나게 된다. 솔직하게 ‘영원’보다는 내 앞에 주어진 ‘찰라’에 눈돌리지 않는 자가 어디 있는가? 누구의 무엇이 아니라 온전한 나로 존재함을 갈구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는가?
‘나’는 남편과 아들이 있는 유부녀이고, ‘나’의 남편은 한 달에 한 번 집으로 돌아오는 지방에 주재하는 회사원이다. ‘그’는 부동산 임대업으로 재산을 모은 재력가이며 기러기 아빠이다. 그들은 화요일에 만난다. 즉 그들은 서로에게 화요일의 사람일 뿐이다. 관계의 부재는 그들의 행동을 합리화시킨다. 그들은 육체적 허기를 채우고 아무도 그러한 사실을 모른다는 익명성에 안도한다. 그러나 ‘나’는 ‘그’와 결별할 것을 결심한다. 소설에 나타난 바대로는 그런 ‘나의 결심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같은 아파트에 살다가 실종된 여자와 그 아파트에서 발견된 유골이 끝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는 ‘익명의 외로움’을 깨달아서인지 어미니가 의탁하고 있는 암자 스님의 행동 때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티벳에 가고 싶은데 먹는 것 때문에 갈 수가 없어. 하루 두 끼 식사가 전부인데 배가 고파서 수련을 할 수가 있어야지. 보살은 배고파 봤어요?” (중략) 티벳을 모르는 나는 그런 스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40년을 수행하신 분이다. 하루 세끼 밥에 수시로 차를 마실 수 있는 정도의 여유 때문에 수행을 망설인다는 것이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도 늘 허기를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육체가 수반하고 있는 ‘허기’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업業임을 깨닫고 있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나’는 교과서적인 양심 때문에 ‘그’와의 관계를 청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엔가 숨어있을 수밖에 없는 익명성이 참을 수 없는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고 자유를 처단하는 허기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나’의 남편은 조금 있으면 다시 타국으로 떠난다. 그럼에도 ‘나’는 그와의 단절을 위해 휴대전화를 던져버린다. 「꼬리」는 이렇게 끝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누군가의 가슴에는 사위어가던 불꽃이 일어서고, 어딘가에서는 그 불똥으로 재가 되어 쓰러지기도 할 것이다. 바람은 그렇게 변화무쌍한 비를 몰아오고 누군가의 삶을 바꿔놓을지도 모른다
이미 꼬리는 퇴화되어 우리에게는 없다. 없어졌지만, 그렇지만 꼬리는 우리의 정신 속에 틈입하여 여전히 바람을 일으키고 위선을 만든다. 그것이 순환되는 인간의 굴레이고 업인 것이다.
김신영의 시 「미안합니다」는 박세연의 「꼬리」가 탐색하고 있는 여러 주제 중에서 욕망과 시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 사이에 얼마나 많은 / 강물이 흘렀는지 모릅니다./ 세월이 흐르고 강물이 흐르고/ 두 번 다시 그 세월에/ 그 강물에 갈 수 없다는 아쉬움이/ 머리를 짓누릅니다./ 언제 우리가 만나서 즐겁게 웃었던 밤이/ 그렇게 빨리 지나가고/ 다시 눈 내리는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왔어도/ 다시 우리는 강물에 함께 발 담그는 세월을 낚지 못합니다.// 갈 수 없어 미안합니다/ 보고 싶어 꽃잎을 띄우며 잎차를 마시지만/ 아직 정리되지 못하고 잉태를 기다리는/ 뜻모를 날개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좋은 밤이 오면/ 언젠가 다시 같은 강물에/ 발 담그는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미안합니다」의 화자는 누구인가? 「꼬리」의 ‘나’인가? ‘나’의 ‘그’인가? 남편인가? 과거에 바람 났던 어머니인가? 그 누구도 아닐 수 있고 우리 모두일 수도 있는 화자는 도대체 무엇에게, 누구에게 미안함을 토로하고 있는 것인가? 「미안합니다」가 주는 노래와 서정의 즐거움과 「꼬리」가 주는 사건 훔쳐보기의 즐거움은 독자에 따라서 평가가 매우 다를 것이다. 만일 시 「미안합니다」를 엇나간 사랑의 회고라고 의미를 좁혀서 이해한다면 「꼬리」의 ‘나’가 가정으로 돌아오는 ‘허기’의 깨달음과 얼만큼 다른 것인가?
■읽기의 즐거움 혹은 괴로움
현대적 삶의 특징은 쾌락으로 가는 통로가 다양하고 강렬한 자극을 충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망원경으로 멀리 내다보는 삶이 아니라 현미경으로 세포 하나하나를 짚어보고 그 세포 하나하나를 자극하지 않으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없는 관성에 빠진다. 하나로 통합해서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를 각기 다른 조각들로 분해해서 그 미로 속에 스스로 함몰하는 것.
나는 가슴 속의 어떤 연애나 광기도/ 이 무시무시한 곳까지 함께 들어오지/ 않는다 목소리는 어디에 있고 몇 군데는/ 자아가 분리된 채 아무도 책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배부르다/ 새벽이 울부짖는다/ 우리는 감출 것이 없다/ 우리는 무엇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가/ 우리는 불평할 수 없다//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다// 수천 개의 불빛이 한 개의 의자를 밝혀주지 못하니/ 새벽을 사랑하는 자도 없다/ 어딘가 몇 군데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다만 미래에 만날 사람은 아직 사랑이 필요하다// 저녁이 울부짖는다/ 목소리는 날아간다/ 우리는 할 말이 없다/ 아무도 책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이 없는 길마다 폐허다
──박순선 시 「건방진 독서」 전문
관계의 소멸을 노래하는, 아니 자아의 파멸을 증언하는 이 시는 전통적 시법으로 읽을 때 과연 시라고 할 수 있는 지 의문이 들만큼 난해하다. 박순선의 시를 평한 글을 읽어도 역시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오늘의 시를 메타텍스트metatext라 했을 때, 박순선의 시는 여기에 해당된다. (중략) 박순선은 삶에서 마주치는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떠나고자 한다, 시에서 추구하는 것은 과거와 같은 복제된 현실이 아니라 오늘의 진실을 바르게 찾고자 하는 시각이다.(하략)
어떤 독해도 오독일 것이다. 아마도 어떤 독해에도 정답은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시에서 단언하는 것은 모든 것은 불완전하고 관계를 맺는 순간 파괴되고 분절되며 ‘다만 미래에 만날 사람은 아직 사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 시에서는 어떤 도덕적 가치나 계몽적 교훈을 암시하지 않는다. 날개 없는 새, 다리 없는 포유류, 인생이란 내용 없는 책을 읽는 맹목의 허위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하는 절규일 뿐이다. 가치의 전복顚覆과 어법의 파괴는 전율을 일으킨다.
박주택이 『현대 한국시』 창간호 대담 「한국 현대시 100년, 파괴의 시학」에서 진단한 내용을 읽어보자.
최근의 시적 경향은 오랜 관습이었던 표현론적이고도 반영론적인 세계관을 넘어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전의 경향과는 다른 지점에 놓여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문화론적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현실 존재 저편을 접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환각에 가 닿고 있기도 합니다. 현실과 존재의 해산을 통해서 의미의 해산에 이른 것입니다.
이미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는 우리에게 당도해 있다. 그 사실은 싫어도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쓰는 행위’는 시간의 증언이며 자아의 확인이다. ‘읽는 행위’는 ‘쓰는 행위’의 동전의 앞면이면서 뒷면임을 인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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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 1953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으며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낙타에 관한 질문』외 8권이 있고, 1991년 시와시학 중견시인상, 2005년 녹색시인상 수상을 수상했다. 현재 인터넷문학신문 발행인, 월간 『예술세계』 편집주간으로 있다.
출처 / 시와산문 그리고 시와녹색 계간평 http://cafe.daum.net/k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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