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주차
사이버시창작교실
언어에 대한 성찰
나 호 열
1.
텔레비전 연속극은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생활의 한 단면을 드러내주기도 하고 또 삶의 꿈을 불러 일으켜 주기도 한다. 어째든 분명한 것은 그 수많은 연속극들이 한결같이‘남녀의 사랑’을 극 전개의 필수요소로 채택하고 있으며. 그 결말은 대개가 기쁘고 행복하게 마무리 된다는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뻔한 주제를 가지고도 수 십 년 동안 시청자들을 울고 웃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사랑’에 얽힌 주제는 대동소이해도 등장인물의 배경과 사건이 색다르다는 데에 있다. 우리의 삶은 비슷해 보여도 다른 점이 너무 많고, 너무 다른 것 같아도 비슷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글을 쓰는 것도 연속극의 속성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른 듯 해도 비슷한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 우리의 글감은 무수히 존재한다. 어찌 보면 최근의 문학이론처럼 우리가 쓰는 일체의 글은 어딘가에서 무의식적으로 베끼거나 모방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것이 패스티쉬의 기법이던 키취이던 간에 이전에 우리가 읽고 보았던 어떤 텍스트의 인상이 마치 새로운 오늘의 창작물로 둔갑되는 듯한 인상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수많은 시인들이나 작가는 끊임없는 懷疑 속에 빠진다. ‘정말 이 글이 이 세상에서 최초의 나만의 글인가?’ 그리고는 그러한 회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새로운 문장과, 기법과 새로운 이미지의 탐험에 기꺼이 나서기로 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탐험의 중심은 ‘언어’이다. 시인이나 작가들에게 ‘언어’는 표현의 도구이면서 자신이 도달해야할 최종 목표이기도 하다.
시각적인 예술은 이미지를 던져주기 때문에 그것이 사유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그것으로 사유할 수는 없다. 언어 없이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접했을 때, 그로 인해 어떤 이미지나 느낌, 생각의 편린들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언어로 구체화되기 전에는 다만 무정형의 덩어리로 머릿속에 들어 있을 뿐이다. 시각적인 예술도 그 밑바탕에는 언어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2005년 3월 12일자 조선일보에 게제된 채호기 시인이 발표한 글의 일부분이다. 이 글은 영상매체의 발달과 생활화가 자칫 사유의 깊이를 저해하며 사유의 근본이 ‘언어’에 있음을 주장하는 것을 논지로 하고 있다. 새로울 것도 없고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조금 더 읽어 내려가다 보면 우리가 숙고해야할 문제가 제기된다.
언어는 사용하면 할수록 세련되고, 민감해지고 까다로워진다. 거꾸로 촌스러워지거나, 둔감해지거나 느슨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물며 늘 새로운 언어를 찾는 문학언어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빠르고 심하다. 뿐만 아니다. 언어는 사유의 깊이나 정황의 복잡성에 따라 그 표현도 까다롭고 어렵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한 때 쉽고 잘 읽히는 작품들이 선호된다는 이유로 그것을 지향하는 문학적 경향들이 있었다. ..중략... 문학 언어의 추세나 점점 복잡해지는 세계상황을 볼 때 ‘쉽고 잘 읽히는 작품’을 선호하는 것은 거꾸로 가는 길이다. ...중략... 과감하게 문체를 실험하고 새로운 언어를 개척하는 젊은 문인들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있더라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쓴 것은 뱉고 단 것을 삼키는 행동은 학습효과가 아니라 본능이다. ‘쉽고 잘 읽히기’를 지향하는 것은 독자들의 본능적인 욕구이지만, 창작자가 그런 요람의 유혹에 빠져서는 작가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작가로서의 부끄러움은 ‘박학다식의 결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자신만의 應戰의 사유를 정형화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이다. 삶의 고통은 불전이나 성경 읽기와 이해, 각종의 종교활동을 통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는 삶의 고통과 아픔에 더해서 그 속에 숨어있을 ‘아름다움’을 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언어 이론은 개념 단위의 언어가 애매한 관념의 덩어리임을 주장한다. 언어에 의한 개념은 무한히 분화되는 관념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에 의해서 시각적 이미지를 불가피하게 파생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눈으로 보여지는 시각적 감각보다 언어로부터 자극되어지는 관념 또는 이미지에 더욱 집중해야할 필요가 있다.
언어에 대한 자각은 몇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로는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회화에 사용되는 언어들과 문학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이 다르다고 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런 근거 없이 문학 작품에 일상적인 언어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작품의 현실성과 극적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 사투리나 비속어, 유행어가 한정적으로 차용될 수 있지만 그런 자각의 의도가 없이 무차별하게 사용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둘 째로 비유의 참신성을 위한 노력이다. 많은 부분에서 직유는 그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고 은유의 기법도 환유의 기법에 그 영역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쉽지 않은 작품들은 복잡한 은유의 중복적 구조와 언어의 유추가 확대되고 깊어졌다는 데에 그 어려움이 있다. 일부러 독자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전문적인 평론가들을 향해서 글을 쓰는 작가는 없다. 작가들은 쉽게 왔다가 쉽게 바람처럼 떠나는 독자들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세계에 다가오는 깊은 사유를 지닌 독자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환타지 소설이 오늘날 크게 유행하고 있는데 그런 소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상상력이 없다면 어떻게 진행될 수 있겠습니까. 시는 사실과 허구의 접점에 서 있는 것이며, 체험과 상상력이 절묘하게 버무려진 밀가루 반죽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밀가루 반죽으로 빵을 만들거나 국수를 만들거나 자장면을 만들거나 그것은 만드는(글을 쓰는) 사람의 자유이겠지요. 제 결론은 체험과 상상력이 모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시에 따라 체험이 우세하면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이 될 것이고 상상력이 우세하면 모더니즘이나 상징주의 계열의 작품이 될 것입니다.
이승하의 주장처럼 체험에서 상상력으로 가는 길목에서 확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언어이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대단한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언어의 관습적 사용에서 탈피하고 자유를 얻는 것은, 즉 자신만의 문체를 가진다는 것은 대단히 매력적이고 행복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2.
소요문학 3월호는 한 겨울의 움추렸던 어깨가 활짝 펴지는 듯한 싱그러움이 퍼져 나온다.
시에서는 전통적인 서정의 기법이 두드러진 이미라 시인의 <3월>에서부터 나름대로 언어의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듯한 허부경 씨의 <시간차>까지 다채로운 작품 감상이 즐거웠다. 이미라 시인의 안정적이고 여성적 서정은 더욱 연륜이 더해지는 듯한 기품을 느낄 수 있다. 한옥순 시인은 발상의 기발함이 돋보이는 작품을 선보이는데, <빈집>과 같은 병렬식 구도와 너무 많은 지문은 작품의 긴장과 정밀성을 현저히 약화시킨다는 점을 고려했으면 하는 바램이 생긴다, 특히 끝의 두 연은 과감히 생략되었을 때 시의 깊이가 배가되는 것이 아닌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허부경 씨의 시는 시 구조의 계속적인 실험을 거듭하고 있는 듯하지만,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와 소재를 연결하는 묘사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부탁드리고 작품의 개요를 암시해주는 제목의 설정도 보다 명확하게 제시했으면 하는 바램을 갖는다.
하미순 씨의 경우에는 허부경 씨의 경우와는 상반되게 시의 제목에 이미 시의 내용이 노출되어 있어서 시 읽는 즐거움을 반감시키고 있다. <아버지.1>의 경우도 독자들이 상식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내용을 진술함으로써 시 읽는 긴장을 풀어놓고 있다. 한 가지 덧붙여 말씀드린다면 마지막 연과 같은 작법은 앞으로 가급적이면 지양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가득 채우는 것도 어려웠지만
버리긴 더 버거울 것 같네요
아
주
많
이
이 번 달에는 시보다는 산문이 훨씬 읽는 즐거움을 주는 것 같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체험한 것들을 진솔하게 드러내면서 한 번쯤 음미하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드러날 때 산문을 읽는 즐거움이 있다. <이번 명절엔>은 자매들이 함께 모여 뮤지컬을 관람하며 우애를 돈독하게 한 체험을 그렸고, <가지지 않는 소유>는 화병 속의 꽃을 사유하면서 가지지 않는 것이 진정한 소유라는 깨달음을 적절한 비유와 인용을 통해서 드러내었다. <소라 껍데기와 나>는 조개구이를 먹으면서 버려지는 껍데기로부터 우리 삶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솜씨가 돋보였고, < 20년 전에>는 표제 그대로 20년 전의 자신을 지나간 일기를 들추어보면서 회상하는 밝은 마음씨가 환했고, <착각에 대한 반성문>은 도시로 대변되는 공동생활에서 벌어지는 이기심과 오해와 화해의 과정을 한 편의 소설처럼 엮어내는 솜씨가 두드러졌다.
굳이 옥의 티를 고르는 심정으로 몇 가지를 지적한다면 앞서 말한 정확하지 않은 언어의 구사가 보였다는 점이다.
‘빠알간 글자의 2퍼센트 부족한’ 은 2월이 짧은 달임을 드러낸 표현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빵빵한 음악소리’ 또한 좋은 표현이 되지 못한다
‘느닷없는 욕망(慾望)으로 단명(短命)하는 꽃들의 생(生)이 단축(短縮)되지 않도록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고 보는 것이 더 좋다.’ 에서 ‘느닷없는 욕망’은 ‘느닷없는 인간의 욕망’이나 ‘꽃을 곁에서 바라보겠다는 단순한 욕망으로’ 등등의 표현으로 바꾸어주는 것이 글의 흐름 상 생경함을 덜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조명 발을 받으며 비까 번쩍하게’ ‘시선을 아삼삼하게’의 표현도 격에 어울리지 않는 표현임을 지적하고 싶다.
‘피력(披瀝)하고 있다’라는 뜻은 자신의 의견을 드러낸다라는 뜻인데 이미 작품 속에 드러난 주장이므로 피력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부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조개구이 먹음을 목적으로 두고’라는 표현도 ‘조개구이를 먹겠다고’ 정도로 고쳐보는 것이 어떨까? ‘소낙비처럼’은 마땅히 소나기 처럼으로 바꾸어야 하고 ‘함께 동거하던 룸메이트에게’는 룸메이트가 동거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단어이므로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시인이나 작가는 자신만의 문체를 가지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표현과 표준어의 사용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덧붙여서 이 번 달의 산문에 주문을 한다면 글의 압축과 글의 구성에 보다 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작품을 쓸 때 분량을 정해 놓고 글을 완성한다면 훨씬 글이 간결해지고 표현력이 강화될 것이라고 믿는다. 대부분의 산문이 결말 부분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글이 설명조로 흘러버리는 경향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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