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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창작 강의

본질적인 것에 대하여

by 丹野 2009. 3. 30.

 

 

 

    

                     본질적인 것에 대하여


                                                   ― 현대시 창간 15주년에 부쳐

 

                                                                                  

                                                                        

                                                            원 구 식(현대시 발행인)

 

 


1. 상황의 힘


지난 11월 29일 김춘수 선생께서 기도폐색으로 몸져누우신 지 4개월 여만에 타계하셨다. 향년 82세. 5년 전 사별하신 사모님 곁으로 가셨다. 12월 1일, ‘시인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장에서 나는 선생과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음에 문득 놀랬다. 나는 선생의 작품을 통해 시에 눈을 떴으며, 대학원 시절 수업을 받은 제자이기도 했다. 선생은 내가 발행인으로 있는 월간 <현대시> 창간의 주역이셨으며,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자서전 <꽃과 여우>와 첫 산문시집 <서서 잠자는 숲>을 본지에 연재하셨다. 뿐 아니라 다큐멘터리 <무의미의 시인 김춘수>와 아직 편집되지 않은 300여 분의 영상자료를 숙제처럼 남기셨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로 선생과의 인연을 다 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선생은 내가 그저 막연히 알고 있었던 ‘실존주의’를 제대로 깨우쳐 주신 분이다. 그로 인해 나는 어설프나마 사회와 역사와 존재와 본질 등에 대한 지적 편력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20여 년이나 지난 그날 밤의 강의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한국시협 회장이셨던 선생을 모시고 근로청소년 문예강좌에 갔었을 때의 일이다. (나는 무슨 통과의례처럼 20대부터 10여 년 간 한국시협 간사를 했다) 공장들이 밀집한 영등포구 구로동에 위치한 구로청소년복지회관(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에서 선생은 오륙십 여 명의 청소년들 앞에서 당신의 시작품 「꽃」이 연애시가 아니라 실존주의 작품이라는 것을 이해시키시려고 꽤나 애를 쓰셨다. 허름한 강의실의 조명은 어두웠고, 마이크는 그날따라 유난히 귀가 멍멍하게 웅웅거리는 것 같았다.


 청소년들은 선생의 강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때문에 선생은 같은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쉽게 들려 주셨다. 강의 진행을 돕는 게 주임무였던 나는 그날도 으레 뒷자리에 앉아 일상에 지친 몸을 달래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선생의 말씀 몇 마디가 예리하게 뇌수에 꽂히는 것이었다. “여러분, 본질이라는 게 뭐예요? 꽃은 아름답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 바로 이런 것들이 본질예요. 그런데, 전쟁이 나면 어때요? 전쟁터에선 사람이 사람을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훈장을 받잖아요. 말하자면 전쟁이라는 상황이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는 본질을 변화시킨단 말예요. 그러니까 실존주의를 말하려면 반드시 ‘상황’이라는 말을 해주지 않으면 안돼요.” 부끄럽게도 나는, 고등학교 교육만 제대로 받았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상식적인 사실을 그때까지 깨우치지 못했던 것이다. 뿐 아니라 단순한 말 몇 마디로‘본질’에 대한 개념을 이렇게 명쾌하게 꿰뚫어 주는 선생이 고마웠다.


 이어 선생은 실존주의 작품 실제의 예로 까뮈의 <이방인>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간략하게 그 내용을 압축해 옮기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이 소설 끝 부문엔 주인공 뫼르소가 사막을 여행하는 중 바위 틈에서 자신을 쏘아보는 아랍인을 권총으로 살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체포된 뫼르소는 재판정에서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햇빛이 죽였다”고 말한다. 왜 그랬을까? 햇빛이 죽였다니 무슨 말인가? 이 대목을 선생은 매우 쉽게 깨우쳐 주셨다. 주인공 뫼르소가 덥고 짜증나는 사막이 아니라 한적한 세느강 강변을 애인과 함께 거닐었을 때 누군가 자신을 쏘아보았으면 그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햇볕이 내리쬐고 땀이 나고 갈증이 나는 사막이라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을 째려보는 것이었다. 마침 총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말하자면,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라 상황이 죽였다는 것이다. 햇빛이라는 말을 상황으로 바꾸어 놓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인지 몰라도 이날 밤 강의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살이 떨린다. 순식간에 실존주의를 깨우친 것이다. 아니 그보다 본질을 변화시키는 상황의 힘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와 나는 한쪽 구석에 처박어 두었던, 자신의 문학이 굶주린 아프리카 기아 소년들에게 먹일 빵 한 조각만도 못하다는 사르트르의 책을 다시 꺼내 보았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고등학교 시절 입시를 위해 교과서처럼 외웠던 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말은 당시 내게 너무 추상적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밑에 붉은 줄을 긋고 다음과 같은 말을 적어 넣었다. “상황은 본질을 변화시키는 엄청난 힘을 가졌다.” 이것이 바로 핵심인 것이다.


 이 힘이 바로 오늘의 한국 현대사를 지배하고 있다. 거리에서, 학교에서, 아니 도처에서 우리는 이 힘과 만나게 된다. 학생은 본질적으로 화염병을 던지면 안 되는데 군부독재라는 상황이 학생들의 화염병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 교수/교사들은 학생들에게 현실참여를 독려하고, 현장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은 알게 모르게 죄스러운 자책감에 빠지는 상황이 조성된다. 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현실참여를 주장하는 상황문학이 우리 문단을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실제로 참여정부를 창출하는 전위대였고, 오늘날 우리 문단/문화의 중심에서 모든 권력을 장악한 실세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물결을 이루며 흐르고 있는 한국현대사의 중심을 보고 있는 것이다.


2. 본질의 힘


그렇다면 본질은 상황의 힘 앞에 언제든지 변화할 수밖에 없는 만큼 나약한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해, 아니다. 그렇지 않다. 본질의 힘을 살펴보려면 본질을 추구하는 종교의 세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유대의 민중들은 애타게 기다렸던 메시아를 맞이하였다. 그들은 왜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일까. 한마디로 말해 그들이 처한 상황 때문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헐벗고 굶주린 노예 상태에 놓여 있었다. 우리가 당한 일제 식민지의 수탈보다 훨씬 더 가혹한 속박과 가렴주구에 시달렸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착취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자유롭고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 줄 메시아를 간절하게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맞이한 예수라는 청년 메시아는 이러한 현실의 문제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오로지 하늘 나라에 대한 이야기만을 했다. 땅/물질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하나님/정신에 대한 이야기만을 했던 것이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청년 메시아를 시험에 빠뜨린다. 이른 바 바리새파의 사람들이 가이사의 모습이 찍힌 로마의 동전을 들고 와 로마 정부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그러지 말아야 하는지를 물은 것이다. 로마의 통치 하에서 그들에게 세금을 내야 한다면 유대인을 배신하는 행위로 비춰질 것이며, 만약 내지 않아도 된다 하면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이 되는 상황 속에서 청년 메시아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것으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라는 말을 남긴다. 한마디로 말해 본질과 상황을 철저히 구분했던 것이다.


 오로지 본질만을 추구했던 청년 메시아는 유대의 민중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오늘의 정치적 논리로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자면, 이 청년 메시아는 유대인들의 정치 지도자가 되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의 민중들과 함께 로마의 독재를 타도하는 선봉이 되어 독립을 쟁취하고 유대의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성경 어느 대목을 들춰보아도 이러한 정치논리나 발언은 한마디도 없다. 그는 철저하게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본질에 대한 이야기만 함으로써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것이다. 그 결과가 오늘 우리가 보는 기독교의 힘이다. 본질의 힘 또한 상황의 힘 못지않게 큰 것이다.


 최근 한 여성 시인이 "예수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상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상범으로 잡혀 죽은 국가보안법의 희생자"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말마따나 "예수는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아니라 문둥이들, 병자들, 창녀들, 세리들, 가난한 어부들과 함께 지냈"지만 그들에게 하늘 나라에 대한 이야기만을 했지 그 어떤 정치적이고도 계급적인 이야기, 다시 말해 땅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눈을 씻고 성경을 들쳐보아도 청년 메시아가 혁명적인 사상의 소유자로 그들에게 현실참여를 말하는 대목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혁명적인 사상을 소유한 유대 민중 지도자들에게 청년 메시아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헤롯이나 빌라도가 아니라 바로 이들이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본론으로 돌아와서, 때문에 나는 상황의 힘이 지배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도, 본질을 추구하는 시를 쓰는 일 역시 다른 일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질의 힘 또한 상황의 힘 못지않게 크기 때문이다.


3. 이념의 집중화 현상


로마의 역사는 건국 이래 수백 년 간 전쟁으로 연속되어 있다. 상황이 급박해질수록 본질의 힘은 약해진다. 전쟁으로 거대한 제국을 이룬 로마는 두 차례에 걸져 본질의 세례를 받는다. 그 첫 번째가 헬레니즘의 영향이다.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했으나 정작 그리스의 사상과 예술, 그리고 문학에 정복되었다. 두 번째가 헤브라이즘의 영향이다. 기독교는 네로와 같은 폭군 아래 순교의 피를 흘리며 서기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해 신교의 자유가 얻는다. 이어 교황제도가 확립되고 전 유럽에 걸쳐 정치, 경제, 문화 등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헤브라이즘이 가장 승리한 중세에, 다시 말해 본질이 가장 승리한 믿음의 시대에 유럽은 문화적으로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5세기 말부터 15세기 중엽에 이르는 1천여 년 이상의 세월이 단지 암흑시대에 불과하다는 통념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그레고리 교황 같은 사람은 실제로 “무지無知는 신앙의 어머니”라 하여 성서를 금독시키고, 학자를 쫓아냈으며, 도서관을 불태웠다. 페스트가 창궐했으며 인간의 평균수명은 30세 정도였다. 중세 수도원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펼치면 도처에서 중세의 금욕적이면서도 칙칙하고 암울한 그림자를 만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본질이 지배하는 시대에 왜 문화가 암흑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까. 먼저 철학의 타락을 들 수가 있다. 우주의 궁극적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철학이 기독교만을 위한 어용철학으로 둔갑하였다. 미술은 오로지 성화만을 그렸으며, 건축은 교회를 짓는 데 봉사했다. 몇 안 되는 문학작품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지상에 신의 나라를 건설할 신성한 사명이 세속적인 정치권력보다 우위에 놓였다.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이념의 집중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본질이든 상황이든 이념의 집중화 현상이 일어나면 문화는 암흑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4. 시는 본질적인 것인가, 상황적인 것인가


20대 후반 시절, 나는 지극히 불행하게도 그동안 공부하고 읽었던 책을 모두 잃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다. 그중에는 문청 시절 밑줄을 쳐가며 읽었던 김춘수 선생의 시집도 들어 있다. 그 시절 느꼈던 감동을 희미한 기억으로나마 더듬어 보면, 선생의 시집 해설 끝 부문에, “문학이 그 어떤 이데올로기와 손을 잡는다고 해서 죽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학이 그 어떤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봉사를 강요당할 때 문학은 문학이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 자체”라는 어느 평론가의 지극히 개론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이 대목은 아직도 내게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다.


 우리는 지금 도도한 물줄기를 이루며 흐르고 있는 한국 현대사를 보고 있다. 때로 이미 상영이 끝난 낡은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되풀이해 돌아가는 것이다. 문학 또한 역사의 산물이다. 시대는 스스로 그 시대의 스타일을 만든다.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문학 역시 이 시대의 지배적인 담론으로 자리를 잡은 상황의 문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이 시대에 시를 쓰는 우리는 문학이 본질적인 것인지, 아니면 상황적인 것인지 역사를 향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시대의 지배적인 문학권력으로 자리잡은 상황문학이 중세의 본질이 그랬던 것처럼 이념의 집중화 현상을 일으키는 것인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즈음에서 우리는 문학개론서를 들춰볼 필요가 있다. 그 앞 부문엔 문학과 역사에 관한 논의가 거의 공식처럼 들어 있다. 역사는 이미 일어났던 일을 다루며 문학은 일어날지도 모를 일을 그린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를 떠난다면, 문학과 역사에 대한 논의는 대개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문학이 역사의 산물로 그것이 속한 시대와 사회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문학은 그 시대에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읽힌다는 작가의 초월성이다. 앞의 것을 상황적이라 한다면 뒤의 것은 본질에 가깝다. 그것을 우리는 고전이라 부른다. 물론 상황문학이 고전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고전이 된 상황문학 속엔 문학적 본질이 담겨 있다. 고전이 고전이 되는 까닭은 바로 그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문학의 본질성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문학은 다분히 본질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문학이 다수결에 의해 우열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의 신神이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지 않듯이 본질은 상황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간혹 민주주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만능의 척도로 오해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황의 논리이지 본질의 논리가 아니다. 마라톤에서 1등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1등이지, 그 사람이 싫다거나 어느 사람이 좋다고 해서 다수결로 뒤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우승컵을 안겨줄 수는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세상에는 상황의 논리가 적용되는 곳이 있고, 본질의 논리가 적용되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문학은 70% 정도 본질적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우리 시단을 돌아보면, 나는 우리 시가 시급히 넘어야 할 두 가지 장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이미 식상한 모더니즘 계열의 시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적 빈곤에 허덕이는 리얼리즘 계열의 시이다.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중요한 것은 오늘이라는 시점이다. 모더니즘은 이승훈의 말처럼 새로워지려는 문학적인 태도이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 시의 본질인 노래성이 세상을 지배하는 지금 지나친 산문시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리얼리즘 계열의 시를 쓰는 시인들은 소련의 붕괴 이후 거의 대부분 서정시를 쓰고 있다. 한 나라의 문학이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으로 나뉘어진 것은 문학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구도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아니다. 문학은 전통과 모더니즘의 구도로 나뉘어지는 것이 문학의 본질성과 더 가깝다. 이제 그런 이야기를 할 충분한 시간이 되었다.


본지가 1990년 벽두 고고의 성을 울리며 창간된 지 어느덧 15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시전문지가 큰 흔들림없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본지를 사랑하는 애독자들과 시인들의 희생과 도움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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