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 싸인 바다 저 너머엔 꿈이 있을까… 아프리카-유럽의 관문 모로코 ‘탕헤르’
국민일보 | 입력 2010.02.03 17:44
카스바의 허물어진 옛 성벽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유럽을 꿈꾸는 창(窓)이다. 해뜨는 지중해와 해지는 대서양이 지브롤터 해협에서 만나 하나로 흐르고, 옅은 해무를 베일 삼은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얼굴을 마주한다. 사하라 사막이 고향인 베르베르족 사나이가 아프리카의 '작은 유럽'을 꿈꾸듯 모로코 최북단의 탕헤르 항에서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모로코의 도시는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옛 수도인 페스는 회색, 매혹의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을 떠올리게 하는 카사블랑카는 하얀색, 팝송 '마라케시 익스프레스'로 유명한 마라케시는 붉은색, 휴양도시 에사우미라는 푸른색이다. 그러면 유럽과 아프리카의 관문으로 불리는 탕헤르의 꿈은 어떤 색깔일까?
바람개비를 닮은 수십 기의 풍력발전기가 앙증맞게 돌아가는 스페인 최남단 타리파 항. 지브롤터 해협 너머로 희미한 해무에 둘러싸여 중중첩첩 수묵화를 그리는 대륙이 아프리카이다. 그리스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벌려 놓았다는 지브롤터 해협의 폭은 평균 60㎞로 가장 좁은 곳은 14㎞.
시시각각 변하는 탕헤르의 저녁노을은 한 폭의 수채화이다. 지중해에서 솟은 태양이 대서양의 품에 안기면 카스바(요새)를 황금색으로 채색한 태양 속에서 갈매기들이 날아오른다. 성냥갑 모양의 하얀 건물들이 분홍빛으로 물들 즈음 카스바의 좁은 골목은 항구로 마중 나온 베르베르족 가이드들의 피부색을 닮는다. 수많은 여행가와 모험가들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널 때마다 맞닥뜨린 풍경이다.
'사진은 과장되어 보인다. 사진은 실재에 비해 너무 기묘하거나 환상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라. 사진은 충분히 환상적이지 않았다. 사진은 실재의 절반도 전달하지 못한다. 탕헤르가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낯선 땅이다.'
'톰 소여의 모험' 등으로 유명한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이 낭만의 증기유람선을 타고 1867년에 탕헤르에 첫발을 디딘 소감이다. 탕헤르의 실제 풍경이 사진보다 훨씬 환상적이라고 평가한 31세의 무명작가 마크 트웨인은 모로코와 유럽 여행기를 미국 신문에 게재했다. 그리고 5개월 후 귀국했을 때 그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지브롤터 해협과 이웃한 탕헤르는 전략적 요충지로 일찍이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7세기 말에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었다. 유사 이래 20개국이 넘는 열강의 통치를 받은 탕헤르는 2차대전이 끝나고 독립한 모로코에 1957년 반환될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번화하고 이색적인 도시 문화를 꽃피웠다.
140여 년 전 마크 트웨인이 증기선을 타고 탕헤르를 찾은 것도 이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은 당시 탕헤르의 집들은 '거의 1층이나 2층이고 벽은 두꺼우며 바깥부분은 회칠을 했고 직물 상자처럼 사각형이며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평평하고 모두 회반죽으로 발라져 있었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현재는 프랑스풍으로 건설된 신시가지의 고층빌딩이 해안선을 따라 빼곡히 들어서 당시의 흔적은 메디나로 불리는 아랍의 구시가지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구시가지는 탕헤르 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카스바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카스바는 15세기 말에 포르투갈이 세운 요새. 허물어진 성벽 안에는 마크 트웨인이 목격했던 성냥갑 모양의 허름한 건물이 무질서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공간만 있으면 기존 건축물에 방, 층, 벽을 덧붙이는 모로코의 건축철학 때문이다. 골목 위에 집을 건축한 것도 모로코 구시가지의 특징.
메디나의 골목길은 탕헤르 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정도로 좁은데다 미로처럼 연결되어 자칫 길을 잃기 십상이다. 메디나의 집들은 한낮에도 대문과 창문이 굳게 닫혀있다. 적의 침투에 대비하고 외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육책이다. 그러나 메디나의 골목길은 생각만큼 답답하지 않다. 대문과 벽을 원색으로 채색함으로써 폐쇄적 구조로 인한 답답함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메디나의 좁은 골목길은 제이슨 본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한 영화 '본 얼티메이텀'과 몇 편의 007 영화 무대로도 등장했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암살요원 제이슨 본이 건너편 건물의 옥상으로 점프하던 다이내믹한 추격신과 복잡하고 지저분한 골목길은 모두 탕헤르의 메디나를 배경으로 삼았다.
탕헤르의 메디나는 문학작품의 배경으로도 등장한다.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서 보물을 찾아 여행을 떠난 양치기 소년은 여행 첫날 탕헤르에서 가진 돈을 몽땅 도둑맞는다. 그리고 여행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점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상점도 탕헤르의 메디나가 배경이다.
모로코 전통의상 젤라바를 입은 남자와 히잡을 두른 여인들이 모여 흥정을 하는 작은 시장은 옛 유대인 지구 옆에 위치한다. 시장이래야 과일과 야채 등 먹거리를 땅바닥에 펼쳐놓은 난전에 불과하지만 고즈넉한 메디나에서 가장 생기 넘치는 곳이라고나 할까. 느닷없이 모스크 앞에 주차한 행상트럭에서 팝송 '호텔 캘리포니아'가 흘러나온다. 비록 아랍 국가이지만 성당과 모스크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모로코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리라.
이슬라믹 아치가 이색적인 골목길들은 거대한 대포가 지브롤터 해협을 향해 검은 입을 벌리고 있는 성벽을 향한다. 성벽에서 바다로 난 조그만 문을 나서면 바닷가 언덕이다. 탕헤르 항을 비롯해 지브롤터 해협과 트라팔가르 해전이 벌어졌던 바다, 그리고 해무에 둘러싸인 유럽 대륙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역사의 현장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관광버스의 바닥에 매달려 유럽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모로코의 아이들이 부지기수라는 것. 아프리카의 무엇이 철없는 아이들에게 목숨을 걸고 버스 바닥에 매달려 지브롤터 해협을 넘게 하는가.
모로코 아이들에게는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을 벌려 놓았다는 헤라클레스가 야속할 뿐이다.
탕헤르(모로코)=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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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를 닮은 수십 기의 풍력발전기가 앙증맞게 돌아가는 스페인 최남단 타리파 항. 지브롤터 해협 너머로 희미한 해무에 둘러싸여 중중첩첩 수묵화를 그리는 대륙이 아프리카이다. 그리스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벌려 놓았다는 지브롤터 해협의 폭은 평균 60㎞로 가장 좁은 곳은 14㎞.
시시각각 변하는 탕헤르의 저녁노을은 한 폭의 수채화이다. 지중해에서 솟은 태양이 대서양의 품에 안기면 카스바(요새)를 황금색으로 채색한 태양 속에서 갈매기들이 날아오른다. 성냥갑 모양의 하얀 건물들이 분홍빛으로 물들 즈음 카스바의 좁은 골목은 항구로 마중 나온 베르베르족 가이드들의 피부색을 닮는다. 수많은 여행가와 모험가들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널 때마다 맞닥뜨린 풍경이다.
'사진은 과장되어 보인다. 사진은 실재에 비해 너무 기묘하거나 환상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라. 사진은 충분히 환상적이지 않았다. 사진은 실재의 절반도 전달하지 못한다. 탕헤르가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낯선 땅이다.'
'톰 소여의 모험' 등으로 유명한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이 낭만의 증기유람선을 타고 1867년에 탕헤르에 첫발을 디딘 소감이다. 탕헤르의 실제 풍경이 사진보다 훨씬 환상적이라고 평가한 31세의 무명작가 마크 트웨인은 모로코와 유럽 여행기를 미국 신문에 게재했다. 그리고 5개월 후 귀국했을 때 그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지브롤터 해협과 이웃한 탕헤르는 전략적 요충지로 일찍이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7세기 말에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고 15세기부터는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었다. 유사 이래 20개국이 넘는 열강의 통치를 받은 탕헤르는 2차대전이 끝나고 독립한 모로코에 1957년 반환될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번화하고 이색적인 도시 문화를 꽃피웠다.
140여 년 전 마크 트웨인이 증기선을 타고 탕헤르를 찾은 것도 이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은 당시 탕헤르의 집들은 '거의 1층이나 2층이고 벽은 두꺼우며 바깥부분은 회칠을 했고 직물 상자처럼 사각형이며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평평하고 모두 회반죽으로 발라져 있었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현재는 프랑스풍으로 건설된 신시가지의 고층빌딩이 해안선을 따라 빼곡히 들어서 당시의 흔적은 메디나로 불리는 아랍의 구시가지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구시가지는 탕헤르 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카스바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카스바는 15세기 말에 포르투갈이 세운 요새. 허물어진 성벽 안에는 마크 트웨인이 목격했던 성냥갑 모양의 허름한 건물이 무질서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공간만 있으면 기존 건축물에 방, 층, 벽을 덧붙이는 모로코의 건축철학 때문이다. 골목 위에 집을 건축한 것도 모로코 구시가지의 특징.
메디나의 골목길은 탕헤르 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정도로 좁은데다 미로처럼 연결되어 자칫 길을 잃기 십상이다. 메디나의 집들은 한낮에도 대문과 창문이 굳게 닫혀있다. 적의 침투에 대비하고 외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육책이다. 그러나 메디나의 골목길은 생각만큼 답답하지 않다. 대문과 벽을 원색으로 채색함으로써 폐쇄적 구조로 인한 답답함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메디나의 좁은 골목길은 제이슨 본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한 영화 '본 얼티메이텀'과 몇 편의 007 영화 무대로도 등장했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암살요원 제이슨 본이 건너편 건물의 옥상으로 점프하던 다이내믹한 추격신과 복잡하고 지저분한 골목길은 모두 탕헤르의 메디나를 배경으로 삼았다.
탕헤르의 메디나는 문학작품의 배경으로도 등장한다.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서 보물을 찾아 여행을 떠난 양치기 소년은 여행 첫날 탕헤르에서 가진 돈을 몽땅 도둑맞는다. 그리고 여행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점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상점도 탕헤르의 메디나가 배경이다.
모로코 전통의상 젤라바를 입은 남자와 히잡을 두른 여인들이 모여 흥정을 하는 작은 시장은 옛 유대인 지구 옆에 위치한다. 시장이래야 과일과 야채 등 먹거리를 땅바닥에 펼쳐놓은 난전에 불과하지만 고즈넉한 메디나에서 가장 생기 넘치는 곳이라고나 할까. 느닷없이 모스크 앞에 주차한 행상트럭에서 팝송 '호텔 캘리포니아'가 흘러나온다. 비록 아랍 국가이지만 성당과 모스크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모로코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리라.
이슬라믹 아치가 이색적인 골목길들은 거대한 대포가 지브롤터 해협을 향해 검은 입을 벌리고 있는 성벽을 향한다. 성벽에서 바다로 난 조그만 문을 나서면 바닷가 언덕이다. 탕헤르 항을 비롯해 지브롤터 해협과 트라팔가르 해전이 벌어졌던 바다, 그리고 해무에 둘러싸인 유럽 대륙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역사의 현장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관광버스의 바닥에 매달려 유럽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모로코의 아이들이 부지기수라는 것. 아프리카의 무엇이 철없는 아이들에게 목숨을 걸고 버스 바닥에 매달려 지브롤터 해협을 넘게 하는가.
모로코 아이들에게는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을 벌려 놓았다는 헤라클레스가 야속할 뿐이다.
탕헤르(모로코)=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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