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주차
사이버시창작교실
독자의 입장에서 시 쓰기
시를 잘 쓰고자 욕심을 부리다가 곧잘 빠지게 되는 함정이 독자들의 共感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묘수가 없나 하고 궁리하게 되는 일이다. 자신이 겪은 체험이 남들에게는 일어날 확률이 적다거나 기발한 착상이라고 무릎을 칠 때 책상머리에 앉게 되는 것인데, 그럴 때마다 먼저 뇌리에 들어와 앉는 것이 이런 나의 생각을 독자들이 얼마나 잘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분명 共感은 同感과 다른 법인데 어느새 공감이 동감과 혼동되어서 뒤죽박죽 생각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다. 시가 어렵다고 생각되어지는 까닭은 한 편의 시를 해석하는 능력의 차이에서 온다. 아무리 어려운 시라 하더라도 그 시를 쓴 시인도 독자와 다름없는 사람이고. 시인도 독자와 마찬가지로 감각과 이성으로 생각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공감은 시인이 시 속에 벌려놓은 시의 논리적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이고, 동감은 시인이 시 곳곳에 부려놓은 사상이나 주장이 자신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가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사실일까? 과연 그럴까?
寒食
고영
寒食날 뜬 달이
유난히 둥글고 환하다.
방금 벌초를 끝낸 봉분처럼
잘 다듬어져 있다.
어느 문중 조상인지
참, 시원도 하시겠다.
그늘 한 점 없다.
누구인가.
저 양지 바른 하늘에다
묘를 쓴 이는.
예문으로 든 시는 고영의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에 수록된 시이다. 마침 이 시를 시를 공부하는 분들과 함께 읽었는데 나는 이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설을 들려주었다.
이 시는 삶과 죽음의 對立 項이 ‘봉분’과 ‘달’이라는 유사 관념으로 비유됨으로써 자연스럽게 하나로 합치되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봉분’과 ‘달’의 둥글다는 形態素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친밀함을 보여주고 있고, 삶의 터전인 이 우주가 또한 우리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쉽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단박에 莊子의 齊物論이나 상대주의적 死生觀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시를 읽으면서 시 속에 녹아들어 있는 장자의 사유를 부지부식간에 알아듣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양지바른 것은 하늘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陰地이며 難局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자 어느 한 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질문을 던지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寒食의 절기에는 ‘유난히 둥글고 환한 달’이 뜰 수 없다는 것이었다. 寒食은 24절기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고유의 풍습으로 우리에게 전해오는 명절이 아닌가? 한식은 冬至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므로 아무리 계산해도 만월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문답을 조금 더 진행해 보자.
문: 유난히 둥글고 훤하다고 하였으므로 그 달은 보름달임에 틀림없다
답: 시에 비유된 봉분은 원형이 아니고 반원형이다. 마지막 연을 보아도 하늘에 뜬 달과 봉 분의 모습은 엎어진 반원형이다.
문: 그렇다면 유난히 둥글다는 표현은 반달에 들어맞는 표현이 될 수 없지 않은가?
답: 그렇다, 반달이기 때문에 사실 둥글지도 않고 환하지도 않다. 그러나 우리의 주관적 인 식은 사실적 인식과 다를 수도 있다. 시인의 ‘유난히’라는 표현은 반달임에도 완전히 둥 글고 환하다는 느낌을 전달하는 수식어이다.
문: 아무리 시인의 주관이 허용된다 하더라도 사실과 일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시의 제목도 한식이라고 되어 있지 않은가?
답: 꼭 이 시의 한식을 동지로부터 105일 되는 날로 규정하는 것보다 ‘찬 음식을 먹어야 하는’ 개연적 현실로 이해하면 되지 않겠는가?
문: 이해할 수 없다. 차라리 ‘추석’ , ‘시월 상달’ 이라는 제목을 붙인다면 이해가 훨씬 쉬울 것 같다.
답: 이 시를 쓴 시인의 생각이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질문자의 생각이 옳은 지, 나의 해석 이 맞는지, 시인이 이 모든 것을 감지하고 쓴 것인지는 여백으로 남겨둔다.
아마도 시인은「寒食」을 놓고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시집 말미에 붙은 이윤학 시인의 발문 중에 다음과 같은 지적은 시의 있어서의 논리적 구조가 무엇인가? 시로서 시인이 독자에게 전해줄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시인은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뭔가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강요하는 순간, 일방통행이 되고 만다. 독자들 스스로가, 어떤 공간으로 끌고 들어가 상상하게 만들면 그만인 것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상상의 영역이나 상상의 품목을 지정해 줄 수 없다. 이렇게 읽어라, 저렇게 감상해라 참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가 시를 읽음으로써 어떤 사유를 일으킬 것인지를 충분히 계산하는 것은 시인의 막강한 전략일 수가 있다.
寒食
동지(冬至)부터 105일째 되는 날.
청명절(淸明節) 당일이나 다음날이 되는데 음력으로는 대개 2월이 되고 간혹 3월에 드는 수도 있다. 양력으로는 4월 5․6일경이며, 예로부터 설날․단오․추석과 함께 4대 명절로 일컫는다. 한식이라는 명칭은, 이 날에는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다는 옛 습관에서 나온 것인데, 한식의 기원은 중국 진(晉)나라의 충신 개자추(介子推)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개자추가 간신에게 몰려 면산(山)에 숨어 있었는데 문공(文公)이 그의 충성심을 알고 찾았으나 산에서 나오지 않자, 나오게 하기 위하여 면산에 불을 놓았다. 그러나 개자추는 나오지 않고 불에 타죽고 말았으며, 사람들은 그를 애도하여 찬밥을 먹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에 종교적 의미로 매년 봄에 나라에서 새불[新火]을 만들어 쓸 때 이에 앞서 일정 기간 구화(舊火)를 일체 금한 예속(禮俗)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식날 나라에서는 종묘(宗廟)와 각 능원(陵園)에 제향하고,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주과(酒果)를 마련하여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만일 무덤이 헐었으면 잔디를 다시 입히는데 이것을 개사초(改莎草)라고 한다. 또 묘 둘레에 나무도 심는다. 그러나 한식이 3월에 들면 개사초를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날 성묘하는 습관은 당(唐)나라 때 중국에서 시작하여 전해진 것으로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 고려시대에는 한식이 대표적 명절로 숭상되어 관리에게 성묘를 허락하고 죄수의 금형(禁刑)을 실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민속적 권위가 더욱 중시되어 조정에서는 향연을 베풀기도 하였으나 근세에는 성묘 이외의 행사는 폐지되었다. 농가에서는 이 날 농작물의 씨를 뿌린다.
시를 읽는 독자들의 수준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단도직입적으로 ‘시가 무엇인가?’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우물쭈물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 나름대로 직관적인 ‘시’의 관념을 가지고 있고 시를 읽는 자신의 통로를 가지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의 시를 읽는 독자들이 자신보다 훌륭한 식견과 논리적 해석력을 구비하고 있다고 상정하고서 시를 쓸 때 훨씬 긴장감을 유지할 수가 있다.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고영 시인의 시집에 쓴 이윤학 시인의 말을 더 옮겨 보자.
대다수의 시인들은 독자들에게 독재자로 군림하기를 원한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 일일이 짚어줘야 속이 시원해지는가 보다. .... 말을 한 만큼 시는 망가지고 만다. 말을 참은 만큼 시는 빛나게 된다. 시인이라면, 어린애처럼 칭얼거려서는 안 된다.
자, 이제는 시를 읽는 독자의 입장은 어떠한가? 좋은 시를 가려 읽는 독자들을 이해하는 일은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지름길을 찾는 일과 다름없다. 아래 글은 『시 읽는 기쁨』(정효구 엮음, 2005년 4월, 작가정신)의 서평이다.
좋은 독자는 예문의 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시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와 논리를 찾는 훈련에 익숙한 독자는 표면에 떠오르는 부유물이 많은 - 시인의 주장- 시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 말은 좋은 독자는 시인을 ② 압축과 절제의 연금술사로 이해하므로 시을 읽는 행위를 ③시인과 정신적 편력을 함께 나누는 즐거움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앞서 말한 공감의 진정한 의미라고 말할 수 있다. ④그러므로 좋은 독자는 한 편의 시를 감상하면서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은 여러 체험들을 분석하고 종합하면서 새로운 삶의 꿈을 뭉게구름처럼 피워올리는 것을 즐거워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좋은 독자를 염두에 둔다는 것은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과 다름 없다. 어떤 면에서 시인과 독자는 숨은 그림을 찾는 놀이를 하는 존재들이다. 많은 조각들을(이미지들) 이리저리 맞추는 과정(논리적 유추)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한 판의 그림이(시인의 주장) 이발소의 그림처럼 조잡하고 유치하다면 한 편의 시는 그대로 묻혀버리고 말 것이다.
①시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와 논리 찾아라
겨우내 쌓였던 그리움 때문일까?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에서 목련, 벚꽃에 이르기까지 이른 봄에는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나무들이 줄을 섰다. 그 중에서도 하얗고 커다란 꽃송이로 하늘을 꽉채우는 목련은 봄의 꽃으로 전혀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봄의 상징이라 할 목련을 보고도 사람들의 느낌은 저마다 다르다
잎이 피기도 전에 뚝뚝 떨어지는 꽃을 보고 절망을 노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좋은 시절 다 지났다는 생각을 뒤엎고 피어나는 푸른 잎을 예찬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다.
관점은 자기만의 개성과 창의적 사고를 대변한다. 중요한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떤 사물과 현상에 대한 이해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곧 사물에 대한 이해와 의미부여 과정이 얼마나 충실한가가 그 관점의 타당성과 설득력을 말해준다면 ‘시 읽는 기쁨’은 이런 논리적 근거를 마련하는데 큰 힘이 될 책이다,
알다시피 ②시는 압축과 절제의 예술이다. 짧은 시 속에는 시인의 관점과 창의적 사고가 깔려 있고, 그래서 ③시 읽는 과정은 시 속에 담긴 행간의 의미를 이해하며 시인의 정신적 편력을 함께 나누는 일이 된다. 한 마디로 시의 이해 또한 논리적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시를 이해하기보다 외워 온 독자들에게 시인의 관점과 논리란 버거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만한 논리적 사고와 훈련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독자들에게 ‘시 읽는 기쁨’은 시를 이해할 수 있는 논리적 사고와 방법을 보여주고 훈련시킨다.
④최승호의 시 ‘전집’을 살펴보자. 이 시는 ‘놀라워라. 조개는 오직 조개껍질만을 남겼다“는 단 한 줄로 이루어졌지만 수 없이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먼저 이 시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지적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무언가를 남기려는 행위는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때로 보다 많은 것을 남기려는 인간의 욕심은 삶을 탐욕과 어리석음 속으로 밀어 넣는다. 시인은 이 점을 경계한다. 이무런 욕심없이 살다 오직 껍데기 하나로 생을 마감한 조개를 보며 시인은 삶의 아름다움과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 모두를 시인은 단 한 줄로 줄여버린다.
글쓴이는 절대로 서두르거나 다그치는 일이 없다. ‘벚나무 꽃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은 듯’ 책을 읽다 보면 행간에 숨은 시인의 뜻을 알 것 같고 시인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것 같다. 시의 향기와 더불어 우리의 이해력과 사고력이 쑥쑥 자랄 것 같다.
문재용, 오산고 국어교사
2005년 4월 16일 동아일보 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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