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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덮어준다는 것 外 / 복효근

by 丹野 2010. 4. 29.

 

 

덮어준다는 것 / 복효근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있다

  빈 집에서 길게 몸을 빼내어

  한 놈이 한 놈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덮어주려 하고 있다

  일생이 노숙이었으므로

  온 몸이 맨살 혹은 속살이었으므로

  상처이었으므로 부끄럼이었으므로

  덮어준다는 것,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체위로 말해질

  저 흘레의 자세가 아름다운 것은

  덮어준다는 그 동작 때문이겠다

  맨살로 벽을 더듬는 움막 속의 나날

  다시 돌아서면

  벽뿐인 생애를 또 기어서 가야 하는 길이므로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덮어 줄 수 있는

  지금 여기가

  지옥이더라도 신혼방이겠다

  내 쪽의 이불을 끌어다가 자꾸

  네 쪽의 드러난 어깨를 덮으려는 것 같은

  저 몸짓

  저 육두문자를

  사람의 언어로 다 번역할 수는 없겠다

  신혼서약을 하듯 유서를 쓰듯

  최선을 다하여

  아침 한 나절을 몇 백 년이 흘러가고 있다

 

  

계간 『창비』 2009년 겨울호

 

 

 

 

 

 저 돌 / 복효근

 

 

  돌이 목련을 피웠으리

 

  내 안에 박힌 돌을 어쩌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때

  목련나무 아래 아주 오래된 큼직한 돌덩이 보았네

  내 안엣 것은 어쩌지도 못하고

  목련나무 아래 저 돌부터 어찌해보자고

  돌을 파내려 겨우 들췄을 때

  거기 오글오글 모여있는 것들

  돌을 지붕 삼아

  어둠을 집 삼아

  가느다란 목련의 실뿌리들이 얽혀있었네

 

  저 돌로 실뿌리들이 아플 때

  돌을 싸안고 무작정 꽃 피웠으리

 

  돌은 돌대로 세상과 맞장뜨다가

  깨어지고 금간 흉터에 목련의 하얀 실뿌리를

  붕대처럼 휘감고 목련의 눈물을 훔쳐주었으리

 

  저 무모한 공생을 훔쳐본 날

  나도 내 안에 박혀 여문 돌 가만 쓸어보았네

 

  

 

계간 『시안』 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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