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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시의 행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by 丹野 2010. 2. 15.

                                                                                p r a h a

 

 

시의 행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임보(시인. 전충북대 교수)

 

 

  오늘은 시의 행에 관해서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원래 운문에서 행을 나

눈 것은 운율 때문이었습니다. 시행은 율동적으로 읽히게 하기 위한 소리

의 마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의 정형시는 행의 틀을 가지고 있어서 그

틀에 맞추어 행을 배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형시의 형태가 무너지고

자유시가 등장하면서 작품마다 시행을 자의적으로 배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의적으로 배열한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배열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행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나누어 배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 발표된 어떤 시들은 시행의 분할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진 것도 같습니다. 말하자면 질서를 잃은 자유방임의 상태라고나 할

까요?

  시의 분행分行이 정말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시행에 관한 다음의

글을 먼저 읽어보도록 하지요.

 

  산문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단위는 문장(sentence)이다. 곧 문장들

이 하나 둘 쌓이고 쌓여 한 문단을 만들고 그 문단들이 발전하여 한 편의 글

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시詩인 경우는 산문과는 달리 그 기본이 되는 단위가 시행詩行이

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시행이 모여 연聯을 이루고 연이 발전하여 한 편

의 시를 만들게 된다.

  정형시인 경우는 그 정형적인 틀에 좇아 규칙적으로 행이 설정된다. 한

시漢詩의 절구絶句나 율시律詩경우는 한 행이 5자와 7자로 고정된 틀을 지니

고 있고 평시조平時調인 경우는 한 행[章]이 4음보의 율격律格에 담기도록 되

어 있다. 그래서 정형시의 시행은 정해진 틀에 맞추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정형시에서 행을 결정하는 틀(형식)은 무엇이 주도를 하고 있는가? 그것

은 압운押韻과 율격律格곧 운율韻律이다. 이 근저에는 언어에 가락을 실어

흥겹고 조화롭게 만들고자 하는 심미지향적인 인간의 욕망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형식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시가 등장하면서 시

행의 설정에 큰 혼란이 야기되기 시작한다. 극단적인 형식의 자유를 추구

한 나머지 자유시는 운율의 간섭으로부터도 해방되고자 했다. 그렇게 되면

서 시행은 어떠한 규제도 받지 않는 자유방임의 말토막처럼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현대 자유시에서의 시행은 어떤 개연성에 의해 분할되는 것이 아

니라, 시인이 제 마음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끊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

는 그런 난삽한 상황에 접어들고 만 것도 같다.

 

  정말 시행은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일반적인 산문도 분행하여 배열하면 시적 효과가 발생한다. 다음 산문을

분행하여 보기로 한다.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가)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나)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다)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라)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마)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가)의 경우는 각 행이 3음보의 대등한 운율을 갖게 되며, ‘산사’와‘석

탑’이라는 행중심의 의미 단위로 분할된다.

  (나)에서는 각 행이 1, 2, 3음보의 점층적 구조가 형성되고, ‘그’ ‘산사’

‘석탑’으로 의미의 3등 분할이 이루어진다.

  (다)는 1음보와 2음보가 교체 반복되는 대조적 운율구조이다. 특히 1, 3

행의 말음末音이 ㄴ이고 2, 4행의 두음頭音이 ㅅ이어서 압운적押韻的효과를

자아내기도 한다.

  (라)는 2음보와 1음보의 교체 반복이면서, 의미로 따져본다면 대상과 동

작을 중심으로 각각 대등하게 분할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의 경우는 2행과 3행의 경계가 문제인데 수식어 ‘낡은’과 피수식어

‘석탑’을 분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운율적인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라

든지 아니면 다른 심리적인 어떤 갈등을 나타내는 경우에 이러한 분할이

가능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적절한 이유가 없다면 유기적 관계에 놓

인 수식어과 피수식어 사이를 행의 경계로 설정한다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없다. (요사이 항간의 시들 가운데 이러한 경향이 유행처럼 떠돌고 있다)

 

  위의 예를 통해 우리는 행의 배치에 따라 운율의 형태가 부여되고 의미

의 분할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앞에서 자유시는

운율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 운율은 정

형시가 지니고 있는 틀에 박힌 정형률을 의미한다. 잘못 이해해서 자유시

가 모든 운율로부터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분행分行배열을 한 이상 시는 운율에 실리게 된다.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운율은 떨쳐 버릴 수 없는 그림자처럼 시행에 따라 붙는다. 그러니 시

인이 행을 설정하는 일은 행마다에 개성적인 운율을 창조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유시는 형식으로부터는 자유스러워졌지만 정형시를 만

들 때보다도 오히려 더 무겁고 어려운 창조정신과 성실성을 필요로 한다.

 

  시행을 아무렇게나 나눈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만일 그런 시가 있다면

그것은 누더기 같은 운율을 달고 있는 괴담怪談에 불과할 것이다. 성실한 시

인이라면 하나 하나의 시행 속에 최선의 운율과 최선의 의미를 어떻게 효

과적으로 담아내느냐 하는 끝없는 고뇌로 시를 낳을 수밖에 없다.

                                       -「 시행(詩行)」『엄살의시학』pp.49~52

 

 

 

  아무리 자유시라 하더라도 시행을 아무렇게나 나눌 수 없습니다. 행을

나누어 배열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벌어집니다.

  첫째, 운율의 형성----행 중심으로 운율이 형성됨

  둘째, 의미의 분할----행 중심으로 의미가 나누어짐

  셋째, 이미지의 분리----행 중심으로 이미지가 나누어짐

  넷째, 활자의 시각적 분할----행 중심으로 활자들이 인식됨

 

  그렇다면 행과 행의 분할, 곧 행의 경계를 어디로 잡아야 할 것인가? 앞

의 네 가지 중 가급적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 이상적입니

다. 적어도 최소한 한 가지만이라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

렇게 행을 나눔으로 해서 효율적인 운율이 형성된다든지, 그 행 속에 의미

나 혹은 이미지가 능률적으로 분할된다든지, 아니면, 활자의 시각적인 효

과를 노릴 수 있다든지 해야 합니다.

  만약,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충족시킬 수 없는 분행分行이라면 그것은 누더

기에 지나지 않는 글을 만들게 되고 맙니다.

 

 

  한 개의 시어詩語를 골라 쓰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거늘 하물며 하나의

시행詩行을 아무렇게나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정진을 기대합니다.

 

 

 

출처 / 우리詩 카페 (우리詩 2월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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