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의무
장 미셸 몰푸아(프랑스 시인)
(번역: 박성창/서울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서구에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전설 중 하나인 오르페우스 신화에 따르면 시인(詩人)은 지옥의 괴물들을 순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고 시(詩)라는 것이 정말 그런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 시인들은 여러 민족간의 평화 증진을 위해 시인들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를 모색하기 위하여 세계시인대회의 깃발 아래 한자리에 모였다. 나는 오늘 여기서 시인의 ‘의무’를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여기서 ‘의무’라 하는 것은 시 자체에 내재하는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시가 갖추어야 할 것, 시의 도덕성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시의 본질적 요소를 시인의 의무와 연결시켜 접근하는 것은 기존의 시인에 대한 전통적 시각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임을 필자는 잘 인식하고 있다. 예로부터 시인은 신들이나 뮤즈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을 바탕으로 영감을 얻어 활동하는 존재라고 여겨져 왔다. 시인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렇듯 신비한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로 간주되어 왔으므로, 이러한 능력에 대한 책임을 논하기보다는 면책적 특성을 더 많이 부각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최악의 경우, 시인은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또 아무 말이나 해도 되고 거짓말을 늘어놓아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결국 시가 스스로의 무덤을 파게 되어 이러한 특수한 능력도 잃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는 시인의 능력이나 빅토르 위고가 이야기했던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논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시인의 책임에 대하여 논해야 할 때가 왔다. 시인에 대한 네오플라톤주의적 비유들, 예를 들어 ‘가벼움의 존재’‘날개를 가진’ 혹은 ‘성스러운 존재’ 등에서 벗어나 오늘날 시인들이 시를 쓰기 위해 짊어져야만 하는 책임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자는 것이다. 글쓰기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뼈를 깎는 행위’이며, 따라서 스스로에게서 오는 좌절감을 비롯한 다양한 방해요소로부터 끝없이 도전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견뎌가며 지속해야 하는 행위인 만큼, 책무·짐·의무 등의 개념은 어떻게 보면 글쓰기라는 행위에 본래 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의 첫 번째 의무는 언어에 대한 의무이다. 시인은 정성스럽고 섬세하고 특별한 시선으로 언어를 대하는 작가이다. 각 낱말의 의미를 치밀하게 되새겨 보는 사람, 그러나 각 단어들의 사전적 정의에만 만족하지 않고, 그 잠재적 의미들을 파악할 줄 아는 사람, 스스로의 잠재력을 바탕으로 언어에 스스로를 비춰 보며, 언어를 재배치하는 사람, 언어가 가지고 있는 화려한 기억들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다. 언어의 적확성과 언어의 창조능력을 감지하는 사람이며 알파벳 스물네 자를 경건함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말라르메가 희망했던 것처럼 자신의 언어 속에서 하나의 독트린, 하나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 시인의 첫 번째 의무이다. 이것은 자신의 시어를 안정화시키고 고정시키는 책임이며, 스스로를 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책임이다. 이것은 또한 까다로운 글쓰기 작업의 소산물로서의 시가 ‘초자연적 조건’을 충족하게 되는 순간 그 시에 대해 가지는 책임이기도 하다.
시인의 두 번째 의무는 세상에 대한 의무로 깨달음과 관심의 의무이다. 시인은 외부세계 모두가 시인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는 존재이다. 시인은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시선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대상에라도 눈길을 주어야 하며 침묵의 세계를 위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빵과 바구니, 무연탄을 위해서도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은 우리가 서 있는 이 대지, 우리만큼이나 여리고 찰나적인 이 대지를 대신하여 말한다. 시인은 연결하고 결합하고 분리하면서 세계 속에서 실재를 만들어 낸다. 관계를 포착하는 것이 시인의 일이라면, 포착한 관계가 진실된 것이 되게끔 만드는 것이 시인의 의무이다.
시인이 아침과 저녁의 노을을 노래할 때, 먼 곳을 응시하거나 혹은 우리 가까이 있는 것들을 부각시킬 때, 혹은 실제로는 동떨어져 있는 현실들을 이미지를 통하여 연결시켜 표현할 때, 시인은 시간과 공간의 자취를 더듬으며 우리 존재의 자오선을 그려낸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를 통해 우리 존재의 경계를 긋고 그 경계선을 넘어서며, 새로운 경계선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여기서 바로 시인의 경계선에 대한 의무가 생겨난다. 우리 삶의 위대함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이 ‘두 개의 심연 사이에서 이토록 소박하면서도 충만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며, 이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바로 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보고 말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다른 것’에 시선을 주는 사람이다.
이러한 경계선에 대한 의무, 그것은 기억과 제안의 의무이다. 작품을 만들어 내는 시인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존재하게 될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과거에 대해서,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이중의 책임을 지게 된다. 현재를 구현하는 것, 즉 ‘우리는 어떤 시간 속에 존재하는가?’‘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등의 질문에 답하는 것도 시인의 소임이지만, 시인의 시선은 늘 보들레르가 표현한 대로 ‘심오한 시절’을 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시인은 ‘과거의 사물들을 다루는 사람’(말라르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은 현재의 찰나적인 모습을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생생하게 그려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무’의 경계선 속에 위치시키고 그려내야 한다.
시인의 세상에 대한 의무는 타자에 대한, 동포에 대한, 혹은 후세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시인은 동포들을 향해 말하고 노래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시적 언어들을 통하여 그들의 정체성에 끝없이 물음표를 던짐으로써 그들의 존재에 견고함을 부여한다. 즉자와 대자를 고찰하고, 동일한 것과 다른 것을 함께 바라보며, 모든 존재, 모든 사물들과 대면함으로써 ‘무엇이 본연의 것인가?’와 ‘무엇이 다른 것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가 열정과 신중함과 고통으로 사랑하는 존재들을 노래할 때, 우리 곁의 혹은 사라져버린 존재들을 노래할 때 그것은 사랑의 작업이 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기보다는 진심으로 감동시키고자 할 때, 그것은 사랑의 의무가 된다. 시는 단순히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벌거벗은 마음들을 손으로 어루만지듯 다가가야 하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의무는 사고와 감성과 느낌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즉, 인간의 삶을 이루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것에 대한 의무이다. 시인은 외부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눈을 떼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내적인 모든 것, 욕망과 생각과 슬픔과 기쁨, 희망과 절망 중 어느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옥타비오 파즈가 시인은 영혼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시인이 인류의 비인간적인 면까지, 우리의 내면을 충족시키는 것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공허함을 만드는 것까지 모두 포용하여 인류의 영혼을 감시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불평과 찬사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요, 가치와 감성의 언어를 구가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다.숫자에 맞서 격조를, 억측에 맞서 운율을, 기계음과 장사치의 소음에 맞서 리듬을 살려내기 위해 저항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다. 존재 안에서 혹은 존재를 통해서 일정한 품위를 구가하는 것, 고차원적 의미에서 존재와 환경이 일관성과 일체성을 이루도록 하는 것도 시인의 의무이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인간정신을 성숙되게 하기보다는 분리시키고 멀어지게만 해온 사람들 사이에 연결점을 찾아주는 것도 시인의 몫이다. 관찰의 의무, 성찰의 의무, 깨달음의 의무, 관심의 의무, 특수한 시선의 의무 등 시인의 의무 중 상당부분은 결국 시인의 시선에 관한 것이다. 일차적으로 시인은 자신의 시선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자신의 시선을 펜으로 옮기는 것, 자신의 생각을 문장으로 담아내는 것도 시인의 책임이다. 시인이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건 아니건, 예언자이건 단순한 목격자이건, 시인은 자신의 시야 안에 육안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포괄해야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생트 뵈브 반박론(Contre Sainte-Beuve)에서 제안한 예술가의 정의를 상기해 보자. 프루스트에 따르면 예술가란 자신의 시선을 통해 추함과 무의미함의 베일을 우리 눈에서 걷어내는 사람,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무심해지게 만드는 그 베일을 걷어 내 주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이것을 보라, 이것을 보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다.
1907년 ‘시인과 현시대’라는 제목의 회의에서 위고 본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은 예술가를 ‘그 안으로 모든 것이 모여드는, 그리고 모여들어야 하는’ 사람으로 정의하였다. 예술가는 모든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초점이다. ‘예술가의 눈에는 눈꺼풀이 없는 셈이다.’
시인의 의무에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다소 시대에 뒤진 듯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희망의 의무와 아름다움의 의무가 있다. 희망은 ‘절망의 에너지’에서부터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글쓰기라는 고된 작업을 힘겹게 지속해 가면서 우리는 그 속에서 희망을 끌어올릴 수 있다. 희망한다는 것은, 앙리 미쇼 식으로 정의한다면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나는 신뢰와 희망을 주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글쓰기의 윤리에는 진실의 의무 외에도 ‘좌절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의무’와 같은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작가란 심지어 그 자신의 저항과 반항마저도 지상의 조건을 더 잘 감내하기 위한 양분으로 쓰이게 하는 사람이다.
선(善)과 오랫동안 혼동되어 왔던 미(美), 보들레르는 아름다움을 감정과 윤리로부터 분리된 차갑고 냉혹한 여신으로 숭배했다. 랭보 역시 미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조롱하였다. 모든 현대시는 상실과 전복, 수치와 살인 등 미와는 반대되는 것들을 추구하고 있다. 몇몇 현대 글쓰기에서는 추한 것, ‘무기력하게 내던져진 것’을 의도적으로 모색하는 듯하다. 여기서 시는 출입금지(off-limits)와 혼동된다. 나는 독일 시인인 미셸 크루거의 말을 인용하며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고자 한다.
모든 시에 내재하는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을 애타게 갈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를 읽은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아름다움을 찾는 과정에 합류하고 싶어한다. …… 추한 것을 추구하는 자, 쓰레기를 추가하고자 하는 자들은 굳이 시라는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늘날 시인의 의무는 인간적인 것이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 그것을 보여 주고 가려내 주는 것, 그래서 지도를 그려 주는 것이다. 시인의 임무는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비인간성을 부각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를 살게 하는 것보다 파괴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시는 상황을 악화시키거나 혹은 해결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의 존재 근거를 찾아 주고자 한다. 우리가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준점들을 고집스럽게 종이 위에 그려 가는 것이 바로 시이다.
우리의 삶을 조금 덜 부조리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시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시인들이 작위적으로 미화시키거나 사물의 진실을 속이는 대신 우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의 일상 속에 얼만큼의 꿈과 욕망이 존재하는지를 그대로 보여 주기를 원한다. 행인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희망과 사랑의 조건을 한 마디의 간결한 언어로 전달해 주기를 원한다. 삶과 죽음의 시간을 말해 주기를 원하고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를 삼켜 버리는 나락 속에 빠져 들지 않도록 도와주기를 원한다.
결국 우리가 시인으로부터 바라는 것은 벌거벗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진실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급진적이며 우리의 삶의 근거를 재조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의무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시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시가 그 궁극적 목표를 무엇이라고 천명하든, 시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 이유를 삶 속에서 생생하게 되짚어보게 하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을 대면시키고, 시간의 축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대비시킴으로써,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를 구분해 줌으로써, 시는 우리 존재의 근거를 드러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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