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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인터넷문학신문 이계절의 작가 / 박영우

by 丹野 2010. 1. 2.

 

 

2008년 인터넷문학신문 이계절의 작가   시인 박영우



시집 ‘1인치의 사랑’의 박영우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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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문학신문>은 투철한 작가정신을 바탕으로 높고 깊은 영혼을 글을 통해 세상에 일갈해온 작가를 선정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해 왔습니다.

그동안 여러 사정으로 인해 아쉽게도 사이트 운영이 제대로 되지 못하여 ‘이 계절의 작가’도 한동안 쉬어 왔습니다. 이번 사이트의 대폭적인 개편에 맞추어 이 난도 앞으로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기로 했습니다.
유려하고 활기찬 필력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를 찾아나서 지면의 향기를 더욱 높여 나갈 것입니다. 많은 격려와 관심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작년 12월초, 세상에 본인의 4번째 시집 ‘1인치의 사랑’을 내어놓은 교수시인 박영우 시인을 이 계절의 작가로 만났습니다.
현재진행형의 사랑의 부재를 그리워하는 연가 ‘1인치의 사랑’을 처절하고 허무하게 부르짖는 그는 중년의 나이이지만, 생활의 주무대는 20대의 캠퍼스여서 시의 모습은 무척 젊고 재기가 넘칩니다.
오랫동안 교보문고 시집 베스트셀러코너에 자리했던 이 시집은 사랑을 잃고 나서 비로서 사랑을 앓는 ‘느낌의 뼈’로 꽉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움과 기다림의 공간에서 결핍된 자아의 낭만적 여정을 파스텔톤의 <부재의 존재성>을 담은 추상화면으로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인터뷰>“현대인 ‘순간적 사랑’ 꼬집고 싶었죠”
박영우 경기대 교수

“요즘 현대인들, 만날 때만 즐기는 ‘순간적인 사랑’을 꼬집고 싶었죠.”
만연되어 있는 현대인들의 인스턴트식 사랑을 상징과 비유를 통해 공감을 사고 있는 시집
‘1인치의 사랑’이 출간돼 화제다.
이 책의 저자인 경기대학교 문예창작과 박영우 교수는 교직에 있으면서 학생들과의 교감을 통해 일구어낸 작품들을 내놓았는데 이 시집은 중년의 연륜 대신 젊은 감각이 먼저 느껴진다.

출간된 ‘1인치의 사랑’은 ‘사랑’,‘이별’을 테마로 한 70여 편의 시를 담고 있다.
지난 6-7년간 써온 작품들을 정리한 것으로 한서대학교 문예창작과 오정국 교수의 해설이 맨 끝에 담겨져 있다.
또한 시집 ‘흐린 날의 우리 ’(1989년),‘나는 눕고 싶다’(1995년),‘사랑은 없다’(2001년)에 이은 4번째 저서로, 특히 ‘사랑은 없다’의 후속편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한번쯤은 기대고 싶은,’1인치의 사랑‘,’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모두 3장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1인치의 사랑’에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욕망들에 관해 이야기 한다. 즉 현대인들은 욕망을 사랑이라고 착각한다는 것.
그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욕망을 욕망할 뿐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데, 시 ‘1인치의 사랑’,‘지금은 접속’을 살펴보면 ‘....순간의 시장기를 면할 만큼의 그런 사랑이 필요한 때’(‘1인치의 사랑‘중) 등 시의 구절이 읽는 이의 마음에 와닿는 느낌을 준다.

그는 “특히 젊은이들을 통해 순간적인 사랑을 많이 보게 된다. 만날 때만 원하고 욕망을 채우면 떠나버린다”며 “학생들의 작품 속에서 이성과 관련된 것, 자신의 정체성, 삶에 대한 본인의 고민 등을 주로 접할 수 있는데 이는 학생들의 고민이자 곧 나의 고민이다. 여기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다.”고 말했다.

중앙대학교 문에창작과를 졸업한 박교수는 198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졸업 후 광고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고 그 후에는 중.고등학교. 대학교 등 줄곧 교직에 있다보니 젊은 학생들과 교감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특히 지난 2001년에 발표한 시 ‘사랑은 없다’는 인터넷에서 크게 부상해 많은 이들에 의해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녀가 내게서 등을 돌릴 때/사랑은 빗소리처럼 쓸쓸했다....중략...오직, 같은 말만을/되뇌이고 있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는 사기라는 것을/사랑은 언제나/제자리에 없다는 것을’(‘사랑은 없다’중)

지금의 세태를 비판하는 시가 쉬운 사랑에 물들어 있는 인터넷 세대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래도 사랑의 참모습을 꿈꾸는 마음이 그들의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반가운 생각이 드는데, 박교수 또한 참사랑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책 ‘1인치의 사랑은’에선 ‘그래도 사랑은 있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죠. 그리고 참모습의 사랑,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욱 필요합니다.”

<중부일보, 방혜석기자, 2007년 12월 4일자 >





(시해설) <사랑>과 <허무>의 뼈아픈 역설



차라리 戀歌라면 얼마나 아름다우랴.
이 시집엔 현재진행형의 사랑은 없다.
이 시집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테마시집마냥, 온통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기다림으로 채워져 있는데, 그 아득한 여정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안에 산다.
구멍 난 가슴들이 상사화로 피고 지고
욕망의 빈 씨방만이 허무를 터트린다.


혼자 가고 싶은 길, 같이 걷고 싶은 사람
혼돈의 바람 부는 텅 빈 산사 앞에서
오늘도 길을 만들고 또 그 길을 지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만남도 이별도 탄생도 죽음조차도,
저물녘 낟가리처럼 쌓여가는 느낌의 뼈.
-「길」 전문

시인은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안에 산다>고 했다. 시인은, 아니 시의 화자는 지상의 온갖 풍경 속에서 <사랑의 상처>를 본다. 그 상처는 <구멍 난 가슴>으로 표현되는데, 거기서 <상사화>가 피고 진다니, 이는 곧 <사랑을 잃고 나서 사랑을 앓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을 잃고 사랑을 앓는> 행위는 <빈 씨방>의 <욕망>이며 <허무>임을 시의 화자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오늘도 길을 만>든다. 그 길은 <혼자 가고 싶은 길>이지만, 동시에 <같이 걷고 싶은 사람>의 길이기도 하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아이러니 때문에 시의 화자는 온몸으로 <혼돈의 바람>을 맞닥뜨려야 하는 것이리라.

이 시집은 바로 이 같은 <사랑>과 <허무>, 그 뼈아픈 역설의 노래들이다. 이런 역설은 <길을 만들고 또 그 길을 지>우는 행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다시 말해, 이 시집은 사랑을 잃고 나서 비로소 사랑을 앓는 <느낌의 뼈>로 꽉 채워져 있는데, 사랑을 잃고 사랑을 앓는 자는 필연적으로 <그리움>과 <기다림>의 공간 속에 놓인다.

즉, <잃어버린 시간>(「너를 보내고」「구룡령 너머에는 잃어버린 시간이 산다」)을 <지금 이곳에서> 다시 한번 살아내는 몸부림을 보여주는데, 이 결핍된 자아의 낭만적 여정이 바로 이 시집의 주된 정서를 이루고 있다. 이 시집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처럼 <不在의 存在性>을 일깨워주지만 잃어버린 사랑의 실체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를테면, <날카로운 첫 키스> 같은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이를 통해 이 시집의 <사랑>은 <추상화된 사랑>이거나 <사랑의 초상화>임을 알 수 있겠는데, 현재진행형의 사랑은 이미 아득하게 흘러가버렸고 그 상처와 얼룩만 도처에 낭자하다.



별은 빛나고 있건만
나를 위해 반짝이는 별은 하나도 없다.
무수한 별이 반짝이고 있건만
밝게 반짝일수록
사람들에게 기억된 별일수록
밤하늘 높이 매달려
더욱 고독할 뿐이다.
내가 찾고 있는 별은
오늘밤도
오리무중이다
-「별」 전문



기다림은 정류장 앞을 빈 차로 서성이다
안타까운 그림자를 한 꺼풀 더 감싸며
가파른
삶의 구릉을
몸 부비며 넘어간다.
「길을 가다가」 부분


시간은 자꾸만 타다만 담배 꽁초를 적시고
나는 또 한 번 성냥을 그으며
기다림을 소각한다.
-「비오는 날의 연가 1」 부분


<지금 이곳>의 화자는 자신의 <별> 하나를 찾고자 한다. 또한 정류장 앞을 서성거리는 자신의 <기다림>을 객관화한다. 결코 합일되지 못할 대상인 他者를 희구하고 기다리는 자세이다. 그런데 시의 화자는 결국 성냥을 그어서 자신의 <기다림>을 소각해버리고 만다.
이 태도는 <기다림>의 <無爲>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비 오는 날의 연가 1」)의 마지막 구절인 <나는 오늘도 투명한 유리잔을 들어/ 하루를 마감하는 빈 가슴을 채운다>의 <빈 가슴>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는데, 이 <빈 가슴>은 「길을 가다가」의 <기다림의 빈 차>와 일맥상통된다.

즉, 시의 화자는 <기다림>의 대상은 결코 오지 않는, <이미 비어 있는 의자>이자 <승객 없는 차량>임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기억된 별일수록><더욱 고독할 뿐>이라는 언술을 통해, 他者 또한 어차피 단독자로 존재하는 고독의 징표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시의 화자는 어찌하여 <별은 고독하다>라고 말하지 않고, <기억된 별은 고독하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기억된 他者>란 한번쯤은 그의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타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지만, 지금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에 별은 傷痕처럼 빛난다. 지금은 잃어버린 사랑도 그러했으리라.

이렇듯, 시의 화자는 아득하게 비껴서 있는 他者를 <찾고><기다리고><소각하고>는 행위들을 통해 그 대상을 다시 한번 呼名한다. 허지만 그는 <진정 우리는 누구를 기다리지 못한다>(「비 그리고 봄」)고 단정한다. 어디 그 뿐인가.


나의 사랑, 나의 불행은
쑥대밭의 기억 속을 가로 질러 날아가고
해질 무렵 다시
지친 내 허리 위로 떨어지는
서슬 퍼런 절망의 활촉에
쓰러지리라, 얼마든지
그러나 남겨둘 말이 없어 슬프다.
나누어 가질 것이 없어 슬프다.
우리들이 나누어 가질
-「무명」 부분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의 사랑과 불행이 <쑥대밭>을 날아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굳이 <쑥대밭의 기억 속>을 날아간다고 말한다. 그렇다, 그의 사랑과 불행은 <쑥대밭>이 아닌, <쑥대밭의 기억> 속을 날아갔기에 <절망의 활촉>을 맞고 쓰러진 것이다.
이젠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는, <텅 빈 공허>같은 <기억의 쑥대밭>을 통과했기 때문에, <절망의 활촉>을 맞았으며, 되짚어서 <남겨둘 말이 없>고, 따라서 <슬프다>는 언술이 가능하진 것이리라. 그리고 <우리>라고 지칭되는 대상과 <나누어 가질 것>도 없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화자가 끈질기게, 비켜선 他者들을 호명하는 까닭은 자못 피상적으로 여겨지기 쉬운 사랑의 고독과 그 허무의 윤곽을 좀더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사랑이 내 몸에서 빠져나간 그 자리엔
허무에 중독된 그리움들이
소름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어느 메조키스트의 사랑」 부분


독약을 마시듯
심야의 커피 한 잔을 마셔보았는가.


홀로 있으면 외롭고
그래서 둘이 되어 있으면
다시 혼자가 그리워질 때
진한 커피를 마신다.
아니, 너를 마신다.
-「심야의 커피 한 잔」 부분


비로소 시인은 <나의 그리움은 허무에 중독되어 있다>고 고백한다. 이 <허무의 길>은 사랑을 잃은 자의 <상처의 길>이자, 그 상처를 다시 한번 살아내는 <피학의 길>이다. 흔히, 그리움이란 애틋한 추억이나 감미로운 낭만을 안겨주지만, 이 시인의 경우엔 절망적 허무를 던지고, 더욱이 놀라운 것은 시인이 오히려 그런 허무를 탐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홀로 있으면 외롭고/그래서 둘이 되어 있으면/ 다시 혼자가 그리워>지는 것이 사랑의 속성임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것이 바로 自我와 他者의 존재론적 숙명임을, 이젠 어쩔 수 없이 수락해야 할 <존재의 비의>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시인은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사랑>과 <허무>를 제 몸 하나로 감싸 안으려는 것이며, 이 시집은 그런 시인의 처연한 몸부림이다. 그 몸부림은 <쓸쓸한 혼돈>(「더덕을 찾아서」)의 여운을 준다.



철책 너머 저만큼 버려진 나날들이
물 빠진 강바닥에 흰 뼈를 드러낸 채,
그리운 굽이굽이를 황혼으로 덮는데
(중략)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윈 자락 붙들어
핏줄 같은 흐름을 멈춰서게 해놓고
이제는 한 몸이 되어 물들고 싶어지는
-「임진강의 노을」 부분



그녀는 매일 내 방을 청소하고 간다.
나는 아직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중략)
주인 없는 빈 방을 걸어 잠그고
기나긴 복도 끝, 그림자만 늘어뜨린 채,
부재중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는
또 다른 방문을 향해
오늘 아침에도
덧없는 존재의 열쇠를 디밀고 있을 것이다.
-「부재중」 부분



다소 이질적인 위의 시들은 시인의 <쓸쓸한 혼돈>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아직도 <저녁노을>의 <핏줄 같은 흐름을 멈춰 서게 해놓고><한 몸이 되어 물들고 싶어> 한다. <사랑과 존재의 길>이 <지향>에 있고, <지향은 그리운 이름만큼 아름답다>(「망초꽃」)는 언술에도 나타나듯이, 낭만적 자아의 아득한 여행은 계속되는데, 이런 욕망은 <덧없는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구멍>이자 <열쇠>이기도 한다.

허지만 그 방은 언제나 <주인 없는 빈방>이며, <부재중이라는 팻말>만 붙어 있다. 그리고 시의 화자 또한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 여기엔 <텅 빈 공허>의 <심연>만 <기나긴 복도>로 이어져 있다. 따라서 <나>와 <그녀>, <빈 방>과 <복도> 등 <부재중>의 <덧없는 존재>들이다.

이 같은 <덧없는 존재의 심연>과 <핏줄처럼 엉기는 노을>, 그 간극이 뼈아프다. 이런 간극을 통해 인간 존재의 비의를 드러내는 것이 앞으로 이 시인이 우리에게 던져줄 가슴 뭉클한 감동이 아닐까 싶다. <날은 어두워지고><길이 끊긴 그 자리>,<삶의 옷자락들이><강물이 되어>(「길이 끊어진 곳에 강이 있었다」)깜깜하게 흘러가기 전에.

<시해설, 오정국 한서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시해설) 사랑, 높고 고독한 독거(獨居)


서정시라는 시형식이 발생하면서부터 시인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그 시적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랑에 대한 서정시가 우리 삶의 가장 극단적 상황을 재현하고 변주해내는 가장 전통적인 문학 장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낭만적 사랑은 필연적인 현실을 도피 ․ 극복할 수 있는 초월적 자기 승화라는 함의를 유포한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가장 어렵고 궁극적인 것이며, 최후의 시련이요, 다른 모든 일이란 실로 그 준비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일이란 높고 고독한 독거입니다.” 라고 한 릴케의 말처럼 말이다.

박영우 시인의 신작 시집『1인치의 사랑』은 부재와 현존 사이의 역설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별은 빛나고 있건만/나를 위해 반짝이는 별은 하나도 없다. -「별」부분
絶 ․ 海 ․ 孤 ․ 島/외로운 행성 - 「무거운 것은 가라」부분
모두들 돌아갈 때/나는 홀로 내 길을 간다. -「모두들 집에 돌아갈 때」부분
방울방울 맺혀 있는 내 삶의 흔적들이/한줄기 바람이 불어 낙숫물로 지는 하오.
- 「느낌 2」부분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시인의 본원적 공간은 부재의 자리이다. 비극적인 내부와 황막한 외부와의 조응을 통해 존재적 결핍과 삶의 스산한 단면을 그려낸다. 근원을 밝힐 수 없는 황폐한 풍경과 소멸과 고독을 노래하는 견고한 영혼의 모습을 시인은 단적으로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안에 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에 대한 이미지와 사랑의 대상 그 자체 사이에는 늘 간극이 있게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욕망을 욕망할 뿐이다. 그리하여 욕망은 충족되기를 원하며, 충족되어버린 욕망은 금세 사라지게 된다. 시인은 그것들은 “지독한 불면의/불치의 사랑”이라든가 “꿈도 사랑도 티끌처럼 날려가고 욕망만이 사막처럼 남을” 자리, “아직도 더 피우고픈 사랑”으로 환유시켜놓고 있다.

욕망은 좌절되기 때문에 욕망으로 살아남는다. 욕망은 욕망을 낳는다. 이것이 욕망의 끝없는 재생산, 역설의 심리학이다. 사랑의 감정은 일찌감치 ‘과잉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결핍의 아우라를 지닐 수밖에 없다. 욕망은 결핍을 낳고 그리움을 낳고 고독을 낳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늘 지금, 이곳에 없는 부재이고 지금, 이곳에는 ‘사랑한다’는 욕망만이 현존하기 때문이다.


순간의 시장기를 면할 만큼의/그런 사랑이 필요한 때. -「1인치의 사랑」부분
아니, 떠나보낸 사랑이/아름다울 때가 있다. - 「너를 보내고」부분
이제 사랑이라는 말은 오래된 화석에서나/전설처럼 발견될 것이다.
-「지금은 접속 중」부분


부재하기 때문에 사랑의 욕망이 형성된다는 사실은 새로운 각성을 던져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익숙하여 지겨운 사실이다. 따라서 시인이 그리는 사랑은 마치 운명처럼 우리의 삶을 거역하듯 다가오며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면서 그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시인에게 운명은 자신의 운명을 깨닫게 하는 또 다른 거울인 셈이다. 시인은 그곳에서 “사랑과 존재의 길”을 찾고, “억겁의 시간 속, 한 점 시간 위를/한 조각 구름이 되어/흘러가고” 싶어한다.

이렇게 고독을 영접하고 기꺼이 그것들을 대접하는 일의 즐거움을 찾아내는 자리가 결국 『1인치의 사랑』이 펼치진 자리이다. 시인에게 사랑이란 단순히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타인에게서 찾아내고자 하며, 둘의 결합으로 완전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다.
욕망의 발현과 충족으로서의 사랑도 아니다. 다만 시인에게 사랑은 그 힘을 통해 모든 세계의 상처들로 자신을 확장시키는 메타적 지점이며, 자신을 끝없이 창조하는 존재적 지점일 뿐이다.
이와 동시에 시인에게 사랑은 ‘부재하는 환영에 대한 집착’일 뿐, 저기 멀리의 것에 대하여 주체할 수 있는 것은 ‘수동적 기다림’이라는 마조히즘적 자기 고통뿐이다. “내 영혼의 즙을 마시듯/너를 마시”며, “이내 사라져 버리는/안타까운 네 향기”에 아쉬워하면서, “지금 내 손에 쥐어진 건/오직 빈 술잔”이라고 탄식한다.

시인은 이러한 부재와 결핍만이 결국 사랑의 몫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점에서 시인의 사랑이 키워내는 것은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부재와 현존, 시간과 공간의 넘나듦. 사랑의 부재하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사랑이 현존한다는 역설을 만들어 내고 싶은 것이다.
물론 사랑의 기억들은 그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기호인 ‘달’ ‘노을’ ‘강물’ 혹은 ‘꽃무늬 자켓에 짧은 스커트’ 등으로 대체되지만 잃어버린 기억,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아, 이제는/되돌릴 수 없는/갈 수도 없는/그리운 시간,/그리운 나라.”라고 애끓는다.

그리고 이 시집의 도처에서 보이는 사랑에 대한 부재와 그리움의 열망은 시인이 사랑에 대해 지니고 있는 비극적 자세의 성격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부재 혹은 결핍 의식과 열망은 적극적인 비극에로의 지향보다는 자동적으로 자기 정서에의 폐쇄적인 몰입이라는 측면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닫힌 고뇌를 반복하며 개성적이라기보다는 개성적인 내부 체험을 상습적인 이미지로 노래하게 만든다. 가령 시인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기억’ ‘추억’ ‘그리움’과 같은 것들은 의식의 각성을 환기시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다른 이미지로의 발전에 폐쇄적인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시인은 작품에서 “눈에 보이는 무수한 선과/보이지 않는 선이/너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다”라며 동질적 삶의 규정하고자 하는 경계를 고발하기도 한다.

사랑이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서 하나의 신흥종교로 부상할 수 있는 근거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느 하나 확고한 것 없이 요동하는 피곤한 상황에서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진정한 사랑’을 찾아 헤매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도대체 사랑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수많은 질문 사이에서 시인은 쉽게 답을 하지 않는다. 다만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렇게 가고 말 걸
속죄의 말도 없이, 사랑한단 말도 없이
고독한 꿈을 키우다 그렇게 가고 말걸.
- 「느낌 5」부분






<시해설, 김병호, 협성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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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감상>뉴밀레니엄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날로 피폐화 되어가고 있는 우리의 위험한 현실은 거대한 덫과 같고 수천, 수만겹 얽힌 거미줄 아래 은폐되어 있을지도 모를 위험사회의 모습과 온갖 인간군상의 추잡한 모습들로 가득한 도심시대에 중독된 몸과 마음들을 조명하고 가혹한 현실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하고 있다고 보이며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를 발산하고 있는 박영우 시인.

이 박시인의 시집 <사랑은 없다>는 어떤 좌절된 희망이나 희망없는 미래를 바라보는 괴로움과 살아보지 않은 미래의 생을 보는 슬픔을 지니게 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과 현실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와 함께 삶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과 만날 수 있는 너와 내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영위해 갈 것인가라는, 더 나아가서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새 향로를 더듬어 나가고자 하는 작가의 보이지 않는 의지와 열망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

속도 있게 움직이고 눈부시게 변하는 세상풍파속에서 그림자 같이 따라오는 고독감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 그 견디기 어려운 고독에서의 탈출, 실존으로의 탈출을 누구나 꿈꾸면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무엇도 발견할 수 없는 현대인의 심원한 과제들 속에 숨쉬고 있는 모든 부조리한 것들, 날이 갈수록 비통해져가는 현실 인식에 대한 시인의 의식은 한껏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하기만 하다. 그 세상을 위해하는 요소들에 대해 먼발치에서 관조하듯 작가적 거리를 계속 두고 소리없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이 고요하다
지금 사람들은 무언가와 접속 중이다
그리고 빠져나오지 못한다
게임, 쇼핑, 채팅, 성인 영화, 쌩쑈...
이제 모든 관계는 모니터 안에서만 존재한다


<지금은 접속 중> 부분


누구든지 간단한 현대인의 공간을 지배하는 매체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고 보다 편리한 시대, 보다 풍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은 인간의 지식이 만들어낸 힘 속에 존재하면서 비인간적인 상황에 내던져지고 비인간화로 만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축적의 매커니즘화, 미디어테크, 또는 매스커무니케이션의 문화 속에서 더욱 허전함과 고독을 느끼게 되고 결핍을 느끼면서 생명의 힘도 잃어가고 있다.

고도의 상호의존성과 치밀해진 네트워크로 규정되는 대중매체, 네트워크에 결부된 가상적인 접촉 형태와 가상공간의 물신주의와 사회적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일상생활과 행위, 소비를 하면서 낭만은 고갈되어가고 있고 초 문화권들로 인해 환락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하면서 체온이 없는 차디찬 영혼의 신과 교류하고 있는 듯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은 지금의 세상을 물질적인 소비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살아가는 `소비 커뮤니티`라 불렀고 제라미 라프킨은 21세기 인간과 전시대 인간의 차이는 `소유` 와 `접속` 이라고 보았다. `게임, 소핑, 채팅, 성인 영화, 쌩쑈`, ` 이제 모든 관계는 모니터 안에서만 존재한다` 등이 이러한 사회 현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21세기 사람들은 소유를 훌훌 털고 접속의 시대로 가면서 일종의 `상업적 네트워크`를 통해 인간관계를 맺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가족들이 해주었던 병간호나 노인들의 말동무 등도 편하여 부담 없는 이유에서 돈을 지불하는 상업적 네트워크 속에서 해결하기도 하고 결혼대신 동거를 선택하는 순간적 접속, 요즘 온라인에서 뜨고 있는 동거 사이트나 상황까지 확실하게 정해놓은 계약연애가 좋은 예들인데 결국 인간관계도 접속 가능한 소비관계, 지속 불가능한 관계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이 걸코 반시대적 항황이거나 부도덕하다고 비난할 일만은 아닌 철저히 친 시대적 상황으로의 커다란 사회적 변화의 굴절을 겪으며 접속을 통한 소비시대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평균.평속화해버린 인간들이 바른 길만을 걷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기술을 숭배하고 현실순응주의자 일지라도 대중매체에 의해 지탱되고 각인되고 있는 가치부재의 시대, 영의 아사상태를 살면서 우리는 기습해온 현실적 열병을 앓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인의 가슴속 깊숙이 자리한 곳에서는 넋 빠지고 굴절된 현실을 조망하고 있으나 그 현실이 지배하는 사고의 틀에 갇혀있지 않고 암울한 미래상을 나타내는 디스토피아 개념이 아닌 우리 삶의 커다란 테마와 같은 미래에 대한 현실주의적 유토피아를 지향하며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세상은 이제 평범함을 거부하지요
무조건 일류가 되어야 한다니까요
입는 것, 먹는 것,
사는 곳, 노는 곳,
노는 사람조차 일류만 용납하지요
동거도 이젠 SKY 출신들끼라만 한대잖아요


<지금은 종족 분열 중> 부분


상상을 초월하는 생태계 파괴와 인간의 황폐화가 어느새 도시의 정취가 되어가고 있고 국제사회에서도 결코 떳떳이 자랑할 수 없는 우리나라는 고아 수출, 교통사고, 컴퓨터게임, 제왕 절개, 범죄와 비리, 쓰레기배출, 핸드폰 사용, 배금과 요행 주의, 낙태, 자살, 무질서, 표절 기타 등등 상당 부문에서 세계 제 1위를 차지하며 위험사회의 모습인 우리나라가 1등만 좋아하고 1등을 향해 갈채와 선망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지금 이 부분은 어디를 가나 1등만 대접받는 1등 사회의 단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원래 인간은 최고를 동경하는 본성을 지녔다고 한다. 산에 오르는 사람은 최고봉에 도전하고 여행을 할 때는 최고의 경지를 찾고 최고의 연주가에게 갈채를 보내고 사람들이 기억하기 좋아하는 것은 언제나 일류이고 유일이고 만점이고 최고일 것이다.

1등을 해야만 돈과 권력을 잡고 행복해진다는 논리는 이 사회구석구석마다 스며들어 있지만 1등만 기억하는 사회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과 남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자신이 쓰러진다는 경쟁사회의 원리와 남을 이겨야 된다는 왜곡된 인식이 팽배한 현실적 삶과 잠재적 패배자의 어떤 짙은 패배의식도 엿볼 수 있게 한다. 로봇이나 컴퓨터 같은 이기적인 일류 속에는 진실과 행복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숨어있는 1등과 일류에게도 갈채를 보내며 희망의 길을 모색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아니,
그녀가 성을 바뚜듯이
세상도 바꿀 수는 없는 것인지


<내 사랑 하리수> 전문



우리의 현실이 비참하고 어둡고 혼란스러울수록 현재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위협적이면 위협적일수록 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망은 더욱 강렬한 색채를 띨 것이라 생각된다. 애벌레는 세상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 나비가 되었듯이 작가는 나비가 되어 날아갈 수 있는 세상을 기다리고 그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는 세상이 나를 바룰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바람을 바꿀 수 없지만 조절할 수 있는 세상의 돛이 되어 평화로운 세상을 추구하며 더 높고, 더 깊고, 더 두터운 차원으로의 잠재적인 삶의 집요한 욕망과 아무 것에도 속박되고 싶지 않은 마음을 함축성 있게 표현했다고 생각되지만 비현실적인 것이 아닌 광명을 향해 손짓하고 있을 또 하나의 세상과 무한한 미래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한 시기가 지나면 다른 시기가 시작되고 이번 세기가 지나면 다음 세기가 올 것이며 우리는 그 시간 속을 헤엄쳐 나가야만 되는 것이다.


그녀가 내게서 등을 돌릴 때
사랑은 빗소리처럼 쓸쓸했다.
혼자서 돌아오는 길 위에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허무를
온몸에 맞으며 나는,
오직, 같은 말만을
되뇌이고 있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는 사기라는 것을
사랑은 언제나 제자리에 없다는 것을


<사랑은 없다> 전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긴 최대의 교훈이자 인간이 간직해야 할 최대의 덕목인 사랑에 대한 정의는 수없이 많고 사랑학 개론류의 책도 많지만 사랑 그 자체는 언제나 안개처럼 희미하다.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은 뜻있는 욕망의 충족일 것이다. 그 중에서 생존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 아닐까 한다.

이 글에서는 긍정원리 중 가장 크고 강한 사랑원리에 정서적 도취가 아닌 정서적 박탈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마치 불투명한 안개가 서서히 몰려오듯 어떤 딜레마에 빠져들게도 한다.
`사랑은 언제나 제자리에 없다는 것을` 에서는 절대로 외면할 수 없는 가슴 아픈 진실과 영원한 일치를 얻고 싶은 `너`를 향한 다른 반쪽, 나의 한조각을 향한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과 그리움의 거대한 무게가 뛰따르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삶이 순탄과 행운 속에서만 존재할 수 없고 또한 고난이나 역경도 무한정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켜 가는 운명의 흔적 또는, 실의와 허탈감, 삶의 명암과 엇갈림 속에서 반드시 부정적 방향으로 고착되지는 않고 있다.

마치 사랑은 영원한 미스터리중 하나인 것이라고 또는, 사랑은 영원히 자유로운 것임을 말하고 있는 듯한 `사랑은 없다`는 미래를 향해 발사된 화살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사랑한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면에 있어 사랑의 강한 뉘앙스나 악센트이겠으나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살며 무엇을 위해 살며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 다음의 과제를 제시해 주고 있으며 인간과 사랑의 미 분화현상이 아닌 인간의 연구라는 또 다른 과제를 남겨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무거움은 가고
가벼움만 남은 시대


<무거운 것은 가라> 부분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헤르만 헤세의 시를 떠올려 보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이고 그 허상 뒤에 정신과 영생이 숨어있다는 생각이, 하지만 그 문을 지나 어렴풋한 내면현실을 찾기 위해 휘황찬란한 가상을 버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중세 말의 삶은 멜랑콜리로 가득했고 프랑스의 세기말도 우울하고 사회전반의 분위기는 아주 무거웠고 세기말의 세계는 비뚤어지고 일그러진 모습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강대함과 약소함, 빈곤과 풍요등 극심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현대는 파괴와 물리적인 힘으로 가득한 혼돈(chaos)으로 가득한 모습이라 생각한다. 그 속에서 현대인은 `우울증`이란 꼬리표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사회와 문명 의식이 깔려있는 현실인식의 지평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야 됨을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암호투성이인 현실의 실체에 맞닿아 있는 온갖 문제들의 해결모색을 위한 키의 방향과 접근적 룰에 다가가기 위한 비장한 기운이나 힘이 스며있다기 보다는 갈등으로 대체되는 일상의 현실적 삶을 돌보는 아웃사이더의 자세로 보인다.

사회학적 현실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사회의 모든 현상들이 다 훌륭하고 멋지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당당하게 그리고 명쾌하게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언더그라운드 3>)에서와 `구두에 얼굴을 비춰 부끄럼 없이 살라` (<언더그라운드 5>)에서처럼 인간이 되기도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의 현상에 안주하는 모습이 아닌 참된 `인간화`를 강조하면서 지금보다 좀더 낫고, 좀더 합리적이고 추함이 전혀 없는 세계, 아름다운 세계를 건설하고자하는 좋은 유토피아를 추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영혼이 기아에 허덕이지 않을 온전히 나를 향해서 돌아갈 수 있는 항해도를 그리며 진정 가벼움만 남은 시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복잡다단한 파괴적 결과를 빚어낼 수 있는 현실적 현상을 파악하고 직시하면서도 그 현실에 공격의 칼을 들이 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시적 해방을 위해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비가만을 노래하고 있을 것인가?


정신적 영양결핍 상태에 놓여있는 현실과 관계의 끈을 엮으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삶의 질서를 모색하고 대중매체를 통해 반성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외부세계는 내부세계의 허상임을 깨달을 때 영혼이 쉴 수 있는 푸른 목장을 찾아 현실의 밧줄에 묶여버린 우리의 눈과 귀를 새로운 방향으로 눈뜨게 할 것이며 잠들어있던 정신을 일깨울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현재에 충실하고 싶은 마음과 삶의 현실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듯한 `살아갈 시간이 많지 않은데,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은데` (<테크노댄스, 테크노피아>)와 `흘러가지 않는 오늘과 뜨겁게 입맞추고 싶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에서는 새로운 에너지의 흐름이 정지된 듯한 느낌도 들지만 전체적으로 유장하게 흐르고 있는 시인의 메시지들은 뉴 밀레니엄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출구를 찾아 가야할 곳이 어딘지 뚜렷이 가리키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백년도 잠깐, 천년인들 꿈에 지나지 않을 우리의 인생행로에 시커먼 구름이 덮치고 예측할 수 없는 검은 공간으로 무한한 추락을 예고하는 세상일지라도 가슴 저린 상실감 속에 존재할 허무만을 씹고 살아갈 수는 없기에 마음 속 꿈과 자유와 이상이 비애로운 허상으로 변질되지 않고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의 총알이 될 수 있도록 미래를 향한 페달을 더욱 힘껏 밟아야 할 것이다.

문득 바라본 하늘 위에는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고, 풀길 없는 퍼즐과도 같은 세상의 위기를 의식한 새가 가지를 박차고 날아오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는 우리의 삶과 현실 속 허위의 꺼풀을 깨달으며 신선하고 신성한 세상을 기다리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결의를 새롭게 하고 있을 것이다.


조용히 닻을 드리우며 정박해 있는 돛단배와 같은 모습이 아닌 끊임없는 탐색을 하듯 힘찬 자기 전환을 꿈꾸면서 그렇게.




<김진하 -박영우 시인의 제 3시집<사랑은 없다>를 읽고>








사랑과 허무, 그 뼈아픈 역설의 노래들 모음 / 박영우

나는 눕고 싶다 外 / 박영우

 



나는 눕고 싶다


삶은 현재진행형
나의 삶에 과거는 없다.
과거 같은 현재
현재 같은 미래


나의 빛깔과 향기로
우리의 보금자리를 채우고,
살아 있는 모든 상처를
온몸으로 어루만지며,
탄생의 기쁨처럼
죽음에 이르고 싶다.






부재중


그녀는 매일 내 방을 청소하고 간다.
나는 아직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어질러 놓은
어제의 흔적들을
진공청소기로 말끔히 흠입해 버리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주인 없는 빈 방을 걸어 잠그고
기나긴 복도 끝, 그림자만 늘어뜨린 채,
부재중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또 다른 방문을 향해
오늘 아침에도
덧없는 존재의 열쇠를 디밀고 있을 것이다.





너를 보내고


언젠가
지하 노래방에서
윤도현의 <너를 보내고>라는 노래를
밤새도록 부른 적이 있다.


혼자 있다보면, 문득
지나간 사람이
아니, 떠나보낸 사랑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했던가
`인생은 잃어버린 시간에 불과하다고.`






사랑은 없다



그녀가 내게서 등을 돌릴 때
사랑은 빗소리처럼 쓸쓸했다.
혼자서 돌아오는 길 위에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허무를
온몸에 맞으며 나는,
오직, 같은 말만을
되뇌이고 있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는 사기라는 것을
사랑은 언제나 제자리에 없다는 것을







무명


불을 켜지 못하는 나는
언제나 어둠 속의 과녁이 된다.
어둠 속에서 당기는 절망의 시위,
정녕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약 같은 소주를 목구멍에 털며 날려 버리는
일상의 화살.
나의 사랑, 나의 불행은
쑥대밭의 기억 속을 가로질러 날아가고
해질 무렵 다시
지친 내 허리 위로 떨어지는
서슬 퍼런 절망의 활촉에
쓰러지리라, 얼마든지
그러나 남겨둘 말이 없어 슬프다.
나누어 가질 것이 없어 슬프다.
우리들이 나누어 가질
하늘과, 땅과, 빵과, 그리움은
어디로 갔는가.
남은 건 오로지
소금으로 말라 버린 눈물인가,
그러나 불을 켜지 못하는 나는
마지막 남은 눈물의 흔적조차
확인하지 못한다.


 


구룡령 너머에는
잃어버린 시간이 산다




`인생은 결국 잃어버린 시간에 불과하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이다.


겨울이면 습관처럼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
길을 나선다.
생각보다 먼저 왔다
언젠지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고 마는
절실함으로 타오르는
지나쳐 버린
아픈 삶의
그림자,
그림자들.
오늘밤도
산장마다엔
잃어버린 시간들이
시린 사랑의 기억들을
고드름처럼 매단 채
안타까운 밤을 밝히고 있다.





길을 잃다



무작정 길을 나서는데
문득 가야할 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아무런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고,
가도 가도 아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을 때
두려움 속에서
무거운 그림자를 끌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먼 옛날의 희미한
기억 하나.
기억 둘.


그 기억 너머엔, 어김없이
그리움이 어둠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길에서 길을 만나다



길을 가다가
또 다른 길을 만난다.
고향으로 가는 길,
산사로 가는 길,
강으로 바다로 맞닿아 있는 길.


길을 가다보면
마음으로 통하는
또 하나의 길이
바쁜 내 발걸음을 설레게 한다.






길이 끊어진 곳에 강이 있었다



사람은 길로 모이고
물은 강이 되어 흐른다.
사람들을 따라 길을 가다 보니
날은 어두워지고
일순간,
길은 보이지 않았다.
길이 끊긴 그 자리엔
남루한 삶의 그림자들이
만 갈래 삶의 옷자락을
저마다의 신열로 적시며
이제는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있었다.
.........................................................
(정리 : 조일영 위원)

 

 

 

 

출처 / 인터넷문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