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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모진 비 바람에도 결실을 준비하는 식물의 약동

by 丹野 2010. 7. 25.

 

 

 

[천리포 이야기 II] 모진 비 바람에도 결실을 준비하는 식물의 약동




   [2010. 7. 26]

   지난 주말에는 충남 지역에 큰 비가 집중됐습니다. 서천 지역에 시간당 70밀리미터의 집중호우가 쏟아져 내렸는데, 하룻새에 내린 비의 양이 무려 316밀리미터나 됐다고 합니다. 천리포수목원에도 한꺼번에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적잖이 혼란스러웠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큰 연못의 물이 넘쳐서, 그 주위의 오솔길이 모두 잠기고, 그와 함께 식물들도 물에 잠겼다는 거죠. 손 쓸 틈 없이 내린 큰 비로, 우리 수목원에 이만큼 큰 비가 내린 건 한두 번 정도밖에 안 될 겁니다.

   큰 연못의 물은 수로를 통해 바다로 빠지게 돼 있는데,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내린 물을 연못이 견디지 못하고 연못 바깥으로 뱉어낸 겁니다. 다행히 무참히 쏟아지던 비는 오래 계속되지 않아 넘쳐 흘렀던 연못 물은 서서히 빠졌습니다. 주말에 우리 지킴이들이 모두 나서서 흙탕물을 뒤집어 쓴 식물들을 씻어주고, 길을 닦아내면서 차츰 정상을 되찾아가는 중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비 오기 며칠 전의 화창한 한낮, 수목원 언덕 너머의 암석원 쪽 작은 연못에는 마름모꼴의 비스킷이 물 위로 솟아올라왔습니다. 수련 꽃이 활짝 피어있던 자리에 올라온 재미있는 광경이었어요. 달콤하게 생긴 비스킷이 연못 위를 가득 채웠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맛난 비스킷을 꼭 빼어닮았을까요. 마름모꼴의 두 변은 칼을 대고 잘라낸 듯 반듯하고, 다른 두 변은 리본을 자를 때 쓰는 가위를 이용한 듯, 톱니 무늬가 규칙적으로 정교하게 새겨진 비스킷입니다. 가끔씩은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불량 비스킷까지 눈에 들어와 더 재미있습니다.

   수련이나 연꽃처럼 물 속에서 자라는 마름(Trapa japonica)의 잎을 보고 비스킷을 떠올린 겁니다. 마름은 물에서 사는 대표적인 식물입니다. 마름은 연못 아래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는 비스킷처럼 생긴 잎사귀가 물 위에 닿을 때까지 줄기를 길게 뻗어 올립니다. 잎이 달리는 잎자루에는 굵은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공기를 담은 공기 주머니여서, 물 위에 뜨는 겁니다.



   마름은 마름과(Trapaceae)에 속하는 한해살이풀인데, 이 과에 속하는 식물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우리 식물도감(도감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있는데, 저는 이창복 선생님의 ‘대한식물도감’을 기준으로 공부합니다)에는 마름보다 잎의 크기가 작은 애기마름(Trapa pseudo-incisa)가 있을 뿐입니다. 영문 식물도감(영문 도감으로는 Dorling Kindersley Publishing 의 The Royal Horticultural Society A-Z Encyclopedia of Garden Plants으로 공부합니다)에는 이 두 가지 식물은 나오지 않고, Trapa natan 이라는 종류만 나왔더군요.

   그 도감의 해설 부분에는 이 과에 속하는 식물이 30종 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것 역시 이견이 있는 듯합니다. 마름과의 식물이 맺는 열매의 생김새가 다양한데, 이를 하나의 종으로 분류해야 할지에 대해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네요. 다양한 열매를 중심으로 분류했을 때에 30 종의 식물이 마름과에서 발견된다는 겁니다.



   이 열매를 영어권에서는 Water chestnut(우리 말로 옮기면 '물밤' 정도 될까 싶습니다)이라 부릅니다. 열매에 전분과 지방이 많이 포함되어, 식용으로 쓰기도 하는 까닭에 붙은 이름인 듯합니다. 열매를 맺으니 당연히 꽃도 피어나지요. 7,8월에 피어나는 꽃은 4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졌는데, 약간의 붉은 기운이 도는 흰 빛입니다. 실제의 꽃은 저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여름 가기 전에 마름 꽃을 꼭 찾아보아야겠습니다.

   마름 비스킷이 걸판진 잔치를 벌인 연못 가장자리에는 삼백초(Saururus chinensis)가 하얀 꽃을 피웠습니다. 삼백초는 약초로 많이 쓰이는 식물이어서, 실제 식물을 보기는 쉽지 않아도 그 이름만큼은 많이 듣게 되는 식물입니다. 우리 수목원에서는 잘 가꾸고 있지만, 삼백초는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2급으로 분류된 희귀 식물의 하나입니다. 제주도 서남쪽 바닷가에서만 자생지를 발견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최근에는 우리 수목원을 비롯한 몇몇 식물원에서 잘 보존하고 있어서, 삼백초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늘었지만, 여전히 잘 보존해야 하는 희귀식물입니다. 삼백초는 우리 수목원의 연못 가장자리에서 자라는 것에서 보듯이, 물을 좋아하는 여러해살이 풀입니다. 잘 자라면 50~100센티미터 쯤 자라는데, 천리포수목원의 삼백초는 지금 약 60센티미터 쯤 자라서 하얀 꽃을 피웠습니다.

   삼백초는 여러 질병에 큰 효과를 보이는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습니다. 플라보노이드의 일종인 퀘르체틴, 퀘르시트린 이라는 성분이 삼백초의 주요 성분인데, 이는 고혈압 동맥경화 등에 효과가 탁월하고, 간의 해독작용에도 뛰어난 효과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염증을 완화하고, 항암작용까지도 보이는 등, 매우 좋은 약효를 가지는 약초입니다. 옛날 진시황이 찾던 불로초가 바로 삼백초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지요.



   최근에는 희귀식물임에도 불구하고, 삼백초라는 이름으로 많이 팔리는 식물이 있습니다만, 이 가운데에는 삼백초와 같은 과에 속하는 비슷한 식물인 경우도 있습니다. '어성초'라고도 부르는 약모밀(Houttuynia cordata)이 그것입니다. 약모밀과 삼백초는 친척 관계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다른 식물이고, 약효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를 약으로 쓰려면 세심하게 주의해야 합니다. 약모밀도 지금 꽃을 피웠지만, 오늘은 삼백초 이야기만 하고, 다음 편지에서 약모밀 이야기 전해드리겠습니다.

   삼백초(三白草)라는 이름은 이 식물의 세 가지가 하얗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뿌리와 꽃, 그리고 이파리가 흰 색입니다. 하얀 색의 꽃을 특이하다고 할 수야 없겠지요. 게다가 하얀 뿌리는 캐보기 전에 드러나는 게 아니어서, 역시 별나다 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하얀 잎입니다. 모든 잎이 하얀 것은 아니고, 위쪽의 잎 가운데 두 세 장이 하얀 색입니다. 다른 잎에 비해 인공적인 색깔이어서 특이합니다.



   위 쪽 두 세 장의 잎이 하얗다는 이유 때문에 삼백초의 이름에 얽힌 또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어느 한 여름에 산 길을 걷던 한 신선이 피로에 지쳐서 갑자기 심한 두통에 시달려야 했답니다. 하릴없이 잠시 멈춰 서서 다리쉼을 하던 중에 어디에선가 묘한 냄새가 날아왔어요.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신선의 두통은 씻은 듯 사라졌고, 피곤에 찌든 몸에도 금세 활력이 넘쳐났습니다. 신선이 야릇한 냄새를 내뿜는 풀을 찾아보았더니 새 하얀 잎사귀를 석 장씩 달고 있는 풀이 있었어요. 석 장의 하얀 잎을 가진 풀, 신선은 그 풀의 이름을 삼백초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재미있지만, 모든 삼백초가 규칙적으로 석 장의 하얀 잎을 달고 있는 건 아닙니다. 어떤 개체에서는 하얀 잎을 한 장도 찾아볼 수 없고 어떤 개체는 겨우 한 장의 하얀 잎을 달고 있기도 합니다. 평균적으로 하얀 잎을 두 세 장 달고 있다는 것인데, 실제 우리 수목원 삼백초들의 경우는 하얀 잎을 한 장 달고 있는 것과 한 장도 달지 않은 것이 더 많습니다. 꽃이 피면서 잎이 하얗게 변한다고 하는데, 아직 꽃이 활짝 피어난 건 아니니, 좀더 두고 볼 일입니다.



   중국의 신선 전설에서 삼백초에서는 묘한 향기가 난다고 했는데, 실제로 삼백초에서 그리 좋은 냄새가 나는 건 아닙니다. 이 냄새를 '송장 썩는 냄새'라 하여, 삼백초를 '송장풀'이라고도 부를 정도이니까요. 하지만, 전설에서처럼 냄새가 멀리까지 진동하는 건 아닙니다. 이 냄새는 다음 편지에서 이야기할 약모밀에서도 비슷하게 나는 독특한 냄새입니다.

   꼬리 모양으로 피어나는 삼백초의 꽃은 사진에서처럼 끝 부분을 아래로 숙이고 휜 상태로 피어나지만, 다 피어나면 곧추 서는 모양으로 바뀝니다. 사진의 꽃은 아직 끝 부분이 다 피어나지 않은 상태여서 덜 일어선 겁니다. 하나의 길이가 대략 15센티미터 정도 크기로 피어납니다. 예뻐서라기보다는 약으로 쓰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탓에 유명세를 치르면서 이제는 우리 곁에서 영영 사라질 지도 모를 위기에 처한 우리 식물 삼백초입니다.



   수목원의 크고 작은 식물들이 서서히 열매 맺기에 나섰습니다. 물론 가을에 꽃을 피우는 식물들도 있지만, 이른 봄부터 싹을 틔우고 해와 바람과 비에 맞서 꼼짝 않고 자기 자리를 지켜온 식물들에게 여름은 양분을 가득 모아 가을의 결실을 준비해야 하는 가장 바쁜 시절입니다. 열매를 맺으려 애쓰는 식물들의 안간힘이 생각나 이 즈음에는 나무 꼭대기를 쳐다보게 됩니다.

   그런 생각으로 문득 고개 들어 나무 가지 끝을 올려다보다 반갑게 만난 가래나무(Juglans mandshurica)의 열매입니다. 말 한 마디 없이, 꼼짝 않고 제 자리에 서있는 나무들이 소리없이 벌이는 생명의 약동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여름입니다. 더워도 비 내려도 하릴없이 더 좋은 결실을 위해 우리도 바짝 고삐를 조여야 할 계절이 바로 이 여름이지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