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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시의 이미지 따라가기 / 조영미

by 丹野 2010. 3. 5.

                                                                                                                                    p r a h a

 

 

                              시의 이미지 따라가기


                                                                                          조영미(시인, 문학평론가)


 


  '시는 이미지다.'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한 편의 시가 그 자체로 완전한 이미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다시 말해, 한 편의 시는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종 문예지를 통해 혹은, 개인 시집을 통해 발표되는 모든 시들이 나름대로의 이미지를 갖고 있느냐 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어떤 의미를 주려고 하는지 모를 시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시들이 저마다 감동을 줄 수 있고 의미를 준다면 좋겠지만, 추구하는 개성이나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감동의 깊이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작품을 받아들이는 독자의 수용적인 태도에 있어서도 받아들이는 감동의 깊이 역시 다를 것이다.

  이미지는 시를 쓰는 시인의 심상이 표현해내는 연상작용에 의해 은유나 직유, 역설이나 풍자 등등의 수사적인 방법들로 창조되어지는 그 무엇이다. 시인에게 있어 이미지는 구체적이고 독특한 그 무엇이며 그 무엇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즉, 시는 '~ 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흔히 이미지는 존재를 재창조한다고 말하여진다. 이는 대립되는 것들의 역동적이고 필연적인 것들을 함께 공유하고, 그들 사이의 최종적인 동일성을 이끌어낼 수 있을 때 가능해질 것이다.



배를 타는 일은 바람의 길이다


한 개 나뭇잎처럼 나는 간다

물보라에 흔들리면서, 나는

등 푸른 공기 떼를 기다리고 있다

새벽마다 수협공판장에서 매겨지는

고기 값만큼 바다에는 색색의

고기들이 제 이름을 반짝거린다

밤마다 집어등에 불을 밝히면

작살처럼 빛나는 나의 근육질

저 내용 모를 바다와 씨름을 한다

어쩌다 푸른 어장에서 만나는

등 푸른 고기 떼의 파닥임, 그 순간만은

나는 내 비탈진 삶 하나를 감추려 했다

… 중략 …

배를 타는 일은

언제나 바람의 길이다

                                       ――임동윤 [바람의 길] 일부

 

  [시와산문] 지난 봄호에 실린 임동윤의 [바람의 길]은 이미지의 선명함이 뚜렷하다. 바다라는 삶의 공간에서 '나→바람'은 '등 푸른 고기 떼→내 비탈진 삶'의 대립을 통해 '바다의 일상과 나의 일상'을 하나로 만들어놓는다. 이때 "새벽마다 수협공판장에서 매겨지는/ 고기 값만큼 바다에는 색색의/ 고기들이 제 이름을 반짝거린다"는 이미지의 전환은 "작살처럼 빛나는 나의 근육질"로 이어져, 바다의 역동적인 모습을 무리 없이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시의 역동성은 "등 푸른 고기 떼의 파닥임, 그 순간만은/ 나는 내 비탈진 삶 하나를 감추려 했다"는 삶의 긍정으로 나타나 "바람의 길"이 곧 나의 길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시의 이미지는 애써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체험이나 상상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타나 '~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억지스럽지 않고 난해하지 않은 시가 좀더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숲에 오면 나는
공연히 눈물이 나는 것이다
주소가 없어
부쳐지지 못한 한뭉치 소포처럼
웅크린 저 소나무가
낯 익다
여기 꼼짝하지 말고 있어
날은 어두워지는데
총총걸음으로 사라져버린
엄마를 기다리다
혼자 어른이 되어 버린
나는 소나무와 함께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바람에 맞서 뼈마디 굵어진 일이나
동구 밖으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한채
짧은 여름 키 세운 기다림의 저 눈길이
못내 그리운 것이다
나이는?
이름은?
우리는 아무에게도 접속되지 않은채
그렇게 눈시울만 붉게
서로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나호열 [또 다시 숲에 와서] 전문


  나호열의 시에 나타나는 이미지의 연상은 '나→숲→소나무→엄마→혼자인 나↔소나무'로 나타난다. 단순한 구조로 보여지는 듯 하지만 이 이미지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즉 '나와 소나무'는 하나면서 서로 바라보는 사이이고, '숲과 엄마'는 대응되는 관계에 있다. 나호열에게 있어 숲은 그리움으로 붉어진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왜냐하면 숲속에는 소나무가 있고 그리운 눈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의 인간적인 삶이란 "아무에게도 접속되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삶은 현대인들에게 외로움을 느끼게 만들고, 굳이 나이나 이름을 알아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눈시울만 붉게/ 서로를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대인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쓴다는 말이다. 감성보다는 이성이 중요시되는 현대인의 삶은 어쩌면 철저한 외로움을 통해 숲의 존재와 마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후에야 "공연히 눈물이 나는" 이유를 "못내 그리운" 눈길의 의미를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임동윤 나호열의 시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들의 연상은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다. 이렇게 자연스럽고 선명한 이미지를 따라가다 보면 역동적인 삶을 만나기도 하고, 그리운 그 무언가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한 만남이 가능해질 때 시를 읽는 감동이 그만큼 커질 것이다.

 

 

 

 


  이미지의 연상에 있어 위에서 보여졌던 시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보아져야할 시들이 있다. 이들 일련의 시를 읽다 보면 이미지의 자연스러운 연상보다는 사실 그대로의 서술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어떤 시는 의식흐름기법처럼, 또 어떤 시는 소설의 서사적인 상황기술 같은 표현으로 이미지를 끌고 가려 한다. 이때의 이미지들은 위에서 보았던 이미지와는 상반된 모습을 보인다. 즉, 위에서 보여졌던 시들이 이미지의 상과 상의 자연스러운 연결로 하나의 이미지를 갖는다면, 다음의 시는 일상의 나른함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하루종일 불어오는 황사바람과

놓쳐버린 버스와

전하지 못한 안부와

두드러기처럼 부풀어오르는 그에 대한 생각과

싼 가격에도 팔리지 않는 철지난 두꺼운 스웨터와

포장마차에서 말라 가는 떡볶이와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딸기 묘목 옆에

'올해 건축 예정 농사 금지' 라고 박아 놓은 팻말과

버석거리는 의기 소침함이

흐려지는 봄의 뒷모습과 함께 어우러져

                                           ――권오숙 [겨우 써지는 수성펜처럼 봄이 온다] 전문


  권오숙의 시는 시제의 효과가 없었다면 무미건조한 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겨우 써지는 수성 펜처럼 봄이 온다]는 시제로 인해 난해성을 벗어나 읽힐 수 있는 시가 되었다. 권오숙이 시제의 쓰임을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지 상의 연상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묘사를 통해 오히려 시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권오숙에게 있어 봄은 결코 희망차고 기다려지는 계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불어오는 황사"와 "두드러기처럼 부풀어오르는 그에 대한 생각"과 "말라가는 떡볶이"같이 "겨우 써지는 수성 펜처럼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권오숙의 [겨우 써지는~]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시적 효과를 얻고서도 감동의 접근이 소급遡及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원인은 시가 개인의 심사에 머물러 상상력을 차단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의 차단은 '~이 될 수 있다'를 말하지 못하고 '그래서'의 의문을 띄게 된다. 그럴 경우 시의 감동이 반감되는 게 사실이다.

  

 

 

 

 


현관 초인종이 짧게 울린다

누구세요 창문에 매놓은 가오리연이 흔들린다


세탁물이라고요 철제문 구멍을 통해 실같이 비집고 들어오는 소리

바바리는 얼룩이 많아 제거되지 않는다고요 전문업소까지 보냈는데 빠지지 않는다고요

목욕을 마친 송장하늘소 비닐에 씌어져 왔다

올 사람 없었다 날 찾아 주었으리라곤 믿지 않았다 시계가 깜깜해진다 카불 하늘을 나는 미사일처럼 날개 젖힌 구름 무거워진다 문을 잠갔다 집채가 자꾸 흔들린다

입구까지 봉쇄하여 비닐로 싸여진 갑옷 집에 오니 나른하다 침대 속으로 기어든다 눈감자 얼룩은 꿈을 꾼다


메추리알을 삶았다 껍질이 벗겨지지 않는다 삶은 알 얼음 물 속에 몇 분간 담가 보았다 건드리기만 해도 벗겨진다


떨어져 나가지 못하는 껍질을 붙들고 있다 너와 내가 달려가고 있는 테헤란로 국기원 앞이다 보지 않고 꼭 쥐어야 했다 말하지 말아야 했다 소리칠수록 분리되어 간다

퍼붓는 생채기 구정물염료 벽처럼 응고된다 폭격이 계속된다 공습에 들어선 지 3주째 혹한기 전까지 전쟁을 끝내야 한다 1시간 빠른 8시 뉴스

현관 초인종이 짧게 울린다


자막이 찢긴다

                                    ――조성하 [시계가 깜깜해진다] 전문


  조성하의 시는 소설적인 기법을 이용한 시쓰기로 볼 수 있다. 즉, 소설의 한 장면을 읽어가듯 상황을 묘사함으로써 시적 긴장감을 유발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 편의 시를 이러한 소설적인 기법을 통해 나타낼 경우 자칫 뜻 모를 시나 난해한 시로 오해받기 쉽다. 다시 말해, 조성하가 [시계가 깜깜해진다]는 시제의 이미지를 던져놓고 무엇 때문에 시계가 깜깜해지는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시의 상징에 있어 매끄러운 전달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느낌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아무런 감흥도 받지 못하게 할 소지가 있다. 시의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는 메시지의 역할을 한다고 했을 때 이러한 시쓰기는 형식적인 측면 외의 시적 성과에 있어 별반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거듭 읽어볼수록 나름대로 감칠맛 나는 재미를 준다. 이러한 재미는 이미지의 연상을 따라가기보다는 "메추리알을 삶았다 껍질이 벗겨지지 않는다 삶은 알 얼음 물 속에 몇 분간 담가 보았다 건드리기만 해도 벗겨진다"라는 연을 주의 깊게 봄으로써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가령, 조성하는 이 한 연의 직관적 이미지를 설명하기 위해 나머지 연들을 주변부에서 비틀고 있는 것이다. 은밀하게 무언가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숨은 속내는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시의 재미는 시인이 숨기려고 하는 그 무엇을 찾아낼 때 더욱 재밌어진다.

  조성하에게 있어 '시계가 깜깜해'지는 이유는 삶이 '삶은 알'과 같기 때문이다. 삶은 "건드리기만 해도 벗겨"지고, 벗겨진 삶의 껍질-상처이거나 혹은 기다리고 있는-은 "너와 내가 달려가야" 하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다. 이때, "현관 초인종이 짧게 울린다"는 첫행과 4연의 "현관 총인종이 짧게 울린다"의 서술적 시간은 이 시의 시작과 끝이 하나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서술적 시간은 시적 시간 속으로 들어와 현재진행 중이며 앞으로 계속되어질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시간은 말장난의 장치를 통해 [시계가 깜깜해진다]에 재미를 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시를 읽는 재미란 시의 화자가 감추려 했던 이미지나 메시지를 찾아내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위에서 논의되었던 작품들 중 어느 한쪽이 더 좋다고 결론 내리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위의 네 작품 모두 장단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임동윤 나호열이 보여준 시는 이미지가 선명하고 자연스럽다는 장점을 보이는 반면 새로운 시쓰기에 있어서는 진부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런데 권오숙 조성하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자칫 무의미하고 난해해질 수 있다는 단점을 보이는데 반해 시를 읽는 재미를 준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시가 더 좋은 시인가 라는 결론을 내리기에는 어렵다. 다만, 시를 읽는 독자들의 가슴에 가 닿는 작품이 좋은 작품일 수 있으리라. 그것이 감동을 주든 재미를 주든 읽는 이로 하여금 시를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면 그 자체로 좋은 시가 되지 않을까 한다. 시는 이미지의 모든 것이라고 말해지지만 시는 결국 시일뿐이다.

 

출처 / 우리시 카페 - 임동윤 시인님의 방 - 감사합니다.

 

 

 

 

 

 

 

 

 

 

 

 

 

 

 

 

 

 

 

 

 

 

 

 

 

 

        20091018  p r a h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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