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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시인/詩 창작 강의

우리 시의 현재와 미래 / 장이지

by 丹野 2009.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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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의 현재와 미래


                                                                

                                                      역류문화와 세대교체 -우리 시의 현재와 미래

                                           

                                                                                 장 이 지

 

 


 

차 례


1. 머리말

2. 미래파 담론의 세대론적 한계 5. 세대론의 향방

3. 신세대 시의 특징적 한계

4. 문화의 역류가 신세대 시에 미친 영향


1. 머리말


2000년대 우리 시단의 최대 화두는 ‘세대론’의 양상을 띠고 나타났다. 소위 ‘미래파 담론’은 시단의 세대교체와 관련된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젊은 비평가가 신세대 시인들을 일컬어 ‘미래파’라고 명명한 이래로 우리 시단에서는 우리 시의 미래를 이들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노력을 꾸준히 해 왔다. 당초 이 ‘미래파’라는 용어는 우리 시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시인들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는 수사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용어는 젊은 시인들의 과격한 실험주의나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용어로 변질되었다. 미래파의 미래는 있는가라는 식의 비아냥거리는 뉘앙스가 미래파라는 용어에 개입하면서 미래파 담론은 시단의 세대교체에 대한 올바른 논의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기성 시단과 신인들 간의 소통을 논의하면서도 결국 세대 간의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자조가 만연해 있는 것이 작금의 실정이다. 그 가운데 신인들만이 이해할 수 없는 시를 쓰는 자폐아로 매도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볼 일이다. 우리 시 전통의 계승과 발전에 대한 염원이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지금 신세대의 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시단의 세대교체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진지하게 탐문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2. 미래파 담론의 세대론적 한계


사실 미래파 담론은 세대론을 촉발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세대론의 세부 논점들을 올바로 설정하는 데는 방해가 되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선 미래파라는 술어의 비과학성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 용어는 20세기초 박물관과 도서관으로 표상되는 기성의 전통과 제도를 파괴하고 새로운 미학을 정립하고자 했던 전위적인 예술 운동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오늘날 그렇게 급진적인 경향을 띤 신인들은 겨우 몇 사람에 불과하다. 살부의식을 표나게 내세움과 동시에 사회적 금기인 성적 소수자들의 세계를 시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황병승이나 남성 사회의 폭력성을 여성 화자의 성적 망상을 통해 폭로하고 조롱하는 김민정 정도가 미래파의 급진성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용어의 외연이 처음부터 상당히 넓었다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용어는 각종 시 전문 잡지에서 1970년대생 시인들을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용어로 설정된 적도 있다. 2000년 이전에 등단하여 이미 몇 권의 시집을 상재한 몇몇 시인들도 1970년대 이후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 그룹에 포함될 때도 있었다. 급기야 일부 비평가들은 미래파라는 용어로 젊은 시인들을 싸잡아 비판하기도 했는데 비판받는 신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경우 미래파라는 용어로 우리 시단의 미래가 일괄적으로 부정될 위험도 있다고 본다.

미래파에 대한 논란의 와중에서 서정시와 미래파 시가 구분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래파로 통칭된 젊은 시인들의 시 역시 서정시가 아니라고 볼 만한 근거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신서정’이나 ‘서정의 진화’(김수이)라는 비평적 술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설왕설래는 사실 미래파 담론이 지닌 세대론으로서의 약점에서 기인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미래파 담론은 그 용어의 역사성 때문이겠으나 신인들의 지형을 모더니즘을 중축으로 하여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문태준이나 박성우와 같이 전통 서정시를 계승하여 성공한 시인들이 세대론의 맥락에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미래파의 시와 자주 비교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서정 대 반서정’ 혹은 ‘서정 대 신서정’이라는 이상한 구도가 성립된 이유 역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문태준이나 박성우의 경우는 미래파에 대비됨으로써 담론의 장에 편입될 수 있었지만 더 많은 리얼리즘 계열의 신인들은 미래파 담론에서 소외됨으로써 세대론에서도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비평가들은 미래파가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미래파로 분류되곤 하는 신인들이 그 명칭하에 어떤 선언서를 발표하거나 모임을 가진 적은 전혀 없다. 미래파 담론은 기실 실체가 없는 담론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미래파라는 용어로 상찬되고 또 한편으로는 비판되고 있는 시인들은 그 용어로 범주화되는 것에 대해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용어는 신세대의 지형을 밝히기에는 그 한계를 이미 드러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뉴 웨이브’(신형철)라는 용어가 그 대안으로 제출되기도 했지만 그 용어 역시 모더니즘 편향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가 있다.


3. 신세대 시의 특징적 한계


미래파 담론은 그 자체로는 명확한 개념 정립 없이 실체가 없는 담론이 되고 말았지만 미래파에 대한 찬반 논쟁이 가열되면서 신세대 시가 지니고 있는 전반적인 문제점들이 적절하게 노정되는 계기를 만든 면도 있다. 미래파 담론에서 제기된 신세대 시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 국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언어적인 면에서 신세대의 시는 지나치게 외래어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외래어가 많이 유입되었지만 2000년대의 시에서 외래어는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물신(物神)으로 급부상했다. 황병승의 시에서 거의 모든 인물들은 히데키, 리사, 카즈나리, 미호, 사부로, 유사쿠, 시코쿠 등 외국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는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와 같이 외래어와 우리말을 조합하여 하이브리드 신조어를 만드는 실험을 상당히 지속적으로 해 오고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신세대 시인들이 두루 공유하고 있는 특성이다. 신세대들이 외래어에 중독되어 가는 동안 우리 시단에서 사투리를 비롯한 순우리말을 찾아서 쓰려는 노력은 아주 미미했거나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신세대 시인들이 거의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탓도 있지만 모국어를 지키고 계승하는 것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소명의식이 약화된 점은 우려할 만한 현상이다.

둘째, 감각적인 면에서 신세대의 시는 맥락 없이 잔혹하고 자극적인 이미지들에 탐닉하는 경향이 있다. 존속살해나 근친상간, 동성애와 같은 사회적 금기의 위반이 요즘은 더 이상 낯선 소재가 아니다. 잔혹한 이미지의 활용도 그 빈도가 급격히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신체 절단이나 안구 돌출과 같은 자극적인 내용도 평범해 보인다. 젊은 시인들은 ‘눈[目]’보다 ‘눈알’이라는 시어를 더 선호한다. 성적인 망상도 그 출현 빈도가 높다. 성적인 망상의 경우 누구나 비슷한 이미저리를 쓰고 있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가령 ‘촛불’ 모티프는 젊은 시인들이 자주 활용하는 모티프인데 거개가 성적인 표상으로 사용되고 있다. 단순히 윤리적인 면에서 잔혹한 이미지는 안 좋다거나 성에 대한 언급이 점잖지 못하다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비슷한 것들을 쓰고 있다는 몰개성의 문제가 더욱 심각해 보인다. 젊은 시인들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함몰되어 있으며 저마다 자기만의 언어를 쓰고 있어서 소통이 어렵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신세대들이 자기만의 언어를 쓰고 있다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만 들어맞는 지적이다. 많은 젊은 시인들은 비슷한 것들을 쓰고 있다. 실재보다는 환상에 치중하고 있으며 고독감이나 우울증을 마치 시적 방법론처럼 내세우고 있는 형편이다. 이것은 신세대들의 경험이 일천하고 현실 의식이 아직 정립되어 있지 않은 탓으로도 해석된다. 신인들의 시적 상상력이 자극적이고 현란한 이미저리로 표출되는 동안 독자들이 느껴야 했을 불쾌감과 스트레스에 대해서도 한 번은 되돌아볼 시점이다.

셋째, 형식적인 면에서 신세대의 시는 점점 산문화되어 가고 있다. 시의 산문화는 2000년대 시단에서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산문시에서도 어떤 리듬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생각이 최근의 신인들 사이에서는 만연해 있지만 오늘날 유행하는 산문시들은 태반이 산문에 대한 무조건적 승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시의 산문화는 시의 장형화로 이어지고 있다. 김경주나 조연호의 어떤 시들은 각주까지 붙은 장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들의 화법은 주로 잠언투인데 그들의 장시는 역사적․사회적 질료를 시적 배경으로 흡수하지 못한 채 자주 독아론의 함정에 빠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회의를 품게 한다. 역사의식이 탈각된 장시의 유행이나 잠언투․요설체의 창궐은 시의 장르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면서 시의 전통적인 독자층을 와해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되는 현상이다. 물론 장시라든지 산문시를 하나의 형식으로 실험하는 것은 전혀 의미 없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형식에 어울리는 내용에 대한 탐색도 그와 함께 더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신인들은 스타일 면에서 새로운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신세대들의 시를 ‘웰메이드(well-made)’라고 하여 겉은 그럴듯하지만 내실이 없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신세대들의 시는 언어적인 면에서나 감각적인 면에서나 스타일 면에서나 다소 거칠다. 그 거칠다는 점이 신세대들의 약점이기도 하지만 신세대들의 새로움이기도 하다는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2000년대 들어 우리 소설계는 일본 소설을 위시한 외국 소설에 의해 시장이 상당 부분 잠식되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지만 시단의 경우 오히려 신인들의 활약이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졌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4. 문화의 역류가 신세대 시에 미친 영향


어느 시대도 세대교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시단의 신진들은 많은 우려의 시선을 받고 있지만 새로운 문화적 흐름 속에서 그들은 날마다 도전과 응전을 거듭하고 있다. 유독 작금의 신세대가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함몰되어 있어서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피해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문화의 역류(逆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대 간의 격차가 커 보일 따름이다.

문화의 전승․발전은 원래 아버지 세대가 아들 세대에게 문화를 학습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순류(順流)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학 기술의 발전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짐에 따라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새로운 과학 기술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들이 기존의 패러다임에 익숙한 아버지보다 더 빨리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응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인터넷 활용법이나 모바일의 작동법에 대해 배워야만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것을 ‘문화의 역류’라고 부른다.

중견 시인들은 온라인 게임을 모티프로 한 시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신세대들은 문화의 역류를 시적 모티프로 직접 활용한다. 게다가 그들 시의 패러다임은 문화의 역류 현상과 상동성을 지니면서 변해 가고 있다. 기성세대들은 신세대들의 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소통이 안 된다고 쉽게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신세대들이 그들 세대의 문화를 버리고 기성세대의 문화로 말하기를 바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신세대들이 김소월을 말하지 않고 스타크래프트나 카트라이더(온라인 게임)에 대해 말한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다. 기성 세대들은 시단 내부에서의 소통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것은 각종 문예지의 특집이나 앙케이트가 ‘소통’을 화두로 내걸고 있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시단 내부의 소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단과 독자들의 소통이다. 독자들은 시의 변화가 시대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점에 대해 불만을 터뜨린다. 독자들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 시가 대중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이 그들 시대의 시에서 그들과 비슷한 점을 전혀 찾아낼 수 없다면 그것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신세대들은 그들 시대의 문화로 말하고 있다. 앞에서도 잠깐 밝혔듯이 그것은 모티프의 차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구조의 차원에서도 그렇다. 컴퓨터 모니터는 신세대들에게 새로운 환등(幻燈)이 되었다. 각종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블로그․미니 홈피 서비스는 신세대 시의 질감을 변화시키고 있다. 블로그․미니 홈피는 모든 개인이 자기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도록 했다. 블로그․미니 홈피의 ‘스크랩 방식’은 신세대들이 현실 세계를 편집증적으로 분해․재구성하는 방식을 매일 훈련시키고 있다. 황병승 시의 과장되게 일그러지고 현실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이상한 시적 풍경들이나, 김중일 시의 알레고리들은 세계를 편집증적으로 재구성하는 블로그․미니 홈피의 원리를 관통하고 나온 결과물이다. 누구나 웹상에 세워진 자기만의 세계에서 영웅이 될 수 있다. 김경주 시의 낭만성이나 차별화에 대한 욕망도 인터넷 문화의 감수성에서는 낯설지 않다. 누구나 디지털 카메라로 세상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으며 누구나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규정할 수 있다. 세상을 새롭게 규정하는 특권 의식은 잠언투의 유행 현상으로 표출되었다. 채팅 공간의 익명성은 정체성의 혼동과 분열을 촉진시켰다. 시적 자아는 ‘피터 래빗’(유형진)이나 ‘시코쿠’(황병승)나 ‘K’(김중일), ‘고양이’(김행숙) 등으로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려 든다. 그것은 웹상에서 통용되는 닉네임을 연상시킨다. 김민정 시에 나타나는 수많은 동물들은 분열증의 전조처럼 느껴진다. 한 번의 클릭으로 화면을 전환하는 인터넷 서핑은 시적 비유의 체계를 유사성(은유)의 원리에서 인접성(환유)의 원리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신세대들은 인터넷을 통해 국경을 넘어 세계 시민이 되어 가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개성을 입증하기 위해 아무도 가 보지 않은 나라에 가고자 하며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을 듣고자 한다. 언더그라운드 문화에 대한 신세대들의 선호는 그런 맥락에서 읽혀진다.

기성세대는 신세대의 문화에 대해 거의 알려고 하지 않는다. 기성 세대가 바라는 것은 신세대가 재래시장에 가서 순대국밥에 반주를 곁들여 먹는다든지 재래종 꽃 이름을 외운다든지 하는 것이다. 신세대 역시 기성세대의 정당한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기성 정치에 대한 회의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세대들은 문화의 역류를 배경으로 하여 기성 세대에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것처럼 지금의 자기 완결성에 안주하고 있다.


5. 세대론의 향방


시단에서는 우리 시의 전통이 1970년대생 신진 시인들에 이르러 단절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미래파의 미래’라는 식의 특집이 심심치 않게 마련되고 있는 것은 그런 맥락으로 보인다. 그것은 결국 기우임이 밝혀지겠지만 기우의 권리가 기성 세대에게는 있다. 그런 걱정과 새로운 활로의 모색을 통해서 시사는 발전적인 세대교체를 이루어 왔다.

세대교체라는 것은 단순히 시대의 주역이 젊은 사람들로 바뀌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대교체는 어떻게든 이루어지겠지만 뒤에 오는 세대는 앞 세대의 공과를 잘 따지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의 문화적 우월감이 미래의 후손들에게도 통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당면 현실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지만 시인은 동시대만을 살아서는 안 된다. 시인은 과거를 살아야 하고 미래를 살아야 한다. 세대교체는 이런 공시적 안목과 통시적 안목을 두루 지닌 사람들이 이루어 내는 것이다.

세대론은 미래파 담론이 흐지부지 된 현시점에도 진행중이다. 세대론이 형식주의적 새로움이라는 표피적인 현상에만 함몰된다면 우리 시단의 미래는 당분간 스타일의 문제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비관적이라기보다는 그 와중에 리얼리즘적 현안들이 논의될 여지가 축소된다는 것이 안타깝다. 세대론이 제대로 된 세대교체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실험성만으로 시의 가치를 재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1930년대 김기림과 임화 사이에서 전체시 논쟁이 있었고 1960년대 김수영이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아우르는 역량을 보여 주었지만 지금이야말로 통합된 감수성이 요청되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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