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천국에 관한 비망록 外 / 나호열

by 丹野 2010. 6. 27.

 

 

천국에 관한 비망록   / 나호열

 

 

천국에 관한 비망록 / 나호열

  -42.195km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옥을 통과해야만 한다

비록 이 길이 지옥에서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이 길이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태어난 곳으로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이 길이 죽음으로 완성되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너무 짧거나 아니면 너무 긴 이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동전 떨어지듯 상쾌한 햇빛을 밟으며

헤엄쳐 가거나 날아가거나

짙어지는 안개 속을 해쳐 나가기 위해서는

차라리 눈감고 뛰어가리라

지옥은 아름답다 그리고 풍요롭다

고통의 신음과 환희의 웃음소리가

꿀물처럼 갈증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사람아, 이윽고 내가 너에게 닿을 때

풀린 다리와 가쁜 숨과 땀내 가득한 한마디 말로

굳게 닫힌 천국의 문이 열리리라

기다림으로 황폐해진 정원, 그 가슴팍에

한 톨의 검은 씨앗으로 너의 가슴에 깊이 파묻히련다

산도 넘다 보면 강이 되더라

흘러가다 보면 강도 산이 되더라

 

 

  

 

 

 

 

거울 앞에서 / 나호열

 

 

맑은 시냇물을 본다는 것이 그만

나를 들여다보고 말았다

무작정 우회도로를 지나고 있다는 느낌

교회의 첨탑, 또는 굴뚝

아니면 구질구질한 골목으로 가득 찬 도시

권태에 길들여진 밤 고양이들의 붉은 눈

살을 태우는 연기들만이 승천하는

이곳, 이생에는 별 볼일이 없다는 듯이

흙탕물 속에는 미꾸라지 한 마리 없다

나를 빗겨 지나가는 세월의 굉음과

바람 없이도 스스로 떨어지는 그림자

거울을 본다는 것이 그만

이빨 빠진 그믐달을 들여다보고 있다

무작정 우회도로를 지나고 있다는 느낌

신기루를 지나 또 다른 신기루를 향하여

걷고 또 걸으며 꽃 피우는 하루

나는 이정표를 믿지 않는다 

 

 

 

 

 

 

 

 

천축天竺 / 나호열

 

모래 한 짐을 지고 천축사에 오른다

입춘 지나 내려오는 산객山客은

아직도 냉기 머금은 바람

고개 숙이며 어깨를 비키면

단 걸음에 그들은 어디로 가나

모래를 빼면 나는 무엇이 남을까

천축사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물 끊긴 계곡을 바람이 대신 흘러간다

산으로 오르는 사람은 있어도

내려가는 사람은 없다

산은 나무로 가득 찬다

산은 풍경소리로 산을 허문다

 

 

 

 

연꽃 / 나호열
                    
연꽃 속에도 길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네
누군가를 처음 그리워할 때처럼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 불꽃 속에 숨어 있음을
그대의 눈빛을 보고 알았네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도 어쩌면 저리 
소중한 그 무엇을 감싸 안은 두 손 모양 경건하냐고
두 손 모두어 거두어들인 그 무엇이 또 무엇이냐고
묻는 나에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비 한 방울이 또르르 
연꽃 속으로 들어가서는 
아직도 아직도 길이 멀어서인지 
날 저물도록 기별이 없네

 

 

 

연꽃 / 나호열

  

   진흙에 묻힌, 그리하여 고개만 간신히 내민 몸을 보아

서는 안된다고 네가 말했다. 슬픔에 겨워 눈물 흘리는 것

보다  아픔을 끌어당겨 명주실 잣듯 몸 풀려나오는  미소

가 더 못 견디는 일이라고 네가 말했다.

 

 

 

 

 

 

   어느 날  종소리를 듣다 / 나호열

 

   한 대 맞으면 속으로 불알 흔들어대며 요란 떠는 높은

망루가 아니라

   묵직하게 어깨를 내리깔고 안으로 아픔을 감아올리는

우리나라 종소리는

   이말 저말 다 버리고 그저 우물거리는 단 한마디 말씀

뿐이어서

   세음世音, 발자국 소리 멀리 물리친 뒤 적막 한 장 깔아

놓고 받아 적어야 하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작은 산채처럼 날아가 버리고

   때로는 나뭇잎 몇 장 떨구어지기도 하여

   한번도 제대로 받아 적어보지 못하였지만

   우우우 우웅 우웅 우우우 그 소리가 내 목덜미를 죄어와

   네 새 치 혀를 내놓아라 으름장 놓는 것은 분명히 알겠네

 

 

 

 

  

 

병산屛山을 지나며 / 나호열

 

 

어디서 오는지 묻는 이 없고

어디로 가는지 묻는 이 없는

인생은 저 푸른 물과 같은 것이다

높은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어리석음이

결국은 먼 길을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임을

짧은 인생이 뉘우친다

쌓아올린 그 키만큼

탑은 속절없이 스러지고

낮게 기어가는 강의 등줄기에

세월은 잔물결 몇 개를 그리다 만다

옛 사람 그러하듯이 나도

그 강을 건널 생각 버리고

저편 병산의 바위를 물끄러미 쳐다보려니

몇 점 구름은 수줍은 듯 흩어지고

돌아갈 길을 줍는 황급한 마음이

강물에 텀벙거린다

병산에 와서 나는 병산을 잊어버리고

병산이 어디에 있느냐고 손사래를 치고 있다

 

 

 

*병산"경국 안동시 풍산면 회회 낙동강변의 산, 산허리에 병풍처럼 바

위가 띠로 둘러져 있어 병산이라 일컫는다. 서애 유성룡의 위패를 모신

사액서원 병산서원이 있다.

 

  

 

 

저녁 부석사 / 나호열

 

무량수전 지붕부터 어둠이 내려앉아

안양루 아랫도리까지 적셔질 때 까지만 생각하자

참고 참았다가 끝내 웅얼거리며 돌아서버린

첫사랑 고백 같은 저 종소리가

도솔천으로 올라갈 때까지만 생각하자

어지러이 휘어돌던 길들 불러 모아

노을 비단 한필로 감아올리는 그때까지만 생각하자

아, 이제 어디로 가지?

 

 

 

 

 

덕진 연꽃* / 나호열

 

 

연꽃 속에도 길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데

누군가를 처음 그리워할 때처럼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 불꽃 속에 숨어 있음을

그대의 눈빛을 보고 알았네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도 어쩌면 저리

소중한 그 무엇을 감싸안은  두 손 모양 경건하냐고

두 손 모두어 거둘어들인 그 무엇이 또 무엇이냐고

묻는 나에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비 한 방울이 또르르

연꽃 속으로 들어가서는

아직도 아직도 길이 멀어서인지

날 저물도록 기별이 없네

 

 

 

*전주시 덕진공원

 

 

 

 

 

 

어촌의 밤 / 나호열

 

 

창들은 한결같이 바다를 향개 귀를 세우고 있다

모래 속으로 스며들던 파도는

밤이 깊어지면서 둑을 넘고 길을 건너

귀속으로 시퍼렇게 밀려들어 오고 있다

어쩌다 하룻밤 바닷가에 머무는 사람들은

파도소리에 가슴을 상해

못내 잠을 이루지 못하지만

철썩이는 저 소리에 몸을 적시고

아이를 낳고

아침이면 방안 가득한 모래를 쓸어내고

등짝 넓은 사내의 뒤로

밤새 덮고 깔았던 바다를 털어내는 아낙네는

지금 코까지 골며 잠에 빠져 있다

손님 끊긴 바닷가 횟집 겸 민박집 좁은 수족관 속에

도다리 광어 민어 쥐치들 몸 부딪치며

먼저 목을 매려고

탐조등에 좆겨 성급히 돌아서는 바다를 향해

넘어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내일까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43번 국도 / 나호열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알지

이 길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 길인지

물어보지 않지

이정표를 놓치고 길 잘못 들어 헤매일 때

바람보다 슬픈 노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부딪치고 깨지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노래

머무를 수 없는 바람의 길

이제는 눈감고도 훤히 끝이 보니는 길

 

 

 

 

 

탑과 벽  / 나호열

 

하찮은 돌멩이들도 쌓으면 탑이 된다

절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늘 그윽한 발걸음으로 서있는

그대를 만나기 위해

하늘을 받치고자 함이었는데

아, 나는 탑이 되지 못하고

벽이 되었구나

얼굴에 가득한 낙서

급전대출과 주점 안내문

가까운 것은 주검이고

그대의 하늘을 가리고만 있구나

벽 속에서

파도가 소리치며 운다

벽 속에서

가슴을 치는 종소리가 운다

 

 

 

 

물을 노래함 / 나호열

 

 

   따로 집이 없으니 가출家出인가 출가出家인가 피한다고

피해지지 않는 바위를 만나면 산산이 부서져주고 그 울

음을 들었으되 피 흘림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맹목인가

맹물인가 폭포, 개울, 내, 소, 강 그 숱한 이름이 얼마나

부질없느냐 하수를 만나면 하수가 되어 몸 섞고 들병이

처럼 들병이처럼 옷고름에 손이 자주 가는구나 안개가

되어주마 흰 구름이 되어주마 결국은 바다에 모여 소금

으로 해탈하느니 오늘도 너를 향해간다 몸 낮추면서 넘

어지면서

 

 

 

 

 

 

수행修行 / 나호열

 

내가 오랫동안 해온 일은 무릎 꿇는 일이었다

수치도 괴로움도 없이

물 흐르는 소리를 오래 듣거나

달구어진 인두를 다루는 일이었다

오늘 벗어 던진 허물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때와 얼룩이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함부로 팽개치지 않는 사람은

자동세탁기를 믿지 않는다

성급하게 때와 얼룩을 지우려고

자신의 허물을 빡빡하게 문지르지 않는다

마음으로 때를 지우고

마음으로 얼룩을 지운다

물은 그 때 비로소 내 마음을 데리고

때와 얼룩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빨랫줄에 걸려 있는 어제의 깃발들을 내리고

나는 다시 무릎을 꿇는다

때와 얼룩을 지웠다고 어제의 허물이

옷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의 아니게 구겨진 내 삶처럼

무늬들의 자리를 되찾기에는 또 한 번의

형벌이 남겨져 있다

쓸데없이 잡힌 시름처럼 주름은

뜨거운 다리미의 눌림 속에 퍼진다

내 살갗이 데이는 것처럼 마음으로 펴지 않으면

어제의 허물은 몇 개의 새로운 주름을 만들어놓고 만다

부비고, 주무르고, 헹구고, 펴고, 누르고, 걸고

평생을 허물을 벗기 위해

오늘도 무릎 꿇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 시집『낙타에 관한 질문』

 

 

  

 To Dori / Stamatis Spanoudak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